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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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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수 없는 것은 항상 가까이에>


1.

 

선혜 : 왜 시간이 지나서야 전부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닿을 수 없는 것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었어.

 

 

  선혜가 취했다. 취해서 헛소리인 듯 아닌 듯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닿을 수 없는 것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구, 나는 그걸 못보는 거냐고.” 나는 그 옆에서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내 앞에 놓인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빅 웨이브 (Big Wave)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선혜 앞에는 카스 (Cass) 500 ML 세 병이 연달아 놓여 있었다. 마시면 거대한 파도가 시원하게 밀려오는 듯 한 느낌이 든다는 맥주 ‘빅 웨이브’. 그렇지만 술도 잘 먹지 못하는 내가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천천히 컵을 움직이는 사이, 어느새 빅 웨이브의 시원한 파도는 김이 푹 빠져 있었다. 컵에 절반쯤 남은 맥주의 표면 위로 바다 속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라오듯이 기포가 살짝 올라왔다. 내가 한 병을 다 마시기도 전에 선혜는 카스 세 병을 이미 다 비우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었다. (‘카스’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불분명했다. ‘카스’는 ‘빅 웨이브’처럼 직관적이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 뜻을 알려면 맥주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장황한 설명을 찾으러 손가락을 황망히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 10명 정도가 들어오면 꽉 찰 것 같은 좁은 펍(Pub)에는 프랭크 시나트라 (Frank Sinatra)의 ‘My Way’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예전에 내가 만났던 여자 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가수였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나는 시나트라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나는 프랭크 시나트라를 즐기면서 듣는 대신 그에 대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그래서 그 노래를 즐기기도 전에 가사를 외워버렸다. 그래서 그가 왜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베이스가 낮게 통통거리는 부분이 감상 포인트라고 급하게 단정지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프랭크 시나트라를 정말로 좋아한 적은 없는 셈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프랭크 시나트라를 좋아하도록 강제했다. 그저 그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면서, 카페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어깨에 손 한번 더 자연스럽게 올려놓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긴 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더 알려고 노력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그게 헤어진 이유다’라고 말해버리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그냥 내 잘못일 뿐이었다. 연인으로서 직무유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선혜가 내 죄목들을 따져 물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쩍게 웃어버렸다. “여자는 항상 관심이 필요하단 말야. 믿음도 필요하고”. 선혜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헤어진 연인의 대변인 인듯이 말들을 뱉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담배위로 길게 타들어가는 담뱃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선혜는 담배를 반도 태우지 않고 땅바닥에 버린 채 먼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문 한 가운데에는 ‘도어즈(Doors)'라고 씌여 있었다. 나는 그게 그 펍의 상호명을 뜻하는 건지, 그 문 자체를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문을 보면서 멋쩍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에게 연애의 죄목을 따져 묻는 것 만큼 의미 없는 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냥 모든 것이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 멋대로 나 자신을 그 사람에게 묶어놓으려 했던 강박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거지. 지나간 건 지나간 것일 뿐. 지나간 것에서 의미를 끄집어내면 괴로운 기억들 밖에 없었다. 억지로 들었던 시나트라의 노래 속에 베이스처럼 퉁퉁거리며 춤추는 과거의 기억을 조금 떨쳐내고 나자,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거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선혜는 고개를 흔들거리며 리듬을 타는 나를 보고서 프랭크 시나트라보다 더 큰 목소리로 훼방을 놓았다.

“야, 노래 추천해. 노래 추천하라고. 니가 좋아하는 거”

 

 이게 무슨 말이냐면 즉, 선혜는 ‘이 노래를 모른다’라는 뜻이다. 선혜는 나보다 노래 듣는 폭이 약간 좁았다. 미개하다고 무시하거나 문화적 감성이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진짜 그랬다는 거다. 나는 그런 선혜가 싫지 않았다. 펍에는 주로 80년대 90년대에 유행했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도 그 때 그 시절 노래를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간간히 아는 노래 몇 개는 흘러나왔다. 엘리엇 스미스(Eliot Smith)와 같은 싱어(Singer)나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와 같은 밴드들의 유명한 넘버들. “그냥 나오는 데로 듣자. 그것도 꽤 나쁘지 않아” 그러나 선혜는 내 말은 듣는 척도 안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만 귀 기울이면서 ‘난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지’ 식의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선혜는 카운터를 향해 소리쳤다.

