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오늘:
16
어제:
33
전체:
305,959

접속자현황

  • 1위. 후리지어
    65722점
  • 2위. 뻘건눈의토끼
    23333점
  • 3위. 靑雲
    18945점
  • 4위. 백암현상엽
    17074점
  • 5위. 농촌시인
    12042점
  • 6위. 결바람78
    11485점
  • 7위. 마사루
    11385점
  • 8위. 엑셀
    10614점
  • 9위. 키다리
    9494점
  • 10위. 오드리
    8414점
  • 11위. 송옥
    7661점
  • 12위. 은유시인
    7601점
  • 13위. 산들
    7490점
  • 14위. 예각
    3459점
  • 15위. 김류하
    3149점
  • 16위. 돌고래
    2741점
  • 17위. 이쁜이
    2237점
  • 18위. 풋사과
    1908점
  • 19위. 유성
    1740점
  • 20위. 상록수
    1289점
2015.04.08 21:25

부재중인 비너스

조회 수 3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부재중인 비너스

 

 

이승수

 

 

전에 샀던 향수를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힘껏 비볐다. 남자향수답지 않게 상큼한 것이 화사하고 가벼운 느낌이다. 향기 하나 바꿨을 뿐인데 기분이 이렇게 산뜻할 수가 있을까. 아주 약하게 뿌렸으니, 안겨야만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많이 뿌리는 것은 좋지 않다. 코가 짜릿할 정도의 독한 향기를 풀풀 흘리면서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들, 여자를 만나면 술부터 먹이려는 남자들과 다르다. 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줄 알기에 향수를 한번만 뿌린다.

후드티에 청바지. 첫 만남에 무거운 느낌의 옷을 입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른스러운 척 와이셔츠나 칙칙한 색깔의 옷을 입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최대한 가볍고 편하게. 그녀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간편하게 입어야한다. 무대 위에 선 배우의 화장이 너무 짙어, 연극에 집중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깐 조심해야한다. 물론 형체가 없는 향수는 예외다.

집은 조용했다. 휴일이라 모두 나가버린 걸까. 식탁엔 반찬들이 있고 안방을 제외하고 모든 문이 닫혀있었다. 문이 한 뼘 정도 열려있는 안방에 들어갔다. 침대 이불은 잘 정돈되어있었다.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내가 보려고 하는 건, 방의 청결이 아니다. 핸드폰을 집어서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아버지와 등산하러 가는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 혼자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처음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너무 일찍 준비했나. 약속한 시간까지 세 시간 정도 남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여자 후배의 사진을 봤다. 카페에서 찍었는지 주위는 온통 연갈색 나무판자로 되어있고, 그 중심엔 그녀가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있다.

손등이 아름답다. 하지만 시선이 가게 하는 것은 그녀의 새끼손가락이다. 다른 손가락은 멀쩡하지만 새끼손가락만 짧다. 초등학생의 손가락과 얼추 비슷할 것이다. 혹여나 실례가 될 수 있으니 바로 물어보진 않고, 친해진 뒤에 조심스레 새끼손가락에 대해 말했다. 숨길 줄 알았는데 그녀는 시원하게 콤플렉스라고 대답했다. 유전자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올해 수술할 예정이라고 했다.

통화하면서 나는 극구 말렸다. 사실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말해줬다. 그녀가 내 말에 의심하는건지 다시 말했다. 괜찮아? 난 예쁘다고 했다. 정말 그래, 하면서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사실 진짜 이유는 그녀의 새끼손가락은 흠이기 때문이다. 짧기에 팔 다리가 없는 비너스상처럼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할 요소가 없다는 것은 새로운 자극이다. 문제가 있는 그녀가 특별해 보인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금 보고 있는 사진 속, 그녀의 손가락 중에 유독 새끼손가락만이 다른 방향으로 서있었다. 특별하니깐. 봐도 또 봐도 익숙해질 수없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코에 손목을 댔다. 오늘 향수를 맡게 할 수 있을까, 방금 뿌렸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이 향기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드라이박스에 넣어 보존하듯이 팔소매에 안전하게 넣어야한다.

나는 그녀가 보내준 사진들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다른 사진에서도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내 시선은 손가락을 찾고 있다. 남들과 다른 새끼손가락이라 그런지 쉽게 보인다.

