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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0 20:55

포플러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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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여인

 

 

오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전 차례 세워두었던 계획표를 바라보았지만, 모두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끝날 것이란 걸 알았다. 계획표는 그저 벽 한 공간을 채우는 일부에 불과했고 나는 남은 공간을 어떻게 채우지, 라는 생각에 계속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중이었다. 입 안에서는 단내가 나기 시작했고 책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문제집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한 친구 놈에게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2학년 첫 여름방학을 알차게 보낼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했던 A의 문자였다. A의 문자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집에서 시간만 보내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만 묵고 가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A의 제안에 전혀 꿇릴 것이 없었으므로 바로 알았다, 라는 답장을 보내주었다.

평소 교실에서 가족 얘기를 나눌 때 나는 멀리서 A의 눈빛을 주시하곤 했다. 흐리멍텅한 눈은 교실 바닥에 머물러 있기만 했다. A는 틈틈이 개그를 치며 웃음 포인트를 찾아주는 아이의 재간에 쉽게 입꼬리를 올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A의 옆에서 곁눈질을 하던 다른 친구들은 조용히 A에게 귓속말을 건네곤 했다. 어디 안 좋아? 그렇담 A는 그제야 습관 된 미소로 속이 조금 안 좋네, 라며 자신의 감정을 감춰버렸다. 나는 A에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속으로 확신했다. A에게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그런 A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A와 내가 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었기에 부담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오랜만에 만나는 A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떤 첫인사를 건네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하지만 내 고민과는 다르게 A는 내게 활짝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주었고, 나를 잡아끌고 곧바로 자신의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꽤나 성급해 보이던 A는 나를 데리고 가며 이번 여름방학에 일어났던 일을 말해주었다.

며칠 전에 엄마가 이혼했거든. , 심각한 건 아니야. 요즘 이혼한 사람들 많잖아. 우리 반 H도 그렇고. 나는 괜찮은데 엄마가 조금 힘든가봐. 많이 적적해해서 사람 좀 많으면 기운 좀 차리지 않을까 해서. 엄마한테 친구 데려온 다니까 궁금하다고 빨리 데려오래. 그래서 그랬어. 너도 전혀 불편해할 거 없어. 그냥 편하게 놀다 가면 돼.

나는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A의 얼굴을 보며 조금의 아쉬움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아쉬움은 이혼한 아버지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A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적적한 것은 A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A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와 달리 발걸음을 빨리 하는 A의 걸음을 맞춰 걸어주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걸었을 때, A가 살고 있는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포플러 나무, 내가 A의 집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커다란 포플러 나무였다.

대문에 들어서자 멀리서도 보이던 포플러 나무가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포플러 나무는 작은 이파리들을 잔뜩 단 채로 바람결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포플러 나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A에게 이 포플러 나무는 익숙한 것이었는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나를 재촉하며 잡아끌었다. 나는 이 포플러 나무를 눈에 더 담아두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A는 현관문을 열었다. 보통 집과는 다르게 A의 집은 아무런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았다. 나는 왜 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은가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왠지 지금은 물어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A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와보는 A의 집이라 나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A는 현관에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A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해준 뒤 내가 벗은 신발을 A의 신발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세 발자국을 걷자 보이는 것은 비싸 보이는 찻잔을 든 A의 어머니, 아니 한 여인이었다.

A와 닮은 구석을 찾아보라면 어떤 점이 있을까. 저 여인은 A와는 다른 슬픔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저 여인을 보고 인사조차 건네지 못한 채 서게 되었다. 찻잔을 든 고운 손가락에, 건들면 후두둑하며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에, 붉은 입술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특히 저 붉은 입술은 온전한 여인의 것인 것 같았다. 여인이 들고 있던 찻잔 끝에 립스틱자국이 전혀 묻어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가 나지 않게 새끼손가락을 받쳐 내려놓았다. 그리곤 멍청이 서있는 나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친구를 데려왔구나. 여인이 내게 말한 첫 대사였다.

여인의 말에 A는 팔꿈치로 내 허리를 찔렀다. 나는 A의 행동에 금세 정신을 차린 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내 인사에 여인은 새침한 눈길로 나를 훑어보고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내 눈은 자연스레 여인이 이동하는 것에 따라 움직였다. 반도 마시지 못한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가, 천천히 느릿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전부 담아 두었다. 아름다운 걸음걸이, 마치 공연을 하는 발레리나 같이 보였다. 발레리나 같다 생각한 것도 다름이 아니었다. 여인은 베이지색 끈이 얇은 나시와 크림색의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여인은 같은 나이대의 아줌마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고동색의 긴 머리카락을 동여맨 리본 끈 때문이라 생각했다. 여인은 의자에 소리 없이 앉았다. 그리곤 왼쪽 입 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입술을 벌렸다.