“언니! 음악 하나 틀어줘요!”

 카운터에서 노래를 틀면서 일하시는 분은 선혜의 친구분 이었다. 선혜의 목소리는 엘리엇 스미스든 액슬 로즈(Axl Rose)든 다 씹어 먹을 정도로 너무 컸다. 친구분은 선혜를 바라보면서 입을 움직였다. 친구분의 입 모양이 불분명한 음절들의 흔적을 허공에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떤-거?’ 선혜는 자신의 친구를 보면서 소리쳤다.


“김. 건. 모의 서울의 달!”

  선혜의 목소리 때문에 우리 뒤에 앉아있던 어르신들이 고개를 돌리셔서 선혜를 일제히 쳐다보았다.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나는 어르신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한 어르신이 탁자에서 벌떡 일어난 선혜를 보고 귀여웠는지 웃기 시작하셨다. 선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스피커에서 노래가 잦아들고 곧 김건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혜는 흐트러진 상의를 바지 쪽으로 쭉 댕기면서,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쥐는 모션을 취했다. 그리고 ‘오늘밤 바라아! 본!’이라고 반 박자 빨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스피커에서 나오는 김건모의 목소리는 선혜의 목소리를 따라 돌림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어르신들은 선혜를 보고 소리 내서 웃기 시작하셨다. 선혜는 아무것도 안들리는 듯이 계속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다시 어르신들을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2.


윤중 : 그래서 내일 갈 수 있지?


  글을 안 쓴지 참 오래된 거 같다. ‘글 속에 사회에 관련된 문제의식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후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년전 이었을 것이다. 깊은 바다 속으로 어린아이들이 천천히 추락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TV 속의 장면은 반쯤 기울어져 있는 배만을 비출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구해냈다고 하는 속보가 연속으로 떴으면 하고 생각했다. 나는 며칠동안 TV 앞에 앉아있기만 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나에게 험한 소리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씨발, 형이 쓴다는 그 글이란 건 도대체 뭔데. 형은 맨날 듣기 좋은 여자 얘기만 써대는데, 도대체 그게 뭔 의미가 있는데?” 사실 그 동생의 말은 험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 ‘씨발’이라는 단어가 과격했을 뿐. 나는 그 애의 말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동생은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예술이란 건 사회를 통찰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듯한 글들은 그저 허무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줘.” 그 날 이후로 나는 글을 참 오랫동안 못쓰게 되었다. 그 애의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내 글들이 그냥 보기 좋은 말만 적어놓은 일기장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와 행했던 행동들을 아름답게만 그려내는 거. 나는 더 이상 그런 것만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선혜는 취했다. 물론 많이 마시지 않은 나도 어느새 좀 취해 있었다. 선혜 앞에는 카스 6병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내 앞에는 빅 웨이브 하나와 ‘산 미구엘’(San Miguel)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선혜는 술은 자기가 많이 마셨는데 돈은 내가 더 많이 내는 것 같다며 핀잔을 줬다. ‘도어즈’의 간판을 보고, 그냥 가볍게 얘기하자는 취지에서 전 연인 얘기를 꺼냈는데, 갑자기 선혜는 팍팍하고 예민해져 있었다. 선혜는 나를 보고 ‘둔하고 못됐다’라고 중얼거리거나, 자신의 감상 속에 푹 빠져서 평소에는 잘 안하는 말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닿을 수 없는 것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었다.’와 같은 뭐 그런 말들. 나는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선혜가 내뱉는 말들은 그저 나에게 공허할 뿐이었다. 백날 연인들의 얘기를 해봤자,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 생각에 자신의 연인들에 대한 얘기는 ‘그 사람이 정말 왜 그랬을까?’ 라고 묻는 거라기 보다는 ‘내가 말하는 게 맞지? 맞다고 해줘’ 식의 강요와 가까웠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아마 이거겠지. ‘그래 니 말이 맞아.’