 

아는 여자 후배에게 여자를 소개받으려고 억지를 부렸다. 이름이나 나이를 물어보지 않은 채 장난감 사달라는 어린애마냥 친구들 사진 좀 보여 달라고 했다. 후배는 혹시 그냥 재미로 만나려고 하는거야, 라고 하면서 날 의심했다. 얼굴만 보고 사귀려고 하는 줄 알았나보다. 나도 이렇게까지 후배를 귀찮게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그 이유는 여자친구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나쁜 놈이 삿대질을 했겠지만, 나에겐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 잘 수 있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처럼 필요한 것이다. 실만 있다고 해서 꿰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바늘도 있어야 한다. 같이 있어야만 나는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나에게 자꾸 여자 소개해주겠다는 후배였기에 몇 번 의심하다가 친구의 사진들을 내게 보여줬다. 여자들 모두 손으로 입을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예뻤다. 연예인들이 하는 헤어스타일. 요즘 유행하는 옷들. 모두 잘 어울렸다. 사진 속에 튀어나와 패션쇼를 열 것만 같았다. 요즘 여자들은 왜 이렇게 세련되어 보일까. 완벽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후배는 계속 다른 사진들을 보여줬다.

시간이 지나 나도 지치고 후배도 친구들의 성격이나 취미를 말하느라 지쳤을 때, 카페에 찍힌 그녀의 사진이 나왔다. 탁자 위에 커피와 케이크가 있고, 후배를 포함해서 여자 네 명이 한곳을 보고 있다. 모두 입을 가렸는데 딱 한 명이 달랐다. 단발머리에 비웃는 듯이 올라간 아이라인.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혼자만 쏙 들어간 새끼손가락이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향수가게에 들렀다. 전에 쓰던 향수가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향수를 자주 쓴다. 어느 때서나 쉽게 쓸 수 있고 첫인상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을 잡는다. 하얀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손을 감싸다가 엄지로 손등을 천천히 비빈다. 솔직히 무슨 느낌으로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손은 뭔가를 알고 있나보다. 손을 만질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친밀해서가 아니란 걸.

내 손가락은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손을 휘감는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뱀의 혀로 쓸듯이 만져준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불쾌해할까. 아니면 참고 있는 걸까. 그녀의 반응을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떤 변화가 나올지 몰라, 손은 느긋하게 눈은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움찔한다. 그 순간 난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망설였다. 이대로 가다간 이도저도 못하고 끝날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친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깐 책상, 옷장, 침대 등등, 주변의 물건들이 우리의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 시작해! 어서 시작해! 책상 위의 향수가 소리친다. 나의 방이 무대가 되었다. 그들의 외침에 조급해졌고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형사의 손에서 떨어진 목각인형처럼 그녀의 손은 축 쳐졌다. 다만 눈은 떠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도 그녀의 눈동자는 움직인다. 무대의 구성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나는 책상 서랍에 있는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한번 두번 세번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힘입어 그녀의 손가락을 만졌다. 얼음을 만지고 있나 생각할 정도로 차갑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 방의 물건들을 봤다. 정말 조용했다. 아까 상상과 다른 분위기에 정신없다. 몸이 쭈뼛쭈뼛해졌다. 이쑤시개로 구석구석 찌르고 있는 것처럼 따끔하고 거슬렸다. 주사기에 압력을 주면 바늘에서 물이 세차게 나오듯이 온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또 땀 말고도 피부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이 근질근질하다. 털이 자라는 것일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만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간지러운 것은 내 피부만이 아니었다. 하수구에 엉킬 것 같은 머리카락 뭉치들이 걸려 있는 느낌이다. 떼어내고 싶어도 질기다.

나는 지금 보고 있는 그녀의 사진을 지웠다. 망상의 원인이 사라졌으니 조금은 가벼워지리라. 그래도 모자라서 책상에 있는 향수들 중에 아까 뿌렸던 것을 잡았다. 그리고 주위를 마구 뿌려댔다. 구석구석 책상 위부터 침대 아래까지. 시간이 지나자 향기가 덮쳐왔다.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뭔가가 덜렁덜렁 흔들고 있다.

 

땀에 젖은 옷 때문에 다시 샤워를 하고 나올 때,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 일어나서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끝마다 웃는 것 같았다. 그녀는 웃음을 달고 다니나보다. 나는 안도했다. 그러면서 정말 웃는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진짜 웃을 땐 어떤 소리를 낼까. 숨이 들낙날락하는 소리, 호탕하고 거친 소리. 아니면 기가 빠지는 듯한 힘없는 소리.