인사를 하지 않아서 이상한 친구라고 말한 게 아니야, 여름인데도 피부색이 까맣지 않아서 이상한 친구라고 말한 거야. 우리 A는 집에만 있었는데도 피부가 탔거든. 그런데 너는 이상하네. 피부가 원래 흰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나는 여인의 말에 무어라 대꾸를 해줘야 할지 몰랐다. 나를 재미있는 아이라는 듯 살펴보는 여인의 눈길에 그저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여인의 질문에 난처해하는 날 보며 한숨을 내쉬던 A는 내 손을 잡고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들어가는 길, 등이 간지러웠다. 등이 간지러운 이유는 여인이 나를 쫓고 있음이라 생각했다.

A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침대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거의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저런 말에 일일이 대꾸 안 해줘도 돼, 전부 상대해주다간 일찍 지치거든. 나는 A의 말에 왜냐고 물었다. 그러자 A는 뻗고 있던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무릎 위에 올리며 말했다. 아빠가 이혼한 게 저런 말들 때문이야. 시도 때도 없이 저런 이상한 말들을 해서 아빠를 지치게 했거든. 엄마는 아빠와 이혼 할 때에도 저런 이상한 말을 했어, 옆에서 내가 들었어. 나는 궁금했다. 여인이 A의 아버지와 이혼 할 때 했던 이상한 말의 정체를 말이다. 나는 A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의 A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상태였기에 말을 아껴야 했다. 나는 조용히 말을 삼킨 후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A를 다시 바라보았다. 화장실은 어디야? A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나가서 왼쪽, 이라 말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A의 방을 나와 다시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 중앙에 있던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 나는 A의 집을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꽤 큰 거실에 방은 총 세 개가 있었다. 한 방은 방금 전 내가 나온 A의 방, 나머지 두 방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방이었다. 거실과 함께 붙어있는 부엌과 꽤 넓었던 화장실, 큰 집이었지만 안에 내부는 꽤나 단순했다. 나는 혹여 걸을 때 소리가 날까 조심스럽게 발을 움직이며 거실을 활보했다. 단순했지만, 좋은 집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좋은 집임을 확신한 이유는 바로 거실 한 벽을 차지하는 큰 창문 때문이었다. 여인이 A를 시켜 닦아 놓은 건지, 아님 사람을 시켜 닦은 건지 알 수 없는 창문은 깨끗했고 흠집하나 없었다. 나는 그 창문에서 포플러 나무를 바라보았다. 포플러 나무는 창문에서 바라봐도 넘쳤고 거대했다. 여린 이파리가 달린 포플러 나무는 여전히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포플러 나무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와 같은 눈으로 포플러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말이다. 창문 밖의 여인은 포플러 나무 이파리를 하나하나 기억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언제부터 바라보고 있던 건지는 모르지만 여튼 꽤 오래 바라본 것 같았다. 나는 포플러 나무를 바라보는 여인을 보며 생각했다. 여인은 포플러 나무와 굉장히 닮아 있다고. 여인이며 저 나무며 한 눈에 시선을 끄는 면이 첫 번째로 닮아있다고 말이다.

나는 여인을 보는 것을 멈추곤 다시 A의 방으로 들어갔다. 행복해 보이는 여인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A는 침대 위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문소리에 느릿하게 눈을 떴기에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깼어?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자, A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A는 자신의 침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 남은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머뭇거렸지만 딱히 앉을 자리가 없었기에 A의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A와 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는 A와 꽤 어울리는 야광별이 촘촘히 붙어 있었다. 나는 눈으로 붙어있는 야광별의 개수를 세었다. 하나, , ……, 잠깐 두 개로 붙어져 있는 건 따로 세야 하는 건가. 야광별의 절반을 세어가고 있을 때, A가 내게 말을 걸었다. A답지 않은 조용한 목소리였다. 저기 있잖아,