  답이 정해진 것들은 생각하거나 고민할 시간의 양 또한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이다. 내가 전에 썼던 글들이 딱 그랬다. 나는 헤어진 그녀와의 얘기에 몇 가지 허구를 덧붙여서 작품을 쓰긴 했다. 그러나 그 작품을 쓰면서 나는 ‘그녀가 왜 나랑 헤어졌을까’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거나 알아보려고 했던 적은 없다. 어떠한 행동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이제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사실 선혜와 나는 내일 시청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세월호 추모 행사를 가기 전에 생각을 좀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이 무슨 가치를 담아야 하며,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지, 난 내 자신을 좀 반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선혜는 자기 생각을 추스르기보다 술을 먹고 싶어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뭔 생각으로 이렇게 늦게 까지 술을 먹자고 하는 건지. 그리고 도대체 뭐가 신나서 저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건지. 나는 선혜가 정말로 한심했다.

 

  “그래서 내일 갈 수 있지?” 대화를 딱 끊어버리는 나의 말에 선혜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응? 뭘?” 이상하게 아까까지만 해도 흐리멍텅했던 선혜의 눈이 나를 보고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숨을 하-하고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내일 시청 추모행사 가기로 했잖아.” 나는 시계를 쳐다봤다. 4시 40분. 이미 ‘내일’이 아니었다. 나는 말을 고쳤다. “오늘 오후 6시에 시청 추모행사 가기로 했어.” 선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선혜를 보고 있었다. 선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선혜는 입을 살짝 비틀어 올린 채 컵을 들고 그 속에 든 맥주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스피커에 나오는 노래가 잦아들자 선혜가 입을 열었다.


  “나 못 갈지도 몰라.”


 나는 기가 막혔다. 못 갈지도 모르는 애가 술집에 와서 술이나 먹고 모든 걸 다 잊어버리려는 듯 소리나 빽빽 지르고 앉아 있다니. “그럼 술은 먹자고 왜 했어?” 내 입 속에서 날카로운 말 몇 개가 맴돌고 있었다. 선혜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아래로 내린 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혜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리면서 말했다.

 

“나 오늘 머리 잘랐어. 이쁘지 않아?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가다가 충동적으로 잘랐어.”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선혜의 잘못을 따지려고 준비해 두었던 날카로운 말이 이빨에 부딪히면서 거친 된 발음들로 변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결국 나는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씨발. 너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선혜는 깜짝 놀란 듯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런 선혜를 보면서 계속 말했다. “한심하다. 한심해. 내일 거기 가서 추모하자고 말한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못간다고 하냐. 이렇게 밤새 술이나 처먹고 쓸 데 없는 얘기나 해대려고 안가는 거냐? 씨발.”

 

선혜의 눈이 그렁그렁해지기 시작했다. 선혜는 읍-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두어 번 탕탕 쳤다. 나는 왜 선혜가 울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선혜는 옆자리에 있는 가방을 들고 갑자기 일어섰다. “갈 거야”. 선혜는 이렇게 짧게 말해버리고 계단 쪽으로 급하게 튀어 내려갔다. 우리 뒤에 있던 어르신들이 계단을 걸어 나가는 선혜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내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 카운터에 있던 선혜의 친구분이 나를 보고 말했다. 


“아까 선혜가 계산했어요.”

 

선혜는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혜를 따라잡아 팔목을 붙잡았다. 선혜는 팔을 크게 휘두르며 내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나를 날카롭게 쏘아 보았다. 나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선혜는 가방을 왼팔으로 옮기고 오른손을 들어 내 뺨을 한 대 때렸다.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선혜는 나를 보면서 반 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날 몰라. 왜? 술 먹는 게 뭐 어때서? 내가 술 먹자고 하는 게 그렇게 싫었어? 왜 안가냐고? 슬퍼서 안 간다. 보기만 해도 울 거 같아서 싫으니까. 씨발, 개새끼야.

어? 할 말 있어? 친구한테 씨발이라는 말이 할 소리야? 내가 슬퍼하는 게 뭐가 잘못한 건데. 내가 나쁜 년이야? 왜 그냥 나쁜 년으로 만들고 그래. 씨발 좆같은 새끼야.”