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통화를 계속 했다. 그녀는 씻어야한다고 말한다. 나는 먼저 끊으라고 말했다. 혹시 그녀의 말 중에 놓친 것이 있을까. 조바심에 살짝 떨린다. 마약을 온 몸 곳곳에 바른 기분이다. 그녀는 먼저 끊으라고 한다. 정말 끊을까? 아니 좀 더 얘기하자. 나도 웃고 그녀도 웃었다.

오빤 왜 나를 좋아해? 어느 정도 얘기하다가, 그녀가 질문했다. 뜬금없었지만 나는 뜸 들어서 말했다. 좋아하는데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 그냥 사랑하면 좋잖아.

몇 번이나 말했을까.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도 말한 적은 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향수처럼 잊어지니, 되풀이하는 것이다. 여자는 달라도 나는 하나이다. 그리고 매일 하루에 마약을 몇 알씩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 나다. 그러기에 그녀의 웃음과 목소리는 정말 달콤하다.

몇 번이나 서로 웃고, 여러 확인을 거쳐서야 그녀는 정말 씻으려 간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금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끊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통화를 끝낸 아쉬움이 공기 중에 스며든 것일까. 이 좁은 방안에서 혼자 있기 적적해서 거실로 갔다.

아까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나가기 전에 미리 치웠나보다. 전에 열려있었던 안방 문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다른 문들을 확인했다. 누군가 보고 있을 리가 없지만 확인해서 나쁠 것은 없다.

밖으로 나가기엔 시간이 남았다. 나는 오늘 할 것 같은 일들을 차근차근 상상했다. 그녀를 만나 카페에 들렸다가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간편하게 산책을 할까. 볶음밥이나 덮밥을 좋아한다는데 괜찮은 곳 없을까. 그러고 보니 연극을 좋아한다는데 언제 대학로 같이 가자고 말해볼까.

말만 해봤자 소용없다. 진도가 빠른 느낌이 들긴 들지만, 지금 생각해야할 것은 고백할 타이밍이다. 그냥 소곤소곤 고백해볼까. 채팅으로 고백해볼까. 소심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데. 나는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오랫동안 있고 싶다. 그녀는 나하고 잘 맞는다. 보통 여자와 다르다. 내가 말하면 웃어주고 그녀가 말하면 내가 웃는다. 이렇게 하면 서로 외롭지 않게 된다. 언제든지 전화해도 이상할 거 없고 하루하루가 재미있어질 것이다.

시간 좀 빨리 가지 않을까, 티비를 보려고 리모컨을 찾다가 티비 옆에 있는 석고상을 발견했다. 저번에 아버지가 사왔던 것이다. 십 만원을 주고 샀는데 자기 말로는 아주 잘 산거라고 했다. 이렇게 자세히 깎은 것은 없다고 잔소리 하는 어머니에게 항변했던 아버지.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름다웠다.

맨몸인데 전혀 천박하지 않았다. 오른손은 상반신을 왼손은 하반신을 수줍은 듯 가리고 있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허벅지와 작은 발.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야구공의 크기와 비슷한 가슴.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얼굴. 정면으로 보기엔 너무 부끄러워서일까.

아버지는 이것을 비너스상이라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비너스상과는 다르다. 저것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상상 속의 산물이다. 이런 것들은 전시회에 둬서 만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단순한 관상용이다. 만지면 만질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비너스는 팔이 없어야한다. 그것이 아름답지 못하고 완벽하지 못한 모습이다. 하지만 팔이 있는 상보다 매력이 있다.

리모컨은 석고상과 티비 사이에 있었다. 누운 다음 팔을 뻗어 리모컨을 잡았다. 그리고 소파에 누워 티비를 틀었다.

 

잠시만 기다려줘, 그녀가 말한다. 매니큐어를 한 손가락 중에 한쪽이 무너져 있다. 나는 웃는다. 그냥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오는 텅 빈 웃음이다. 아까 내 몸에 남아있던 응어리들이 소리치며 발광한다. 계속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손가락을 은근슬쩍 만졌다. 혹시 알아챌까봐 난 그녀의 눈을 본다. 미안해.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지른다. 하지만 그것만 하기에는 성이 차지 않는다. 나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갔다. 무대는 거실의 소파 위. 거실에 있던 가구들이 웃고 있다. 또 다시 배우가 되었다. 연기를 해본 적은 없어 불안하지만 이것들은 계속 하라고 응원하고 있다.

