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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3 18:30

새집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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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증후군


아침부터 아버지가 집에 귀신이 있다며 발코니로 나가셨다. 커다란 이불을 가지고 나간 걸 보니 오늘도 하루 종일 발코니에 계실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발코니 정중앙에 쭈그리고 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발코니로 나가기만 하면 말을 하느라 바빴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양 행동했다.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낯설고 무서웠지만 그것이 병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은 이인증이었다. 쉽게 말해 다중인격이였다. 이인증은 정신학적으로 잊고 싶은 끔직한 과거의 경험과 갈등적인 상황에 대해 자아를 방어하는 일종의 정서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경우 탈북 당시의 극한의 스트레스와 남한 사회의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원인인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해 주었다.

아버지는 평양의 김형직사범대학의 교수였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전공 지식은 물론 사상적으로도 뛰어나 학생들은 물론 당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평소 술을 즐기시던 아버지는 같이 근무하시는 교수들과 술을 마시며 바른 말을 하는 게 문제였다. 배급도 주지 않고 월급도 주지 않으면 굶어죽으라는 말밖에 더 되겠느냐며 당을 비난하는 말을 내뱉은 게 실수였다. 대부분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교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아버지를 신고한 듯했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은 이내 반당반혁명분자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우리는 북에서 살 수가 없었다.

식사하시라는 내 말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아무래도 발코니에서 나올 생각이 없으신 듯했다. 시간을 보았다. 8시였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첫 출근부터 지각할 것이다. 나는 식탁을 대충 차려 놓고 아버지의 휴대전화를 챙겨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다. 아버지는 알았다는 듯 빨리 가 보라며 손짓했다.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빠져나왔다.

 

회사는 나린정보라는 곳이었다. 생소한 이름의 회사였다. 물론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해도 나에게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일을 구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이력서를 발송했고, 그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락 온 것이 이 회사였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면접 때 보았던 팀장이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양팔을 벌려 가며 환영하는 폼이 가식 같았지만 나 또한 살기 위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팀장은 자기 소개서에 적힌 나의 탈북 이야기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죽기 살기의 정신이라면 이 회사에서 빛을 볼 것이라며 나를 다독였다.

팀장의 말에 의하면 회사는 신용정보회사라고 하였다. 카드 회사나 통신 회사의 연체금들을 헐값에 사들여 연체금을 회수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대신 빚을 받아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 회수한 금액의 5퍼센트가 내 월급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웠다.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빚을 회수한 만큼 준다니……. 열심히 일하고도 돈을 한 푼도 못 받아 내면 월급을 못 받는 건가? 남한에 사기꾼들이 많다던데…….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팀장은 그런 나를 의식했는지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으로 직원들의 월급 명세서를 나에게 보여 주었다. 모두 300만 원이 넘었다. 1등을 한 사람은 천오백만 원도 받아 갔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나원에서 받은 정착금보다 다섯 배는 많아 보였다. 이런 식으로 번다면 금세 부자가 될 것만 같았다.

“인호 씨도 할 수 있어요. 열심히 하면.”

팀장은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팀장은 좁은 길을 따라 나를 5층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은 시장통을 옮겨 놓은 것 마냥 시끄러웠다. 널따란 사무실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면을 응시한 채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도 있었고, 우는 사람도 있었고, 윽박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팀장은 맨 뒤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는 남자에게 나를 인계했다. 남자가 나를 힐끔 보더니 손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훑어본 느낌이었다. 얼른 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팀장이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앞으로 내가 일하게 될 소액 채권 팀의 조장이라 하였다. 팀장의 말에 의하면 조장은 회사에서 실적이 제일 좋아 월급이 가장 많다고 했다. 조장은 내가 회수하는 돈의 2퍼센트를 월급으로 가져갔다. 조장의 밑에는 나와 같은 조원들이 20명은 되었다.

“인호 씨가 열심히 해야 인호 씨도 많이 벌고, 나도 많이 버는 거예요. 아셨죠?”

조장은 나와 자신이 하나의 뿌리임을 강조하는 듯 수익구조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팀장은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사라졌다.

조장은 서른 장 정도 되는 종이를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사람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미납금, 비고 난으로 나뉘어 있었다.

“인호 씨가 한 달 동안 관리할 리스트예요. 총 오천오백이십사만 원이구요, 여기서 회수한 만큼 가져가시는 거예요.”

조장은 전화 거는 법과 받는 법 등을 세세히 가르쳐 주었다. 대체로 돈을 받아 내기 위해서는 법적인 전문용어를 많이 써야 했고, 말투는 강경해야 했다. 나는 조장의 말투를 따라 해 보며 이해하기 힘든 단어들은 종이에 써 가며 연습했다.

“말투만 보면 탈북자인지 모르겠어요. 사투리 많이 고치셨나 봐요. 북한 억양이 하나도 없네.”

나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탈북자가 남한에서 정착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투리와 억양을 고치는 일이었다. 일의 능력은 차선이었다. 언어가 완벽하고 남한 사람처럼 말끔해 보여야 그나마 공장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1년 전에는 전화상으로 내 사투리만 듣고 퇴짜를 맞은 적도 있었다. 남한 사회에서 북한 사투리는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장은 전화를 걸어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독촉을 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1주일 뒤에 입금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조장은 통화 내용을 전산 비고란에다 입력해 두었다. 1주일이 지나면 다시 연락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연체자들이 약속을 했다고 해서 돈을 다 낸다고 믿지 마세요. 다 시간 벌려는 수작이니까 약속 기간은 최대한 짧게. 아셨죠?”

이번엔 조장이 수화기를 인호에게 건넸다. 직접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검지로 꼭꼭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연체자의 어머니인 듯했다. 나는 배운 대로 통화를 했다. 짧고 강경하게.

할머니는 아들이 집에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몸이 안 좋은 듯 목소리마저 힘이 없었다. 집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할머니도 구부정한 등을 한 채 발코니에 앉아 있을 것 만 같았다.

조장이 옆에서 더 세게 하라며 손짓한다. 법적 처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 또한 나처럼 법에 어두운지 재판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을 먹었다. 배운 대로 이번에는 형사고발을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아들 좀 살려 달라며 울었다. 사업하다가 망해서 그런 거라며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조장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몰아붙였지만 나는 끝내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다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인호 씨 그렇게 마음 약하면 남한에서 못 살아요. 정신 차려요. 아셨죠?”