미안해, 널 괜히 부른 것 같아. 나는 A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A는 괜히 불렀단 말을 끝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나 역시 A와 같은 침묵을 지켜갔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또 A였다. 이번에 A는 내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집이 많이 조용하지, 나도 그렇고. 집에서는 학교에서처럼 못 떠들겠더라고. 같이 얘기할 상대도 없고. 나는 저절로 그녀를 떠올렸고, 가족 얘기를 하면 저절로 시선을 아래로 두던 A의 눈빛을 떠올렸다. 왜 그러는데? 내 물음에 A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너무 조용하잖아. 떠들면 내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어색해, 그래서 난 집에만 오면 조용히 방에 들어가 있어. 나는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그랬구나, 많이 심심했겠다. 나는 A의 말에 천장에 붙어있는 야광별 크기만큼의 위로를 건네주었다. A는 내 위로에 피식하며 웃음을 흘려주었다. 한 숨 자, 자고 일어나서 저녁 먹고 게임이나 하자. A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눈꺼풀을 내렸다. 여름 방학 동안 매일 잤던 낮잠이었음에도 잠은 쏟아졌다.

 

우리 집이 보였다. 크지 않던 집이었음에도 안에 물건은 넘치듯 차있었다. 선반 위에 올라와 있는 오래된 신문더미, 다 마신 음료와 우유, 보푸라기가 난 카디건과 스웨터, 늘어난 고무줄 바지, 화장실 구석에 쌓여있는 축축한 수건과 걸레, 제목이 한자로 된 오래된 책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 둥글게 말린 먼지뭉치와 집을 찾지 못한 사진들까지. 나는 그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금의 공간이 남아있는 곳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내 옆에는 촌스러운 꽃무늬 바지에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 미장원에서 파마를 새로 했는지 머리카락이 잔뜩 말려있었다. 어머니에게 싸구려 파마약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를 맡기가 싫어 어머니에게 등을 반쯤 돌려 앉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건조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냄새 많이 나나, 머리가 자꾸 빠져 뵈기 싫더라고. , 그래. 나는 어머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던 그런 것은 별로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싫은 것은 크지 않은 집안임에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불필요한 물건들과 싸구려 파마약 냄새였다. 어머니는 내 반응에 두꺼운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많이 추하나, 나는 그 말에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 그리곤 정신없는 물건 틈을 빠져나왔다.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부정한 등의 어머니는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A가 없었고, 나 혼자 어두운 방에 있을 뿐이었다. 천장에는 아까 세었던 야광별이 빛을 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눈을 감았을 때 분명 낮이었는데.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변함없는 어둠이었다. 몸 위에 올라와 있는 A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었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몸에서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전 꾸었던 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A의 집에 간다는 말만 남겨놓고 아직 어머니에게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A가 갑자기 방문을 열어 재낀 것이었다. A는 침대로 다가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다시 눈을 뜨자, A는 밥 먹자라고 말하곤 다시 방을 나가버렸다. 목을 덮고 있던 이불을 치워내었다. 나는 A의 침대에서 일어나 빛이 보이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음식 냄새가 났다. 아침만 대충 때우고 온 터라 옅은 음식 냄새에도 쉽게 배가 요동쳤다. A는 여인 옆 자리에 앉아 나에게 손짓을 했다. 여인은 A의 손짓에 내 쪽을 바라보고는 어서와, 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종종 걸음으로 A의 앞에 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여인에게서 흘러나오는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좋은 향이었다. 어느 향수를 쓰는지, 아니면 여인 특유의 살 냄새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좀 더 깊게 여인의 향을 들이켰다. 여인의 향이 내 몸 속 구석구석을 타고 흘렀으면 싶었다. A는 내가 젓가락을 들지 않자, 어서 먹으라며 나를 재촉했다. A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젓가락을 집어야 했다. 나는 여인의 젓가락을 눈으로 따라갔다. 아주 적은 양의 밥을 떠 입으로 가져가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금단의 열매를 먹는 하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그녀의 모습을 보자, 나는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들었던 젓가락을 다시 내려놓자, A는 왜 그러냐면서 걱정하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냥, 조금 입맛이 없어서. 내가 말하자 A는 그렇게 입맛이 없냐며 다시금 물어왔다. 나는 대충 A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곁눈질로 옆에서 조용히 밥을 떠먹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기계처럼 밥을 입으로 가져다 대고, 기계처럼 반찬을 집어 다시 입으로 가져다 대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기계처럼 밥을 먹던 여인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차라도 마시겠니? 여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온 집안에 허브 향이 가득했다. 여인은 나를 위해 물을 끓여 차를 만들어 주었다. 밥을 다 먹은 A는 잠시 씻고 나오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지금 거실에는 여인과 나 뿐이었다. 여인은 약간의 다과와 함께 차를 내어 주었다. 그리곤 아까 자신이 낮에 마셨던 찻잔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나는 여인의 손길이 닿은 찻잔을 두 손을 감싸 쥐었다. 찻잔에서 나온 따뜻한 온도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여인은 다른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도 여인을 따라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찻잔 끝에 입술이 닿았다. 찻잔을 감싸 쥔 손이 붉어졌다.