눈을 돌려 관객들을 봤는데, 티비 옆에 있는 비너스만 고개를 돌린 채 보질 않는다. 분명 시답지 않은 거라 생각하겠지. 오히려 야한 것은 맨 몸으로 서있는 석고상인데. 나는 더욱 열을 올렸다. 더욱더 재미있게 연기해서 고개를 돌리게 할 것이다.

더욱더 강력하게 몰아세운다. 내 손은 뱀이 땅바닥의 길을 잘 알듯이 알아서 들어간다. 손과 그녀가 엉키면 엉킬수록 내 향수는 깊숙이 박힐 것이다. 처음은 작은 묘목에 불과하겠지만, 나중엔 깊은 뿌리를 가진 나무가 되겠지.

이번에도 그녀는 조용했다. 침묵을 가장한 시위일까. 아니면 내 행동에 대해 허락하는 것일까. 갑자기 가만히 있다가 소리칠까봐 한순간 두려워졌다. 난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거부하면 어떡하지? 멈춰야 하나? 그럼 무대는 망치게 된다. 그것은 더더욱 싫다.

 

망상은 깊숙이 들어가다 커튼이 내려가듯 천천히 사라졌다. 티비는 켜진 채 소리만 나오고 있다. 난 소파에 누워있고 내 손은 리모콘을 잡고 있다. 티비 옆 석고상도 변한 것이 없다. 마치 혼이 빠졌다가 다시 들어온 기분이다.

티비 채널을 바꾸다가, 끌리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껐다. 소파에 누웠다.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진 것일까. 아직 나가려면 한참 남았다.

어서 만나고 싶다. 이 지루한 흑색영화 같은 시간에서 나가고 싶다. 나는 혹시나 하고 손목에 코를 댔다. 역시나 샤워를 할 때 사라졌나보다.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 향수를 뿌렸다. 약하게, 최대한 가볍게. 향기가 내 몸 구석구석 스며들어야한다.

지금쯤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차피 오늘 만날 거지만, 시간을 줄로 묶어 당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자에 앉아 조금의 변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내내 관찰하듯이 핸드폰만 본다. 소리를 들리게 해놨지만 언제쯤 들릴지 모른다. 난 차분히 기다릴까 생각하다가 책상 아래에 있는 컴퓨터 본체 전원을 켰다.

그리고 키는 것과 동시에 전화가 왔다. 오늘 만나려는 그녀의 번호가 아니다. 제일 익숙했지만 낯설게 봐야하는 번호다.

잘 지내? 내가 하려던 말을 수민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로만 들리지만 아직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그리워할 수준은 아니다. 아니면 칼로 찌르고 베서 무뎌진 걸까.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다. , 그냥 그렇지.

잘 지내나봐? 수민이의 말투가 억세진 것 같다. 난 잠시 주춤거렸다. 나도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함부로 말을 놀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여자친구였던 그녀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꽤나 세심하고 날카로워졌다. , 말 좀 해봐.

뭘 말해? 덩달아 나도 신경질을 냈다. 그러면서 대체 왜 전화를 했을까? 여러 추측을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말할 거 없어? 끼익, 순간 문이 열렸다. 환기시키려고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이었다. 다시 닫았다.

나중에 연락하자. 내가 먼저 연락할게. 그녀와 말을 하면 할수록 뒤통수가 더욱 서늘해졌다. 그렇다고 뒤돌아보진 않았다. 너무 겁먹어서 그런 걸까. 지금 문을 열면 그녀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좀 더 얘기할래. 수민이의 대답은 짧았다.

 

뭘 그렇게 생각해? 그녀가 빨대를 물면서 눈을 치켜든다. 또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었나보다. 나는 고개를 들고 고양이 세수하는 것 마냥 얼굴을 문지른다. , 피곤해. 그녀는 핸드폰을 만진다. 손가락으로 패드를 누르는 솜씨는 나 없을 때도 저럴까. 이러다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겠다. 나는 수민이를 유심히 쳐다본다.