조장은 다시 전화를 걸어 나에게 건넸다. 나는 억지로 통화를 했다. 모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하루하루 살기 바쁘고 아픈 사람들이었다. 조장은 그 모든 게 다 거짓이라고 했다. 동정심을 유발해서 돈을 안 내려는 수작이라고. 그러니 어떻게든 받아 내야 내가 산단다. 이것이 남한 사회를 사는 법이라고 했다.

갑자기 모기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힘없이 처진 사람들의 몸에 앉아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나는 오늘 일백이십삼 통의 전화와 쉰아홉 개의 납부 약속을 잡았다.

 

**

 

아버지는 요즘 발코니 출입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신 장소를 안방으로 옮긴 듯 아버지는 그곳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아버지는 이불에 누운 채 한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이 났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눈도 뜨고 있고 숨도 쉬고 있었다. 식사하셨어요? 내 질문에도 아버지는 대꾸가 없었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부쩍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묻는 말에 대답은 하는 정도였지만, 요즘은 질문조차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가끔 유일하게 하는 말이 귀신이 보인다는 소리였다. 여전히 아버지의 눈에는 귀신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병세가 더 안 좋아졌거나 집터가 안 맞는 듯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지를 위해 당장이라도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형편상 무리였다. 우리의 재산이라고 해 봐야 하나원 퇴소시 받은 아파트 보증금과 정착비 삼백만 원이 전부였다. 지금 당장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불로 아버지를 덮어 드리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알 수 없는 자괴감과 죄책감들이 몰려왔지만 애써 잠을 청했다. 잠을 자야 내일 일을 할 수 있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을 벌어야 이사를 갈 수 있었지만 나는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잠이 들었던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거실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도둑의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버지인 듯싶었다. 얼른 거실로 나가 보았다. 아버지가 가방에 옷가지를 싸들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붙잡고 막아섰다. 아버지는 덕희네 집에 가야 한다며 난리를 쳤다. 아버지의 양어깨를 잡아 세차게 흔들었다. 이렇게라도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서였다. 덕희는 이미 정치범 수용소에서 공개 처형을 당해 죽었다. 벌써 3년도 넘은 일이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식탁에 놓아둔 약봉지를 확인해 보았다. 그대로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억지로 약을 먹였다. 아버지의 눈동자가 풀려 갔다. 아버지는 힘없이 안방으로 돌아갔다. 맥이 풀렸다. 나는 거실 바닥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더 이상의 소란은 없었지만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실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일이 끝나고 회사에서 회식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걱정이 되어 회식에 불참하려 했지만 입사를 환영하는 환영회 겸 하는 회식이라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장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지만 적어도 1차까지는 있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동료들과 함께 떠밀리듯 고기집으로 향했다. 동료들은 한 달 마감이 끝나고 목표를 달성해서인지 모두 표정이 밝아 보였다. 거기에 오랜만에 먹는 공짜 술과 고기도 한몫하는 듯했다. 동료들은 그동안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며 나에게 술잔을 돌리며 알은척을 했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성의를 봐서 주는 술은 거절하지 않고 죄다 받아마셨다.

뒤쪽에 앉아 있던 안경을 낀 직원이 내 옆으로 와 앉아 술을 권했다. 나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 안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진짜 북한에 쌀 없어요?”

안경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의 의도가 궁금해서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얼굴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쌀이 없으니까 넘어왔겠지. 넌 텔레비전도 안 보냐?”

옆의 직원이 대신 대답했다.

“쌀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 라면 없으면 빵 먹으면 되고. 안 그래?”

안경의 농담에 직원들이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아무래도 이 농담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도 웃기지 않았지만 이들과 하나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북한에서 쌀보다 라면이 더 귀하다는 걸 이들이 알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라면은 속도전 국수라 해서 인기가 좋았다. 라면 한 박스를 얻으려면 적어도 쌀 여섯 가마니는 있어야 했다. 당연히 빵은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먹다 남은 고기와 반찬, 야채 들이 즐비했다. 이미 한 번 상에 올라갔으니 모두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것이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소똥에서 콩 한 알을 찾아 먹기 위해 풀밭을 뒤지던 기억, 개구리를 잡아 껍질도 까지 않은 채 생으로 먹던 기억이 났다. 어느 쪽은 넘쳐서 문제였고 어느 쪽은 부족해서 문제였다.

옆에서 팀장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가만히 들어 보니 탈북자에 관한 욕이었다. 내 이력서를 보고 감동했다는 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괴로운 내용이었다.

“전쟁이 나면 뭐가 제일 위험한 줄 알아? 탈북자 새끼들이야, 탈북자 새끼들. 위에서는 빨갱이 새끼들 총 들고 내려오지, 안에서는 탈북자 새끼들이 칼 들고 설친다니까.”

팀장은 탈북을 위장한 간첩들이 있을 수 있다며 열변을 토해 냈다. 나는 간첩처럼 그의 말을 몰래 엿듣고 있었다. 갑자기 팀장이 나를 불렀다. 술을 먹다 말고 팀장의 옆으로 가 앉았다.

“박인호 씨.”

“예”

“자네, 진짜 탈북자 맞아?”

“예. 맞습니다.”

“그럼 김일성 욕해 봐.”

김일성이라는 말에 누가 목이라도 조르듯 숨이 막혀 왔다.

“내 말 안 들려? 김일성 욕해 보라고.”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팀장을 향해 있었다. 모두 내 입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탈북했다면서 왜 김일성 욕을 못해? 당신 탈북한 거 맞아?”

팀장은 내 입에서 김일성의 욕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듯 나를 다그쳤다.

나도 알고 있었다, 김일성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남한에 넘어온 직후 나는 북한체제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으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 정도에 비하면 욕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나는 김일성의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야! 박인호, 너 회사 잘리고 싶어! 까라면 까! 여긴 남한이야, 인마!”

순간 나도 모르게 김일성 욕이 나왔다. 살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해고당하면 나와 아버지는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억지로 참고 욕을 했다. 턱과 이빨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더 크게! 북한에서 당한 걸 생각해 봐!”