오는 길에 저 나무를 봤니? 여인이 내게 물었다. 여인의 말에 급히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 나무가 예뻐서 계속 눈이 갔어요. 내 말이 끝나자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인의 미소에 다시금 볼이 붉어졌다. 저 포플러 나무, 처음엔 저 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했어. 집 안에 들어오는 햇빛을 다 막아버렸거든. 어느 날이었어, 그 이가 회사에 가고 A가 학교에 갔을 때 문득 저 나무를 다시 바라봤지.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 외로움이 느껴졌어. 저 나무가 잊고 있던 내 외로움을 찾아 준거지. 나는 그 다음부터 저 나무에게 내 모든 시간을 쏟아 부었어. 가지를 잘라주고, 흙을 갈아줬어. 나무가 외롭지 않도록 말이야. 말을 끝낸 여인은 느긋하게 목을 축였고, 나는 여인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네가 마시고 있는 거, 포플러 잎사귀를 따서 말린 거야. 여인은 포플러 나무를 매우 사랑하는 것 같았다. 찻잔 속 포플러 향이 나는 차를 보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을 어머니가 떠올랐다. 외로움, 어머니는 지금 외로울까. 여인을 따라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포플러 나무가 울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여인이 내게 질문을 하면, 답을 해주었고, 내가 여인에게 질문을 하면, 여인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여인은 내 질문에 대부분은 답을 해주지 않았다. 차를 마시는가 하면 옅은 미소로 답을 회피하곤 했다. 그런 대화가 계속 이어져 갈 때 즈음, 욕실에 갔던 A가 나왔다. A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A는 나를 붙잡아 두지 않았다. 아마 꽤나 즐거워 보이는 여인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었는가.

여인은 금세 다 마신 차를 바라보며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집에 가족들이 누가 계시니. 그럼 나는 빠르게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 뒤따라 기억되는 아버지를 지워버린다. 어머니와 둘이 살아요. 내 대답에 여인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어머니와 둘이 사니. 나는 다시 떠오르는 아버지를 밀어내려 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돈을 빌리러 가셨거든요.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있어요. 돈은 돌고 도는 거라고요, 돈은 자기 것이 절대 될 수 없다고 빌리러 갔어요. 그래서 집에 어머니가 혼자 있어요. 당신처럼. 나는 마지막 말을 씹어 삼켰다. 그랬다, 여인과 어머니는 전혀 다른 분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여인과 어머니는 똑같은 분류였다. 혼자인 것, 느낀 방법은 다르지만 외롭다는 것. 그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빌리러 갔을 때, 어머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이었다. 잿빛의 얼굴색은 정말이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아버지를 잡지 않았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버지보다 강하단다. 그런데 꿈이 있는 아버지에겐 한없이 약해. 네 아버지는 떠나고 싶어 해. 큰돈을 찾으러 가고 싶어 해. 그게 아버지의 꿈이야. 그래서 난 아버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하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물건을 하나씩 들여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들을 버리지 못했다. 신문 더미부터 머리카락까지 말이다. 어머니는 그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었다. 모든 물건들이 난잡하게 섞이지 않도록 모양대로, 색대로 정리해놓았다. 아주 사소한 머리카락까지도 제 자리를 찾아주었다. 마치 포플러 나무의 잎사귀를 정리해주는 여인처럼 말이다.