매니큐어색 바꿨네? 예쁘네. 그녀는 나를 보면서도 핸드폰을 잡고 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도 한 모금 마신다. 내가 담배를 꺼내면 그녀도 담배를 꺼낸다. 다리를 꼬면 그녀도 한다. 수민이는 피곤한 건지 지루한 건지 도통 말하지 않는다. 익숙해져버린 걸까. 달라진 그녀가 익숙해진 것인지, 입만 뻐끔뻐끔거리는 무성영화 같은 분위기에 취한 것일까. 나는 담배를 핀다.

담뱃불이 도중에 끊겼다. 다시 불을 붙이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테이블에 라이터가 불쑥 튀어나왔다. 내 쪽으로 빠르게 가더니 그대로 떨어졌다. 그녀가 그냥 던졌나보다. 그냥 손으로 주면 안 돼? 나는 허리를 숙여 라이터를 주었다.

그녀는 핸드폰 폴더를 접더니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낸다. 대학교 과제라고 한 달째 이러고 있다. 적어도 카페에 둘이 있을 땐 그렇지 않았는데. 스삭 4B연필이 바쁘게 선을 긋고 있다. 뭘 그리고 있는지 전에 물어봤지만 그녀는 그냥 숙제라고 말했다. 스삭 또 선을 긋는다. 남들은 칠판 긁는 소리를 기억하겠지만 나와 그녀가 만날 때 나는 소리는 연필 긋는 소리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 혼자 동떨어진 것 같다.

넌 뭐 바쁜 거 없어? 그녀가 겸연쩍었는지 물어봤다. 하지만 연필을 놓지 않았다. 아니, 별로 없어. 근데 그림 그리는 얘가 매니큐어해도 돼?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한번 쳐다보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왜 별로야? 나는 갑자기 그녀의 바뀐 어투에 얼버무렸다.

보통 여자들은 초록색깔 매니큐어 안 바르잖아?

 

그녀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었다. 가끔씩 좀 봐달라고 한 그림들을 보고, 고등학교 축제 때 전시된 그림을 보았었다. 그림은 항상 다양했다. 나무,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전봇대 등등, 평소 쉽게 볼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았다.

그림을 보여줄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어때? 상상이 가?”

그때마다 나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예쁘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만족했는지 웃으며 자신이 어떻게 그렸는지 설명을 하곤 했었다.

나는 그림을 모르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어떤 족속인지 모른다. 그래서 난 그녀의 그림을 이해하고 못 그렸어도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막 태어난 하얀 알과도 같았다. 쉽사리 건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예쁘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예쁘다고 생각한 것은 손가락이었다. 올곧게 뻗은 검지와 중지 마디 옆에 박힌 굳은 살. 새끼손가락부터 손바닥 옆면까지 묻은 연필가루. 심지어 그녀의 손목에서 콧속을 후벼 들어오는 연필냄새가 나기도 했었다. 왠지 몸이 무거워지고 피하고 싶지만 계속 맡아보면 이미 알고 있는 냄새. 후에 연필의 재료가 나무인 것을 알고, 카페에서 자랑스럽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맨날 그리는 것이 나무인데 모르겠냐 이 멍충아, 라고 하면서 데생을 하는 손가락. 오른쪽 손가락들은 도로에 있는 은행나무의 가지처럼 곱게 뻗어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다 조용히 웃었다. 아마도 자신이 한 말에 웃겼나보다. 나도 실실 웃어댔다.

나 다시 미술학원에 갈게 입시 준비해야지. 그녀는 탁자 위에 널브러진 미술도구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항상 도와주고 싶지만 혹여나 실수할 것 같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손도 마음껏 잡을 수 있고 빤히 쳐다본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지만, 이때만큼은 그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다.

수민이는 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일어섰다. 나도 마지막 남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서려할 때, 냄새가 풍겼다. 아무래도 그녀가 일어서니깐 냄새가 퍼졌나보다. 그녀가 앉던 자리에 냄새가 배기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자리에 일어섰다.

 

알고 있어?”

핸드폰 너머로 화가 나 있는 수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속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의자에 앉아 향수를 집었다. 그리고 아까 뿌리지 못한 부위까지 연신 뿌려댔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맡으려나. 위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아까와 다르게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슬슬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 책상 위에 있는 지갑과 향수를 가방에 넣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난 서랍에 시계를 꺼내 손목에 찼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방 한쪽 구석에 있는 큰 거울을 보며 이것저것 체크했다.