팀장이 기분 좋은 듯 소리쳤다. 팀장의 소리에 맞추어 내 욕은 점점 커져 갔다.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좋아한다. 팀장은 맥주를 넘치도록 따르고 주변의 직원들과 건배를 했다. 안경이 재미있다는 듯 휴대전화의 동영상 기능으로 나를 찍었다. 내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고 내 눈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집에 오는 길 내내 눈물이 낫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은 서럽게 올라왔다. 마치 아버지를 욕보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김일성이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리를 이용하고 기만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남한 말처럼 강한 세뇌 교육을 받아 기계적으로 눈물이 나고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도 서러웠다. 아버지의 얼굴에 똥칠을 하고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물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기사에게 부탁해 버스를 정차시키자마자 밖으로 뛰어내렸다. 정류장의 벤치를 붙잡고 토했다. 회식 때 먹은 술과 고기들이 목구멍에서 쏟아 내리듯 떨어졌다. 역한 냄새와 함께 토사물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지와 구두에도 노란 점처럼 토사물이 묻어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바지가 더러워져서도 구두가 더러워져서도 아니었다. 그것이 촉발제가 될 순 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파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일성을 욕하게 한 팀장이 미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구두에 붙은 노란 토사물처럼 남한 사회에 껌 딱지처럼 붙어사는 내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분노는 점점 살의로 바뀌어 갔다.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본능이 꿈틀거렸다. 순간,

“아저씨, 힘들면 손가락 넣어요.”

누군가 내 등을 손바닥으로 두들겨 주며 말을 하고 있었다. 여자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긴 머리에 정장을 입은 20대 후반의 여자였다.

“많이 드셨나 봐요?”

여자는 몸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내가 가장 답답해하는 쪽만 골라 손바닥으로 등을 쳐 주었다. 시원함과 함께 토가 쏟아져 나왔다. 신기하게도 토를 할수록 분노와 살의가 엷어져 갔다. 마치 토와 함께 나의 분노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시원해요?”

여자가 환하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입에서 냄새가 날까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이라며 여자가 나를 부축해 주는데,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걸음걸이나 말투가 정상적이진 않아 보였다.

“아저씨, 아무리 힘들어도 술은 적당히 먹어야죠? 이렇게 토하도록 먹으면 돼요? 더럽게스리.”

여자는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나를 훈계했다.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어? 아저씨 웃어요?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요? 물에 빠진 사람, 어, 구해 줬더니 말이야. 보따리도 뺏고……. 내가 우습게 보여요?”

“아니요.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이죠?”

“예.”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그녀가 내 양손을 부여잡는다.

“아저씨, 우리 그런 의미에서 파이팅 한번 해요. 열심히 살자는 약속. 알았죠?”

그녀는 내 동의도 없이 내 팔을 하늘로 힘껏 올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래 놓고 성에 차지 않는지 한 번 더 크게 파이팅을 외쳤다.

“아저씨! 왜 안 따라 해요?”

그녀는 기분이 상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쳤다.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는지 여자가 깔깔 웃었다. 그러고는 미친 년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양팔을 벌리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시원하다.”

그녀는 세상을 음미하고 있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미친 것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귀여워 보였다. 보면 볼수록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양팔을 벌리고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그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오히려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그녀가 보는 하늘에 뭔가 있나 싶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경치만으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산들바람이 눈앞에서 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처럼 나도 눈이 감겼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편안함이었다. 남한에 와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얼마만인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눌러 왔던 분노와 살의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이 정도만 해도 참고 살 만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여자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을 자야 일을 하고, 일을 해야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이런 생각으로 그녀에 대한 생각을 잠재울 순 없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추억은 강렬했다. 나는 답답함에 거실로 나와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내장까지 시원함이 퍼져 갔다. 나는 안방을 살짝 열어 보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편안하게 잘 자고 있었다. 약봉지를 살펴보니 약도 꾸준히 잘 복용하고 있었다. 요즘 아버지 상태는 무척 좋았다. 귀신 이야기도 덜하고 밤중에 집을 나가는 일도 줄었다. 나는 아버지의 이불을 정리하고 방을 빠져 나왔다.

 

오늘도 나는 여자와 만났던 정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집이 이곳인지 직장이 이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이라도 마주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매일 저녁시간 내내 그녀를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이 다 되도록 그녀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오늘 새벽까지 기다려 볼 심산이었다. 만약 오늘까지 못 만난다면 인연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다.

다행히 인연이 있었는지 자정이 막 지난 시간쯤 그녀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동안 상상만으로 만나던 그녀를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당장 달려가 알은척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놀랄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단 천천히 여자의 뒤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운이 좋다면 그녀의 집도 알아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만취한 듯 얼굴이 불콰해 보였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넘어질까 걱정이 됐지만 그녀는 줄타기 명인처럼 용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갔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잔뜩 기울어진 걸음걸이로 전봇대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혹시나 넘어질까 싶어 빠르게 그녀에게 달려갔다.

순간, 돼지 멱을 잡는 듯한 소리를 내며 그녀가 바닥에 토를 하기 시작했다. 토사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토사물 근처로 허연 연기까지 보였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두 눈을 찌푸리고 얼굴을 돌려야 정상일 테지만 희한하게 더럽다는 생각보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는 괴로운 듯 연신 기침을 해 댔다.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결국 그녀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여자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많이 드셨나 봐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입가에 떠오른 엷은 미소가 그 증거였다. 나는 여자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고마워요. 많이 좋아졌어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인사를 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와 같이 있고 싶어 핑계를 대려 했지만 적당한 핑계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늘은 파이팅 안 해요?”

엉겁결에 생각나는 대로 나는 물었다.

“왜요? 하고 싶으세요?”

그녀가 상황이 우스운지 키득거린다. 아무래도 원래 웃음이 많은 여자인 것 같았다.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파이팅하고 하늘 쳐다보시는 게 신기해서요.”

“아, 그거요.”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하늘을 쳐다보는 건 죽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보통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지만 술만 마시면 이상하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중동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하늘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마도 그때 아버지를 보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던 버릇이 술을 마시면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녀는 또다시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경건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원함과 함께 그녀를 알아간다는 설렘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또다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는 얼른 옆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서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뒤로 주춤하며 물러났다. 그녀가 재미있다는 양 나를 바라본다.