 

  나는 선혜의 팔목을 다시 붙잡았다. 그러나 선혜는 아까처럼 격하게 저항하는 대신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내 얼굴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었다. 선혜는 나를 보면서 말했다. 선혜의 말은 서늘했다.

 

“따라 오지마. 씨발, 존나 재수 없어.”

 

  비틀거리며 거리를 걷는 단발 머리 선혜를 멀찍이 쳐다보면서 나는 아까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선혜는 화가 났다. 왜 화가 난 걸까. 내가 말했던 말은 분명 가시 돋힌 말이었다. 그치만 도통 남 말도 듣지 않는 선혜가 왜 오늘은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걸까. 나는 술에 취해 선혜가 주절거렸던 말들을 기억해냈다. 선혜는 닿을 수 없는 것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선혜의 말대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들 중 나는 제대로 닿아본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말 나는 내 바로 앞에서 술을 마시던 선혜를 이해하지 못했다.

  혜화로에는 카페가 많다. 그 많은 카페들 중 어딘가에서 나는 예전에 만났던 그 사람과 함께 앉아 있던 적이 있다. 그 날은 햇빛이 창문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바닥까지 기어온 햇빛은 나와 그녀의 무릎은 살짝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켜서 노래를 틀었다. 머릿속으로 외운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이 노래 알아?”라고 말했다. “물론이죠.” 그러면서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의뭉스러운 내 표정을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고, 그 웃음은 서울의 달을 부르던 선혜처럼 시나트라의 목소리를 잡아먹을 정도로 컸다. 그 사람은 어깨에 올려놓은 내 왼쪽 손을 지긋이 잡은 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게 했다. “나 어제 머리 좀 잘랐어.”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의 머리가 이미 조금 짧아져 있다는 것을. 조금은 날카롭고 이지적으로 보이던 긴 생머리의 그녀가 단발머리를 하니 조금 장난스러운 요조숙녀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던 것을. “정말 예뻐요. 맘에 들어요.” “정말?” 아니 글쎄, 사실 나는 단발머리를 그렇게 좋아한 적은 없다. 그저 나는 그 시절의 그 사람이 좋아서 그렇게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실 긴 머리가 더 좋았다. 내 머리 속에 남은 그녀는 주로 긴 머리를 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선혜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가면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헤어진 그녀가 조금 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정말로 그리웠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헤어지고 난 바로 그 날 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고, 며칠 뒤에 그 사람과 같이 앉아있던 카페에 혼자 앉아서 무릎으로 기어오는 햇빛을 바라볼 때 나는 내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 같다고 무턱대고 생각해버렸다. 그 날 술을 먹다가 그 사람에게 몇 번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왜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없던 적이 있다. 그냥 나는 너무 괴로웠을 뿐이다. 괴로워서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사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서서히 그 모습이 지워져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선혜의 단발머리를 보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짧은 머리를 다시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긴 머리가 아닌, 그 때 내 왼손을 지긋이 잡은 그녀의 작은 손. 내 품에 한 번에 들어오던 작은 어깨 라인. 그리고 가위의 금속 느낌이 남아있는, 조금은 뻣뻣해져 있던 그녀의 단발머리결. 그 날 카페에서 나온 뒤 그 사람은 허름한 2층 술집을 가리켰고, 그 곳은 다름 아닌 ‘도어즈’였다. “다음엔 저기 가서 꼭 술 먹자!” 조그만 봄바람에 그 사람의 단발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고 그 사람과 같이 ‘도어즈’에 갈 수 없었고 오늘 선혜와 ‘도어즈’에 가서 술을 먹었다. 선혜의 뒷모습은 묘하게 그 사람과 살짝 닮아 있었다. 단순히 머리를 잘라서 일까, 아니면 내가 내 멋대로 선혜를 좋아해보겠다고 다짐해 보고 있는 건가. 나는 알 수 없었다. 선혜는 길을 가면서 김건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목소리에 힘이 빠져서 그랬던 건지, 선혜는 노래 가사가 아니라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새벽 골목에는 비둘기도 없이 조용해서 나는 선혜의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불쌍해, 애들 너무 불쌍해. 왜 시간이 지나야 다 아름다워 보이지? 왜 닿을 수 없는 것들은 가까이에 있는데, 나는 왜 그걸 못 봐..왜”