오늘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약속이 있다. 난 어서 이 상황을 끝내려고 곧바로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방 안에 쌓여있던 짙은 향기가 목구멍을 막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마치 막이 넘어갈 때 조용해지는 것처럼 긴장감이 흘렸다.

이야기가 멈춰있는 사이에 내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또 땀이 나오려고 하나보다. 이 불쾌한 느낌은 목에만 있지 않고 몸 전체로 퍼졌다. 이윽고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털이 나오려고 하나보다.

빨리 대답을 해야 하지만 수민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래 전에 헤어진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들은 그녀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녀도 생각나고, 이번엔 내 몸에 걸터앉았던 머리뭉치들이 더욱 무거워졌다. 계속 하수구에 걸려있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내 손에 배인 향기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급해졌고 답답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한참 뒤에 수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학을 가려고 해.”

우리가 항상 앉았던 카페 구석의 테이블에서 그녀가 데생을 하다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다. 평소처럼 가만히 앉아 매일 그림 그리는 그녀 때문에 자각을 못하는 걸까. 수민이는 계속 선긋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젠 손목을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번부터 그녀는 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확정을 짓진 않았다. 유학을 가고 싶다, 좀 더 공부하고 싶다 식으로 해서 난 그녀가 그냥 불평을 하는 줄 알았다. 아니면 애초에 그녀의 말에 귀담아 듣지 않은 내 잘못일 것이다.

아는 사람이 캐나다에 있는데, 그쪽 서양화 교수님이랑 친해. 가족들이랑 얘기는 다 끝났어. 너한테 안 알려줘서 미안해.”

그녀가 미안하다고 말하니, 정말 그녀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화가 안 난다. 이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리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다. 뭐가 미안한지 모르는데도 내가 가진 것들을 다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끝낸 뒤 그녀는 스케치북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 난 가만히 있었다.

수민이는 정말 얄미울 정도로 조용이 앉아 데생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은 끊임없이 계속 움직이고 그어댔다. 가끔씩 도형을 꺼내 그리기도 했다. 나를 만날 때마다 항상 이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던데. 헷갈린다. 지금 상황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언제쯤 가는데? 한달 뒤 언제쯤 오는데? 몰라. 그럼 나중에야 만날 수 있겠네. 난 눈도 마주보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쉬움은 없다. 우리들의 대화는 정말 두 배속으로 빠르게 끝났지만 시원하지는 않았다. 끝이란 말은 안했지만 끝이겠지. 꽤나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그 끝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성취감이 없다. 항상 이 카페의 이 테이블에 앉았는데 이제 앉지 못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안 온다. 아직도 그녀가 앉은 의자엔, 익숙한 냄새가 나서 그런 걸까.

수민이가 일어섰다. 그러곤 내가 묻기도 전에, 화장실이라고 말하며 가버렸다. 그녀가 간 뒤에 커피만 홀짝 마셨다. 오히려 그녀처럼 조용히 이별을 말하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른다. 드라마처럼 분위기 잡고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임펙트가 없지 않은가. 이러면 당연히 눈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고.

테이블 위 스케치북을 봤다. 온통 검은 색으로 전에 남대문 화방 갔을 때 사줬던 것이다. 초등학생, 중학생때 썼던 뻣뻣한 스케치북과 다르게 그녀의 스케치북은 부드럽다. 마치 그녀가 항상 연필가루를 묻히고 다니는 손가락처럼.

항상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긴 그리는데, 요즘 그림을 나한테 보여준 적이 없다. 그림을 모르니깐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나보다. 아니면 어차피 유학을 가니깐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그녀는 항상 맞은편에 앉았나보다.

문득 궁금하다. 나와 만나면서 그렸던 그림들이 저 검은색 스케치북에 있다. 연필로만 그렸으니 데생만 했을 것이다. 수민이는 화장실 갔으니 다는 못 보겠지만, 지금 그리는 그림만 보면 될 것 같다. 스케치북 첫 장부터 빠르게 넘겼다.

데생한 그림들은 정말 많았다. 도로와 인도 사이에 있는 나무 그림과 청바지 그림, 카페 그림, 심지어 나를 그린 그림도 있었다. 계속 빠르게 훑어보고 넘겼다. 지금 상황에서 너무 깊게 본 다면 그녀에게 걸리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의 하루를 일기로 쓰면 한 줄 밖에 못 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매일 카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수 십장의 그림을 그려냈다.