“아저씨, 그동안 계속 저 기다린 거 맞죠?”

그녀는 다 안다는 듯 물었다.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증거를 잡은 형사처럼 “맞죠?” 하며 재차 확인했다. 할 수 없이 범행을 자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요?”

“네. 이름을 알아야 친해지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저는 최승희예요.”

승희가 내 앞으로 불쑥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바로 잡지 못하고 입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매일 밤마다 연상하고 꿈꾸던 그녀의 모습에 이름이 덧붙었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기뻤다.

“저는 박인호예요.”

떨리는 손으로 승희와 악수를 했다. 승희가 씩 웃으며 내 손을 잡고 하늘로 내뻗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왜 안 따라 해요?”

“예?”

“통성명한 기념이잖아요. 안 기뻐요?”

승희는 다시 내 손을 잡고 힘껏 올리며 파이팅을 외친다. 나는 승희가 보란 듯 있는 힘껏 파이팅을 외친다. 승희보다 더 크게, 승희보다 더 길게…….

승희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는다. 나는 덩달아 신이 나 더 크게 파이팅을 외친다.

이날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사귀자는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우리는 연인 사이가 돼 있었다. 매일 저녁을 같이 먹고 매일 키스를 했다. 매일 승희의 집까지 바래다주었고 매일 헤어지기 싫어했다. 그러길 반복하자 점점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승희가 누구 집 딸이고 어떤 대학을 나왔고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머리를 1주일에 몇 번 감으며 생리를 언제 하는지까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승희는 달랐다.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누구의 아들이며 무슨 대학을 나왔고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머리를 1주일에 몇 번 감으며 자위를 몇 번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안 다 해도 모두 내가 연기한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내가 탈북했다는 것을 숨기는 데부터 기인했다. 하나의 거짓말이 점차 커져 더 이상 어떤 진실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장애를 숨기듯 그녀에게 밝히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빠 집에 한번 가면 안 돼?”

비가 오는 날, 난데없이 승희가 물었다. 나는 물끄러미 승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지 선정적인 의미의 물음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수준을 알아보기 위함도 아닌 듯했다. 내가 누구며, 누구의 아들이며, 어디서 살고 있는지가 궁금한 얼굴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집에는 숨기고 싶은 두 가지가 있었다. 탈북한 과거와 병든 아버지였다. 다행히 아버지의 병세는 많이 좋아졌다. 혼자 동네 산책을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선뜻 승희에게 아버지를 소개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까지 아버지는 정신병자였으니까.

나는 다음에 가자며 대충 얼버무렸다. 승희는 실망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

 

집 안은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아파트 복도를 거닐 때만 해도 설마 냄새의 진원지가 우리 집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욕탕을 다녀왔는지 말끔한 차림으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병색이 완연한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어 식탁으로 가서 약봉지를 확인해 보았다.

“안 먹으니까 살 것 같다. 먹으면 더 머리만 어지러워.”

아버지는 그동안 약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약을 안 먹으면 안 먹을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좋아져 두 달 전부터는 아예 약을 끊었다고 했다. 다만 내가 걱정할 것 같아 일부러 약을 먹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갑자기 죄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회사와 승희 일로 아버지를 신경 못 쓴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정말 좋아 보였다. 콧노래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 보였다. 경과가 이렇게 좋아졌는데 차마 다시 약을 먹으라고 권유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남한의 약이 안 맞아 아버지가 고생을 한 것 같았다.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아버지가 해 준 밥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연신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아버지도 웃었다. 아버지의 웃는 모습은 평양에 살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분위기가 좋아지자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회사와 승희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만담꾼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아버지는 재미있어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가 푸념조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신세 한탄이 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앞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동안 승희를 속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는 듯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의지하고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예전 건강한 아버지를 보자 나도 모르게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 손을 잡아 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다음날 한잠도 자지 못한 채 새벽부터 승희의 집을 찾았다. 승희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싶어서였다. 물론 주된 이야기는 내가 탈북자라는 사실이었다. 승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지만 일단 내 본능에 충실하기로 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승희 앞에서 거짓말쟁이로 살게 될지도 몰랐다. 거짓말쟁이보단 차라리 탈북자가 나았다.

다행히 승희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집 앞으로 나왔다. 자다 나왔는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왔다.

“뭐야? 새벽부터. 프러포즈라도 하려고?”

여자의 육감이 발동했는지 승희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승희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걸었다. 입이 바로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승희는 계속 “뭔데? 말할 게 뭔데?” 하며 나를 재촉했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탈북 사실을 승희에게 고백했다. 승희가 말이 없다. 괜찮으냐는 물음에도 승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어색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승희의 눈을 보고 싶었지만 푹 눌러쓴 모자 때문에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승희는 집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전화라도 올 줄 알았지만 승희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참지 못하고 먼저 전화를 했다. 승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업무 시간이 끝나자마자 승희가 일하고 있는 학교로 달려갔다. 다행히 승희는 학교에서 잔업을 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는 평화로워 보였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하던 나의 모습과 사뭇 대조가 되었다.

나를 발견하자 승희는 난처한 듯 나를 데리고 학교 밖으로 갔다.

“자꾸 왜 이래? 그 정도 했으면 내 마음 알잖아?”

이미 의사 표현을 했다는 듯 승희는 짜증이 나 있었다. 나는 걱정했다며 승희에게 안부를 물었다. 하지만 승희는 이미 마음이 돌아선 듯 그녀의 대답은 매정하고 사무적이었다. 아무리 빌고 달래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에게 탈북자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다. 승희는 통일도 싫고 북한도 싫고 탈북자도 싫다고 했다. 탈북자가 같은 동포라는 것은 알지만 아직까지 자기에겐 동남아나 중국 노동자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했다. 그녀의 말은 나에게 욕보다 더한 상처를 줬다. 칼로 인한 자상보다 더욱더 심한 마음의 상처가 가슴을 후벼 팠다. 수치심과 자괴감에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학교를 빠져나왔다. 걸으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렸다. 마치 승희가 내 얼굴에 침을 뱉은 듯한 착각이 들어서였다.