 그러게 말이다. 왜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의 단발머리가 긴 생머리보다 아름다웠다고 추억하게 되는 건지. 선혜는 저렇게 나와 가까운 친군데, 왜 나는 선혜의 고민을 제대로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욕을 해댄 건지. 왜 우리는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다 잃고 나서 슬퍼해야 하는 건지.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선혜가 택시를 타는 것을 보았다. 선혜가 지나간 택시가 천천히 움직일 때 쯤 나는 뒷골목에서 나와 택시 차량번호를 찍었다. 선혜는 나를 보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소 추운 편이었다. 하늘은 살짝 밝아져 있었고 길거리에는 비둘기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도어즈’는 이미 문을 닫았고 선혜의 친구분도 이미 퇴근해 있었다. 그 때 내 왼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선혜의 문자였다. 노란색의 카카오톡 아이콘 위로 빨간색의 숫자 ‘1’이 떴다. 나는 선혜의 문자를 읽었다.

[미안해. 화내고 욕해서. 그냥 오늘 하루종일 바닷 속에 떨어진 아이들을 생각하다 보니 너무 우울해졌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 해서 머리도 그렇게 잘랐고. 너하고 얘기하면서 우울한 걸 조금이라도 털어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얘기를 제대로 할 걸 그랬어. 내가 널 괴롭혔다면 정말 미안해. 내일 시청에서 봐. 꼭. 정말 미안해. 너도 정말 미안하다면 내일 꼭 나와줘. 조금 있다 봐.]

선혜의 프로필 사진은 어느새 노란 리본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선혜의 프로필 사진을 누르고 전화기의 전원 버튼과 정지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노란 리본 사진이 캡쳐가 되었다. 나는 캡쳐 사진을 내 프로필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대화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미안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나는 내가 지금 사는 이 세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서까지 여전히 답을 못 내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왜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의 단발머리가 긴 생머리보다 아름다웠다고 추억하게 되는 건지. 왜 선혜를 이해하려는 생각도 하지 못한 건지. 왜 우리는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다 잃고 나서 슬퍼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나는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언젠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겠지. 아니 답을 얻게 되기 보다는 나 스스로 그 생각을 어떻게 해결할 지 나름의 결정을 할 수 있게 되겠지.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니 이 글은 여기서 마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금은 4월 16일. 9시 26분. 이 글을 다 쓰면 조금 잤다가 시청으로 나갈 것이다. 나는 지금 조금이라도 자야만 한다. 선혜를 만나 ‘나도 미안해’라고 말하기 위해, 추모행사에 나가기 위해. 그리고 내 질문들을 향해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내가 집 밖을 나서게 될 오후 6시 쯤에 ‘도어즈’는 이미 문을 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늘도 프랭크 시나트라, 엘리엇 스미스 그리고 김건모의 노래가 울려 퍼질지도 모르겠다.


<끝>


* '더 도어즈'는 혜화동에 있는 펍(Pub)의 상호명.


이름 : 강윤중

HP : 010 - 3328 - 4815

E-Mail : yunjoong90@naver.com

Blog : http://blog.naver.com/yunjoong90/220332086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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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돌고래의 생존법 1 sush 2015.12.08 341
535 한 도시전설 이야기 1 DRKwriter 2015.12.10 32
534 고양이가 태어나는 밤 1 Amy 2015.12.10 71
» 닿을 수 없는 것은 항상 가까이에 - '더 도어즈 (The Doors)' 1 bgi 2015.12.10 48
532 마음의 치유 1 file 임아영 2015.12.10 193
531 ▬▬▬▬▬ <창작콘테스트> 제8차 공모전을 마감하고, 이후 제9차 공모전을 접수합니다 ▬▬▬▬▬ korean 2015.12.10 104
530 빈곤논쟁 1 에고시즘 2015.12.30 378
529 통증 1 도로시 2015.12.31 310
528 자전거 도둑 1 내젊은날의숲 2015.12.31 66
527 선생님 1 나무꾼 2016.01.02 64
526 찰나 1 망고주쑤 2016.01.04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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