중간쯤일까, 종이에 한 사람이 등장했다. 다음 장에도, 그 다음 장에도. 그 사람은 뒤로 가면 갈수록 변해가고 있었다. 아까 없던 팔이 다음 장엔 생기고 배꼽이 생기고 긴 머리가 생기고. 좀 더 빠르게 넘겼다. 여자그림은 가면 갈수록 완벽해졌다. 다음 그림을 펼쳤다. 계속 넘겼다. 스무 장정도 넘겼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그림을 보고 나서야 확신이 생겼다. 나는 짐을 챙기고 의자에 일어났다. 저쪽 구석에 수민이가 오는 것을 봤지만, 간다고 말할 기분이 들진 않는다. 남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천천히 걸으려고 했는데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일단 카페 밖으로 나가서 입구에서 기다렸다. 수민이는 오질 않았다. 그날 베개 옆에 핸드폰을 두고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내 나를 찾질 않았다.

 

수민이는 멋대로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끊어버렸다. 아니, 그녀는 내가 말할 시간을 주었다. 다만 내가 말을 못한 것이다. 날려버린 부메랑이 돌고 돌아 뒷통수를 때린 느낌이랄까.

가방을 꺼내 향수를 뿌릴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수민이와 오랫동안 연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방 안에는 아직도 향기가 가득했다. 향수를 더 뿌렸다간 정말로 밤거리 술집 앞에 앉아있는 남자처럼 될 것이다.

핸드폰 알림창을 보니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오늘 만나려는 후배가 보낸 문자로 늦을 거 같다고 적혀있었다. 그 옆에 이모티콘도 있어서인지 귀엽게 보였다.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했다.

오늘 받아야할 택배가 있는데 집에 자기밖에 없다고 한다. 오빠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냐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제가 오늘 정말 맛있는 음식 사드릴께요. 덮밥으로 유명한 데인데.

후배와 몇 마디 나누고 시간을 삼십 분 늦췄다. 후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저기 그거 있잖아, 새끼손가락 그거 어떻게 할 거니?

무안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의 콤플렉스를 들먹거리는 것이 부끄러워서일까. 그녀는 한참동안 조용히 웃다가, 오빠 참 이상해, 오빠 변태죠?

하고 그녀가 말꼬리를 올렸다. 나도 조용히 웃으면서 부인하다가, 전화를 끊고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녀의 입이 금붕어처럼 뻐금뻐금 거린다. 아니면 내가 못 듣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어디까지 했지? 서 있는 그녀를 의자에 앉혔다. 얼굴에 묶어놨던 테이프는 여전히 붙어있다. 동영상을 정지시켰다가 푼 느낌이다.

빠져나가려고 한다. 난 한손으로 그녀의 두손을 구겨 잡는다. 그리고 아까 썼던 테이프로 그녀의 팔을 묶기 시작했다. 한번 두번 세번 그녀가 악이 받친 발길을 하기 시작했다. 엉덩이로 눌려버렸다. 조용히 좀 해. 제발 한번만 조용히 해. 테이프를 입으로 뜯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아까 전에만 해도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조용해졌다. 관객들이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부턴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다. 이들은 내 손짓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시험지 채점하듯 평가를 할 것이다. 잘못하다간 펜으로 빗줄처럼 그어버릴 것이다. 그럼 내 연기는 일순간에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겠지.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누가 쓰레기를 무대 위에 던졌는지, 불쾌한 냄새가 풍겨온다. 하필 클라이막스 직전에 말이다. 흔적을 찾기 위해 방 주위를 살펴봤다. 없었다. 밖에 누군가가 쓰레기를 버렸나, 창문을 열어 둘러봤다. 없었다.

손목에서 나오고 있다. 하얀 종이에다 누군가가 연필로 계속 그었나보다. 좌우로, 몽땅연필이 될 때까지, 흰 종이가 찢어질 때까지. 흑연냄새는 더욱 풍겨져서 맡기만 해도 코가 간지러울 정도였다.