첫 번째로 눈에 띄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를 샀다. 계산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소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도저히 속이 답답해서 살 수가 없어서였다. 그제야 현실이 인정됐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별의 아픔보다 수치심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나는 편의점 한구석에서 소주를 먹고 울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나는 회사 내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집에 가고 어떻게 회사에 출근했는지조차 모르게 출근한 상태였다. 시간을 보니 10시가 넘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승희와의 이별이 나를 폐인으로 만든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에게 자초지정을 묻고 싶어 집에 전화를 해 보았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역시 불통이었다. 산책을 나갔나 싶어 기다려 보았지만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아버지의 상태가 다시 나빠진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염려가 내 마음을 정복해 갔다. 회사에다 연체자를 만난다는 핑계를 대고 집에 돌아갔다. 집에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가 써 놓은 편지가 있었다. 귀신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덕희형네 집에 가 있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편지를 구겨 버리고 벽에 던졌다. 그래도 화가 안 풀려 발로 벽을 미친 듯이 차 댔다. 또다시 아버지의 병세가 나빠진 듯했다. 나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파트 주변에 아버지가 갈 만한 장소를 찾아보았다. 노인정도 가 보고 놀이터도 가 보았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쉬는 날 아버지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누구를 만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죄책감과 함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아버지의 수첩을 뒤져 아버지를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혹시 내가 모를 덕희라는 사람이 더 있을지 몰라서였다. 동명이인도 있을 수 있고, 성이 다른 이름만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하지만 모두 몰랐다. 안다 해도 내가 아는, 이미 정치수용소에서 피 떡이 되어 죽은 덕희 얘기만 나왔다.

날이 어두워져 갔다. 나의 조바심은 이미 최고조에 달았다. 나는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의아한 듯 아버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물었다. 나는 정확한 아버지의 주민등록번호를 몰라 내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알려 주었다. 등본상의 기록된 주소를 보면 그들은 전산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비웃기 시작했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비웃었다. 하지만 경찰의 소리가 아니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집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입이 귀까지 찢긴 여자 귀신이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그 옆에도 있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온 집 안이 귀신 천지였다. 아버지가 말한 대로 우리 집은 귀신 천지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귀신을 향해 전화기를 던졌다. 귀신은 전화기를 피하고는 나를 덮쳤다. 살기 위해 나는 안방으로 도망쳤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침에 눈을 떴다. 집 안이 엉망이었다. 밤새 귀신에게 쫒긴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안방을 나와 귀신을 보았던 거실을 살펴보았다. 집 안만 엉망일 뿐 귀신들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꿈이었다. 꿈과 현실의 선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승희와 헤어졌고,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이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는 현실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자 또다시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조바심에 몸이 타들어 갔다. 아무래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서라도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녀야 할 듯싶었다. 나는 조장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출근을 하자 사람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른 채 내 자리로 가 앉았다. 그런데 자리가 이상했다. 책상에 올려놓은 아버지와 함께 찍은 나의 사진은 사라져 있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와 아이 사진이 찍힌 액자가 책상에 놓여 있었다. 나는 액자를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누구지? 내 건 아닌 것 같은데.

순간 “누구세요?” 하며 낯선 남자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여기 제자리인데, 누구시냐구요?”

황당하다는 듯 남자가 나에게서 거칠게 액자를 빼앗아 갔다.

“여기 직원인데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예의 없는 남자의 행동에 기분이 상한 나도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때 조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조장은 나를 보자마자 헐레벌떡 나에게 달려왔다.

“인호 씨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남자와 내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조장은 나와 남자를 번갈아 보며 묻는다.

“이 사람이 제 자리에 있어서요.”

나는 괜한 오해로 아침부터 회사를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말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인호 씨 1주일 전에 사표 썼잖아. 기억 안 나?”

조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제가요?”

조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의 생사가 달린 일자리를 내가, 그것도 스스로 그만둘 리가 없었다. 분명 알 수 없는 오해가 있을 것이다.

내가 믿지 못하는 눈치를 보이자 조장은 자신의 자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책상 맨 밑 서랍에서 하얀 종이봉투를 꺼내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가 쓴 사표라고 했다.

나는 마약 중독자처럼 손을 떨며 봉투를 열어 보았다. 안에는 정말 내 이름으로 된 사직서가 있었다. 필적도 주민번호도 모두 내 것이 맞았다. 그런데 날짜가 이상했다. 어제가 분명 4월 9일이었는데 사직서의 날짜는 4월 11일이었다. 사직서를 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날짜는 더 이상해 보였다. 잘못 썼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왠지 조장과 직원들이 탈북자인 나를 골려먹으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장이 보여 준 신문의 날짜는 나를 더더욱 큰 충격에 빠트렸다. 신문 우측 맨 위에 적힌 날짜에는 오늘을 4월 17일로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믿지 못하고 휴대전화와 인터넷들의 날짜를 찾아보았다. 신기하게도 오늘은 4월 17일이었다. 내가 하루라고 느낀 사이, 세상은 1주일이 지나 있었다. 일곱 번의 낮과 일곱 번의 밤이 내 기억 속에서 모두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알아내고 뒤처리를 해야 했다. 나는 필름이 끊긴 다음날처럼 힘겹게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너무 아파 계단 난간을 잡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 보려 했다. 그러나 지난 1주일간의 기억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대신 승희 생각만 간절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승희인 것 같았다. 승희와 헤어진 후 모든 증상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승희를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와 헤어진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를 만나야 모든 의문의 기억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잊힌 1주일 동안의 기억을 찾는다면 사라진 아버지도 찾고 삐뚤어진 내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핑계일 수도 있었다. 단지 승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모든 핑계와 이유를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 정도로 나는 승희가 보고 싶었다.