나는 여인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마시던 차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여인의 말수는 줄어들어 갔다. 나는 이대로 여인과 헤어지기 싫었다. 이 밤이 지나면 여인과의 추억은 이게 마지막이 될 것이었고, 나름 간절했던 여름방학의 일수가 줄어들 것이었다. 나는 여인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네었다. 여태 답을 회피했던 여인이 이 질문에 답을 해줄지는 의문이었다. 나는 말아 놓았던 혀를 펼쳐내었다. 그리곤 아주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울렸다. 이젠 사랑을 믿으세요? 여인은 다시금 창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까지도 회피인가, 내가 찻잔을 내려놓자 여인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거 아니, 나즈막히 들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작게 울렸다. 나는 여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포플러 나무의 효능을 아니. 포플러 나무는 꽤 많은 곳에 쓰여. 방부제에도, 감기약에도, 해열제나 진통제에도 쓰인데. 그리고 흥분제에도 쓰인다고 하더라. 여인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몇 초간 입을 다시 다물었다. 나는 여인의 답을 다시 기다렸다. 여인은 창문이 아닌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눈에선 외로움이 보이지 않았다. 외로움이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외로움이 담겨져 있어서 아예 여인의 것이 된 거였다. 여인은 익숙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이가 없는데 이제 사랑을 느낄 리가 없잖아. 여인은 이 대답을 끝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홀로 빈 거실에 남겨지고 말았다. 훅 밀려오는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포플러 나무가 아직도 울고 있었다.

한 밤중 나는 모두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낮과는 다른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닭살이 돋았다. 나는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다음 포플러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포플러 나무는 낮에 보았을 때 보다 더 거대했고 웅장해보였다. 나는 포플러 나무의 몸통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두꺼운 나무껍질이 떨어질 듯 붙어있었다. 천천히 눈을 올려 포플러 나무 끝을 바라보았다. 점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나는 가슴 깊이 느껴지는 무언가를 거부할 수 없었다. 외로움, 정말 신기하게도 포플러 나무는 내가 잊고 있던 외로움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여인이 느꼈던 외로움이 내가 느낀 이 외로움과 같은 느낌일까. 나는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외로움을 더 깊게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팔을 벌렸다. 활짝 벌린 팔로 포플러 나무를 와락 안아주었다. 차가웠다. 원래 나무들은 이렇게 차가운 건가, 나는 나무를 안던 팔로 내 몸을 다시 안아보았다.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포플러 나무 옆에 서서 몇 시간을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동이 틀 때까지 포플러 나무 옆에 서서 몸을 떨었다. 밤은 날이 밝아질 때까지 온도를 계속 낮춰버렸다. 그래서 새벽이 이렇게 추운 것이었다. 나는 몸을 떨며 생각했다. 내가 외로운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내게는 촌스러운 어머니가 있다, 아직 돌아오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있다, A라는 친구도 있고, 왠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여인도 오늘 하루 곁에 있어주었다. 나는 여러 번의 고민 끝에 결국 정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나는 이게 정답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다. 곁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사람은 외롭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소에 이 외로움을 깨닫지 못한다. 나도 역시 그랬다. 사람들은 이 외로움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자신 옆에 붙여 놓으려 한다. 어머니는 나를, 나는 여인을, 여인은 포플러 나무를 말이다. 하지만 다들 잊어버리고 만다. 원래의 사람은 외롭다는 것을.

까치발을 들었다. 나무의 몸통을 뚫고 나온 가지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예상대로 가지는 쉽게 잡혔다.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가지를 뜯어내듯 떼어냈다. 나는 포플러 나뭇가지를 품에 안았다. 규칙적이게 뛰고 있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방부제에도, 감기약에도, 해열제나 진통제, 흥분제에도 쓰인다던 포플러 나무. 나는 안고 있던 포플러 나뭇가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지금 포플러 나무는 제 효능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이 포플러 나뭇가지를 어머니에게, 여인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이 기분을 전해주고 싶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느낌을,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는 느낌을 말이다. 그리고 말해주어야 한다. 우린 외로움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대로 A의 집 현관문을 벗어났다. 새벽 빛이 밝아졌음에도 골목길에 서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한 발바닥이 바닥에 밀착되어 떨어지면 다른 발이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두 다리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는 외롭니, 옆에 서로가 있는데도 그렇게 딱 붙어 있는데도 외롭니. 두 다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이룰 뿐이었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앞이 휑하니 뚫려있는 골목은 나를 위해 존재해주는 것만 같았다. 점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집안에 있는 이 사소한 물건들을 모두 가져다 버리자고. 그리고 안겨줄 것이다. 내가 품에 안고 있는 이 포플러 나뭇가지를 말이다. 그렇담 어머니는 무슨 대답을 할까, 내가 처음 포플러 나무를 안았던 것처럼 차갑다, 라고 말할까. 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포플러 잎사귀를 뜯어 내 입 안에 넣었다. 익숙해져야해, 이젠 왠지 모든 게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응모자 성명 - 안소랑 

이메일주소 - boknimn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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