그녀를 두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 물을 틀어 온 몸 구석구석 닦아댔다. 빨갛게 부어오기도 피가 소금의 굵기 정도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흑연의 냄새와 꼬아버린 검은색 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땀이 온통 젖었고 지금도 피부가 약간 간지러웠다. 애써 정돈했던 머리카락은 누가 강제로 잡아당겼는지 엉망진창이었다. 항상 오렌지처럼 상큼하고 가벼운 향기도 땀범벅인지 냄새가 야리꾸리하다. 이 상태로 나가면 첫인상은 최악이겠지.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머리를 다시 감고 몸을 씻다가 중간지점에 있는 하수구를 봤다. 물이 절벽처럼 뚝하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처럼 배배꼬아서 내려가고 있었다.

하수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안에 있는 것들을 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킨 실타래처럼 생긴 머리카락 뭉치가 나왔고 미끌미끌한 액체가 나왔다. 그것들을 손으로 모아서 휴지통에 버렸다. 내 팔뚝은 검은색 때가 군데군데 묻어있어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물을 틀고 닦고 수건으로 대충 닦고.

옷을 입고 거실 소파에 누웠다. 티비를 틀려고 했는데 그만뒀다. 안방 문이 열려 있어 거슬렸다. 식탁 위에 있는 반찬이 상할 수도 있으니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생각만 할뿐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자세만 잡고 움직이지 않는 석고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제 십일 분후엔 나가야 한다. 아직 어떻게 고백을 할 건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냥 확 고백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아니면 노래방에서 말해볼까. 술자리에서 말해볼까. 초면에 술 먹기는 좀 아닌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티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아버지가 산 비너스상을 잡았다. 아름다운 비너스상.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는데 왜 이래 아름다운지. 분명 싼 가격에 샀을 텐데 품격은 깎이지 않았나보다.

바로 바닥으로 찍어버렸다. 의외로 비너스상은 단단했다. 아니, 내가 너무 약하게 쳤나. 다시 내리쳤다. 둔탁하고 무거운 소리에 집 안에 울려 퍼졌는데 마치 비명소리와도 같았다. 비너스의 허리가 부서지고 하얀 가루가 바닥에 묻었다. 만져보니 밀가루처럼 부드러웠다.

계속 부셨다. 단단했던 비너스상도 한번 부서지니 그다음은 수월했다. 과자 부스러기처럼 석고 가루가 나왔다. 허리부터 팔까지.

 

떨고 있는 손은 온통 석고 가루 범벅이었다. 땀에 스며들어 반죽에 묻은 것 같다. 비너스상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지 못했다. 얼굴부위나 받침대는 너무 작아 부수질 못했지만 상관없을 것이다.

방문을 닫고 손으로 석고가루를 쓸어 모았다. 그리고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담았다. 완벽하게 치우진 못했지만 가루이다 보니깐 부모님이 쉽게 알아차리진 못할 것이다.

이제 나가야 할 시간이다. 준비를 마치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때마침 문자가 왔다. 그녀가 보낸 것이다. 오빠, 저 이제 출발해요. 오빤 어디에요?

난 진짜 비너스를 대하듯이 정중하고 신중하게 문자를 썼다. , 나도 출발해.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또 문자가 왔다. 오늘 어떻게 할 거야. 나 이제 출발하려고. 난 최대한 정성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 나도 출발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단편소설 공모게시판 이용안내 16 file korean 2014.07.16 3328
625 새집증후군 이급 2015.03.23 44
624 파문 波紋 오류 2015.03.24 476
623 금기(禁忌) 카티르 2015.03.30 274
622 나는 나를 만날 수 있을까 ivylove 2015.04.02 240
621 최신형 블루투스 이어폰 시로 2015.04.03 34
620 현충원 가는 날 57 2015.04.05 270
619 빨간 사람 닐리리아 2015.04.06 308
618 상흔 향을품다 2015.04.06 32
617 버스 창 밖 1 제이미 2015.04.07 151
616 버스 창 밖 2 [完] 제이미 2015.04.07 14
615 수희에게 0pjs 2015.04.07 221
614 하얀 지붕의 집 신하영입니다. 2015.04.08 408
» 부재중인 비너스 이승수 2015.04.08 30
612 중력과 참회의 상관관계 psp130 2015.04.08 28
611 손님 리망 2015.04.09 30
610 타인의 명예 dkstpghkz 2015.04.10 1030
609 애니 byulpd 2015.04.10 374
608 금돼지 도시락 2015.04.10 213
607 길 건너에 있는 사람 mito 2015.04.10 18
606 놀이터 rom 2015.04.11 287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