승희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수차례 전화를 해 보았지만 승희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였다. 이미 두 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치거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승희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를 버티게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골목 앞쪽에서 승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천 리 뒤에 있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녀의 웃음소리였다. 승희의 그림자가 보이고 점점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큰 남자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샘이 날 정도로 다정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골목 뒤로 숨어 버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이상하게 승희와 남자 앞에 서는 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승희가 남자의 가슴에 안기고 있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승희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자극적인 소리가 들렸다. 나의 승희가 누군가의 입술과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과 배신감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

 

술기운이 온몸에 퍼졌다. 얼마를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 몸이 자꾸 비틀거렸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나는 웃지 말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이 나를 죽일 듯 다가왔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점점 귀신처럼 변해 갔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그들과 싸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많은 귀신이 나를 향해 덮쳐 왔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꿈이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날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날짜는 정상이었다. 살펴보니 집 안은 폭격을 맞은 듯 엉망이 돼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려다 그만두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승희 생각이 났다. 승희 생각은 나를 힘들게 했다. 절망감과 배신감에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한번 불러 보았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리가 심하게 부어 있었다. 나는 기다시피하며 겨우 안방 문을 열 수 있었다. 역시나 아버지는 없었다. 이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전화를 받아 보았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 그동안의 걱정과 슬픔들이 한꺼번에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아버지는 남자 자식이 왜 우느냐며 다그쳤다. 나는 아버지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빨리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아버지라도 있어야 내가 살 것 같아서였다. 정말이지 혼자서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알았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자신은 덕희네 집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고.

그새 병세가 악화된 듯싶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아무 일 없이 안전한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들었다. 나는 죽은 듯이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렇게 자고 깨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돌아온 것 같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다행히 다리는 그새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문 앞에 비를 맞은 승희가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계속 이렇게 둘 거야?”

승희가 물었다.

“계속 이렇게 가만둘 거냐고?”

승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승희는 울고 있었다. 눈에서 빗방울 떨어지듯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와락 품에 안았다. 비를 맞아서인지 그녀의 몸은 냉동육보다 더 차가웠다. 나는 그녀를 더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승희가 미안하다며 내 가슴에서 속삭였다. 승희의 미안하다는 말이 내 가슴속의 상처를 치료하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승희는 나를 더욱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모르핀을 맞은 듯 황홀했다. 배신한 여자를 매몰차게 몰아내야 했지만 나는 이미 승희에게 중독된 듯 그녀를 밀쳐 낼 수 없었다. 승희의 외도를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승희의 입에 키스를 했다. 낯선 남자의 체취를 지우고 싶어서였다. 소독이라도 하듯 정성을 들여 승희의 입술을 훔쳤다.

승희가 나를 방으로 밀고 들어가 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부하려 했지만 승희는 나에게 확신을 주고 싶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첫 경험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내 방에서 승희와 난생처음으로 섹스를 하게 됐다. 그렇다고 승희에게 처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믿지도 않겠지만 자랑도 아니었으니까.

“나 집 나왔어. 오늘부터 여기서 살면 안 돼?”

승희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깜짝 놀라 승희를 바라보았다. 승희는 더욱더 내 가슴에 안겨 오며 말했다. 부모님이 반대가 너무 심하셔.

이해는 갔다. 어떤 상황인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승희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았는지 승희는 내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며칠 뒤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 걱정과는 달리 그 전보다 더 건강해져 있었다. 아버지에게 승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지만 아버지는 승희의 얼굴만 보고도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승희와 내 상황을 대충 아버지에게 전했다. 어찌 보면 통보일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우리 둘의 사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한 술 더 떠서 아버지는 내 방이 둘이 살기에는 좁을 거라며 안방을 우리에게 내주었다. 미안했지만 아버지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승희에게 미안해서였다. 집까지 나온 승희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다. 승희도 안방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점차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승희도 돌아오고 아버지도 돌아왔다. 나만 열심히 살면 우리는 행복해질 것 같았다. 나는 승희의 손을 잡고 파이팅을 외쳤다. 승희가 하듯 열심히 살자는 의미에서였다. 승희도 나를 따라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는 오랜만에 서로를 보고 웃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일자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창졸지간에 가장이 된지라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탈북자인 나를 바로 채용하는 곳은 없었다. 승희에게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막노동을 하며 삶을 꾸려 나가야 했다. 다행히 승희는 내가 하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하던 일이 아니라 일은 힘들었지만 내 옆에 승희가 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나를 몰래 밖으로 불렀다. 아마도 승희 몰래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싶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할 말을 많이 참고 있었는지 말문을 트자마자 승희의 흉이 줄줄 새어 나왔다. 다른 이가 승희의 흉을 본다면야 당연히 따지고 들겠지만 아버지의 말이라 흘려보내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승희에게 갖는 불만은 청소였다. 승희의 모든 것이 다 마음에 들지만 청소를 너무 안 한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집 안이 엉망이긴 했다. 방구석마다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했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 당당하게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였다.

승희가 있는 안방 문을 열어 보았다. 그녀는 내가 온지도 모르는지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승희를 깨울까도 고민했지만 얼마나 힘들면 잠을 잘까 싶어 그녀를 깨우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직접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진공청소기로 깔끔하게 하고 싶었지만 청소기 소리에 승희가 깰까 걱정돼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내가 승희를 깨우지 않고 직접 청소를 하는 것이 못마땅한지 혀를 차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승희가 어떤 사정을 갖고 이 집에 왔는지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듣기 싫다며 작은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승희는 밤이 돼서야 깨어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승희는 괜찮다며 텔레비전을 켰다.

“낮에 있을 때 집 청소 좀 해 줄 수 있지?”

승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버님이 뭐라 그러셔?”

승희는 하품을 하며 말을 잇는다. 몸이 피곤해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 줘.

정말 피곤한 듯 승희는 다시 자리에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말해 봐야 싸움만 날 것 같았다. 힘들더라도 차라리 내가 와서 청소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승희 옆에 몸을 누이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몸이 피곤해서인지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기를 몇 번 반복할 즈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났다. 시간을 보니 밤 10시가 넘은 상태였다.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나는 혼잣말을 하며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문 앞에는 남자 경찰 두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경찰은 승희의 실종 신고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을 했다. 아무래도 승희가 말없이 집을 나가 어머님이 경찰서에 신고한 것 같았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뒤를 돌아보았다. 승희가 문틈에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강한 거부였다. 나는 할 수 없이 경찰에게 승희를 본 적이 없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전화드려. 어머님 걱정하시겠어.”

내 말에도 승희는 들은 척도 안 하고 텔레비전만 보았다.

“정말 전화 안 할 거야? 어머님이 걱정하시잖아.”

“어차피 버린 자식 취급했어. 당분간 연락할 생각 없어.”

승희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텔레비전도 보지 않은 채 돌아누워 버렸다. 아무래도 나올 때 어머니와 크게 싸운 모양이었다. 뒤로 가서 승희를 안아 주었다. 모든 걸 버리고 나를 선택해 준 그녀가 너무 고마워서였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알지?”

승희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왜 대답이 없어?”

“…….”

“내가 이 상황에서 청소 안 한다고 당신한테 구박까지 당해야겠어?”

“…….”

대답을 하지 않자 승희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승희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키스는 점점 진해지고 나는 안방 문을 잠갔다.

 

*****

 

승희가 한 달이 다 되도록 먹는 게 시원치 않았다. 음식이 맞지 않아 그런 것 같아 나는 그동안 번 돈으로 승희와 함께 외식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한사코 됐다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먹고 싶은 거 정말 없어? 나 돈 많아.”

“먹고 싶은 거 없다니까.”

“말해. 다 사 줄게. 걱정돼서 그래.”

내 걱정에도 승희는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나는 승희의 행동이 수상스러워 그녀를 간지럼 태웠다. 말해. 뭐 숨기는 거 있지?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웃어 댔다. 그러나 뭐가 그리 좋은지 승희는 웃기만 할 뿐이다. 그녀의 자백을 기다리며 계속 간지럼을 태웠다. 결국 승희는 더 버티지 못하고 내 귀에 귓속말로 자백을 하기 시작했다.

“나 임신했어.”

정말? 나는 믿기지 않아 소리쳤다. 승희가 부끄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로 환호성이 터졌다. 나의 소리에 놀란 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아버지에게 승희의 임신 소식을 알렸다.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기뻐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당장 밖으로 달려가 소고기 한 근을 사 왔다. 승희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였다. 승희는 먹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나와 아버지는 아이를 생각하라며 억지로 고기를 상추에 싸서 먹였다. 승희의 볼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계속 그녀의 입에 고기를 넣어 주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고기를 대신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녹을 듯한 육즙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맛있다고 말해 주었다. 승희가 행복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지 몰래 승희의 손을 잡았다.

 

승희의 배가 점점 불러 갔다. 쌍둥이를 임신한 듯 그녀의 배는 달수보다 빨리 불러 오고 있었다. 나는 매일 승희의 배를 만지며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승희는 태교에 좋다며 30분씩 부르게 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승희가 좋아하고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아 군소리 않고 열심히 불렀다. 그런데 오늘따라 집 안에 냄새가 진동했다. 집은 매일 내가 청소를 하고 있어 깨끗했는데도 이상하게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집 안을 살펴보았다. 집 안 곳곳에 파리와 구더기들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가득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승희도 몰랐는지 파리 떼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나와 승희는 파리와 구더기를 피해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냄새는 점점 심해졌다. 마치 집 자체가 썩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발코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혹시 1층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향기로워 보이는 화단만이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나는 열심히 생각했지만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승희가 비명을 질렀다. 파리 떼가 발코니까지 날아 들어온 것이었다. 승희는 손사래를 치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른 거실에 있는 살충제를 가지고 와 사방에 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리와 구더기는 죽지 않고 계속 불어났다. 죽여도 죽여도 인수분해되며 살아나듯 엄청나게 불어났다.

살충제는 5분도 안돼서 다 떨어졌다. 나는 살충제를 사기 위해 집 앞 마트로 달려갔다. 다행히 마트에는 살충제가 넘쳐났다. 나는 양팔 가득 살충제를 사 들고 계산대로 와 카드로 계산을 하였다. 그런데 주인이 카드 결제가 안 된다며 은행에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내 계좌에는 지금까지 번 돈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였다. 현금으로라도 계산을 하고 싶었지만 지갑에는 십 원 한 장 없었다. 나는 살충제를 주인에게 맡기고 근처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인출하려 했다. 그런데 현금 인출기에는 잔고가 없다는 안내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다시 확인하고 다시 확인해 보았지만 잔고는 0원이었다. 그동안 피땀 흘려 모은 돈과 정착금 모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은행 창구로 달려가 따졌다. 직원은 황망한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모니터를 돌려 나에게 보여 주었다.

“고객님, 이 화면 보이시죠? 이 계좌가 고객님 계좌인데, 고객님이 그동안 인출하신 내용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화면에는 내 이름과 계좌가 보였고, 날짜와 함께 내가 돈을 인출하고 쓴 내용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자료였다. 한 번도 쓰지 않은 돈을 내가 썼다니. 이건 사기고 모함이었다. 사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한 번도 쓰지 않은 돈이 쓴 돈으로 둔갑할 수 있겠는가?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에 보였던 귀신들, 흐릿한 기억들, 사라진 시간들. 모든 것이 의문이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이 남한 놈들이 정부와 짜고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았다. 평화와 자유를 준다는 달콤한 사탕으로 지금껏 나를 속여 온 게 분명했다.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확신은 분노로, 분노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은행을 빠져나왔다. 당장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구더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도시. 이 서울. 이 남한 전부가 위험했다. 나는 최대한 사람들을 피해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날 감시하고 있었다. 전화를 하는 척하며 나를 감시하는 놈도 있었고, 운전을 하며 감시하는 놈도 있었다. 옥상에서, 창문에서, 비행기에서 사람들이 망원경으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오라, 이제 알았다. 그러고 보니 팀장이란 놈도 한통속이었다. 김일성을 욕하게 하며 나의 사상을 감시하려는 놈이 분명했다. 온몸이 바짝 긴장됐다. 어떻게든 이 감시 속에서 빨리 빠져나가야 했다.

집 앞 현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 집 앞에 사람이 모여 있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염탐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아저씨, 1108호 맞아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자가 수상해 보여서다.

“이 아저씨 1108호 맞아. 내가 봤어.”

수상한 남자의 옆에 있던 아줌마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 말했다. 나는 더 얼굴을 숙이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사람들이 갑자기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내가 피할 사이도 없이 사람들이 떠들었다. 우리 집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살 수가 없다며 나보고 청소 좀 하라는 이야기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또다시 남한 놈들의 음모가 시작된 듯했다. 나는 그제야 냄새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밤마다 우리 집 쪽으로 정체모를 가스를 살포하고 파리와 구더기를 보낸 놈들이었다. 내가 탈북자라는 이유로 그들은 나를 암살하려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들을 쫓아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승희와 아버지는 밖의 소란에 무서워 나가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사실을 아버지와 승희에게 알렸다. 모두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경찰에 신고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승희와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모두 한통속일 거라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남한 놈들이 한통속이라면 경찰이라고 다를 건 없을 터였다. 두려움에 몸이 떨려 왔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곳에서 승희와 살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

승희가 나를 안아 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승희의 배는 며칠 전보다 더 부른 듯했다. 승희의 배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나는 매일 얼굴에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낀 채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남한 놈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섰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감시하고 음해하고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미행하는 자가 있었다. 예전처럼 넋을 놓고 다녔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할 일이었다. 남자는 내가 일이 끝나자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북에서 왔다는 말을 했다. 간첩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한 놈이 아니어서.

남자는 남한에서 사니까 행복하느냐며 시비조로 물었다. 대꾸하고 싶지 않아 남자를 피했다. 그러나 남자는 계속 접근했다.

나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 남자는 실실 웃으며 멱살을 풀었다. 남자는 흥분하지 말라며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나에게 재 입북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내가 재 입북만 한다면 수용소에 있는 아버지도 석방되고 모든 가족이 평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당에서도 탈북을 막기 위해 재 입북자를 받아 홍보하는 추세라며, 남한에서 정착 못할 바에야 차라리 재 입북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 남자를 보며 비웃어 줬다. 남한 놈들이 위장하여 나의 사상을 검증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잘못짚었다. 아버지는 남한에서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런 거짓 음모로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남자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품에서 휴대전화 속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동영상 속 남자는 정말 아버지였다. 얼굴은 이미 반쪽이 되고 만신창이가 돼 있지만 아버지가 분명했다.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분명히 서울에 있는 아버지가 어떻게 북한 수용소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남자는 잘 선택하라며 내 어깨를 두들기고 사라졌다.

당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목소리를 듣고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다 전화를 해 보았다. 승희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승희에게 아버지가 집에 있는지를 물었다. 승희는 처음 들어 본다는 듯 나에게 아버지가 누구냐며 되레 물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제까지 함께 있던 아버지를 승희가 모른다니 말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승희의 태도는 진지했다.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다. 머리가 아파 왔다. 머리를 잡고 바닥에 뒹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제는 내가 미친 것인지, 모든 것이 남한 놈의 수작인지조차도 판단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는 하나원에 전화를 해 보았다. 혹시나 아버지의 자료가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흔적은 그곳에도 없었다. 탈북한 건 나 혼자뿐이었다. 모든 관공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곳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아버지와 내가 같이 있는 것을 본 목격자가 어딘가는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버지와 함께 가던 동네 마트와 약국 등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그곳에서 cctv 영상을 찾을 수 있었지만, 영상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두 나 혼자만이 덩그러니 나와 쌀을 사고 약을 사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치료하던 정신과를 찾았다. 다행히 정신과 의사는 한눈에 나를 알아보았다.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나를 알아본다면 분명 아버지도 알 확률이 높았다. 의사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했다. 의사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기록하며 들었다. 이야기가 다 끝나자 의사는 나를 편안한 소파에 앉게 했다. 그는 직접 컵에 물을 따라 와서는 물을 마시게 했다. 내가 물을 다 마시자

“인호 씨, 이거 한번 보실래요? 도움이 되실 텐데.”

하며, 차트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차트를 받자 의사는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차트를 살펴보았다. 아버지 이름 대신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왜 보호자의 이름을 적었나 싶어 나는 의사를 바라보았다.

“본인 차트예요. 인호 씨 거. 맞아요.”

의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다중인격 환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나라고 했다. 현실에 없는 아버지를 이인화시켜 내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탈북 당시의 극한의 스트레스와 남한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병의 원인 같다고 했다. 몇 달 전부터 치료도 제대로 받지 않고 약도 먹지 않아 상태가 더 심해진 것 같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다중인격 환자라니. 내가 미쳤다니. 아버지가 없었다니. 말도 안 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모든 게 다 개수작이다! 순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미친 놈 취급하며 바라보는 의사 놈이 역겨워졌다. 차트를 의사 놈의 얼굴에 집어던져 버렸다. 내가 다중인격의 미친 놈일 리 없었다. 미친 건 이 의사 놈과 남한 놈들이다.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어 정신병원에 처넣으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의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런 놈들에겐 처벌이 필요했다. 의사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나는 의사의 입을 막고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이제 더 이상 남한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한은 음모와 거짓이 판치는 사회였다. 승희와 아버지를 데리고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을 피해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승희가 방에서 누워 자고 있었다. 배는 이미 남산만 하게 불러 있었다. 나는 떠나야 한다며 승희에게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했다. 승희는 피곤한 듯 계속 누워 있었다. 짐을 싸며 다급하게 승희를 불렀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승희는 대답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나는 계속 승희의 이름을 부르며 짐을 쌌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는 소리도 들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여럿이 몰려 온 모양새였다. 나는 다급함에 칼을 들고 문 뒤로 숨었다. 여차하면 그들을 죽이고 승희를 데리고 나갈 심산이었다. 얼마 안 있어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경찰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눈처럼 하얀 빛이 집 안으로 퍼져 들어왔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경찰들이 냄새에 못 이겨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는 소리도 들렸다.

승희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신 눈을 억지로 떴다. 내가 눈을 다시 떴을 때 집 안의 모습은 기존과 달라져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았다고 생각한 집 안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고 있었고, 파리와 구더기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승희의 시체가 보였다. 이미 썩을 대로 썩어 배에 복수가 찬 승희의 배는 곧 터질 듯 남산처럼 부풀어 있었다. 입가에는 내가 먹인 소고기와 상추들이 얼굴에 피딱지처럼 엉겨붙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채로 나와 사랑을 나누었는지 윗옷은 풀어헤쳐져 있었고, 팬티는 반쯤 내려가 있었다.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승희에 대한 예의가 아님에도 나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다. 승희를 처음 만난 그때처럼 나는 바닥에 토를 했다. 하지만 내 등을 두들겨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경찰들이 다가와 내 손에 수갑을 채웠다.

 

경찰들에게 양팔을 끼인 채 아파트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는 아직도 내가 보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잠깐 자고 일어나면 깨어나는 꿈인 것 같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살던 아파트가 보였다. 창가에서 승희와 아버지가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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