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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4 23:36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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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

 

 

 

 

 

 

 

나는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를 벽이라고 생각했다.

 

새벽 330분에 담배를 피우러 우리집 아파트 현관 앞에 나와서 계단에 쪼그려 앉았는데 어두운 눈앞에 커다란 벽이 있다. 세어본 적 없는 창문들 중엔 불이 켜져 있는 곳도 몇 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낡은 벽 같다.

벽의 두께는 여덟 발자국 정도. 그 안엔 우선 나와 나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내가 모르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몰려나온다면 아주 아주 복잡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 벽 안에 살기로 선택했다. 나는 초등학교때 부터 이곳에 살고 있느니 우리집은 우리 부모님이 선택을 했다

 

 

 

 

 

가기 싫었지만 나도 갈수밖에 없었던 할머니 댁엔 명절이라고 우리 가족 내가 아는 얼굴들이 다 모였다. 나와 이야기를 많이 나눈 사람들도 있었고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한테 말은 걸지 않았던 사람도 용돈은 챙겨줬다.

 

서로가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은 내가 양팔을 벌린 정도 크기의 낮은 밥상에 모여앉아 술을 많이 마셨다. 그 중에서도 우리 아버지가 가장 취하셨다. 그 자리에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가 취한 이유를 몰랐다. 아버지는 아주 많이 마셨고 얼굴이 일그러지셔서 때때로 우시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도와줘 아버지를 겨우 부축해 차에 태운 다음 올 때는 내가 운전해 겨우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아버지는 몇 번을 혼자 껄껄대고 웃으셨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를 눕혀 드렸다. 아버지는 바로 잠들지 않으셨고 나를 불러 앉히셨다.

 

"보증 잘 못 섰다가 망하는 거요?"

"아부지 뭐 연속극 보셨어요?"

"거 왜요?"

아버지 앞에서 나는 피곤한 기색을 했다.

나는 술 취해서 평소보다 더 망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무시했다.

 

"아니라구요?"

"그럼 뭐 실제로 우리집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아부지가 그러시기라도 했어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내가 한 말이다.

 

"응 그래. 이 아부지가 그래."

"아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나의 말을 듣고 아버지가 한 말이다.

 

"뭐라구요?"

"어떡하냐구요?"

"잠깐.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아 잠시 만요."

"뭐라구요?"

"진짜 그렇다구요?"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다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그래."

"당장 우리 이사 가야 될지도 몰르겠다."

아버지는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말하셨다.

그래서 순간 아버지 얼굴에 패인 주름이 깊게 접혔다.

 

"잘 모르겠네요. "

"저보고 어떡했으면 좋겠냐고 그런 질문을 하시면. 저는."

"근데 아부지."

"정말로 빚보증을 섰다가 그게 잘 못 된 거에요?"

"아부지."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의 표시가 아니었다. 나는 감정이 없었고 여러 가지 수가 재빠르게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을 뿐이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고백에 비보를 인식하지 못했고 당장 실감하지 못했다.

 

얼마동안 그렇게 아버지와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는데 바로 내 앞에서 아버지가 우셨다.

두 번째로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사실은 우는 건데 부끄러워 감추려고 껄껄껄 웃는 척 하다가 결국은 몸과 목소리가 떨리는 아버지가 나는 안쓰러웠다.

 

 

 

 

 

십 몇 년 전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거나 억지로 느꼈다는 것을 고백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때와 지금 할머니에 대해 떠올리는 나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파란색 지붕의 독채였던 할머니집은 겨우 서울 근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골에 있었다. 이웃한 집은 딱 한 채 밖에 없어서 할머니는 그 집 중년부부와 친하게 지내셨다. 고맙게도 그 집 아줌마 아저씨가 우리 할머니를 자주 들여다보고 챙겨주셨다.

나는 할머니 댁에 갈 때 마다 그 아줌마 아저씨를 할머니의 집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아저씨가 첫째 딸의 건강 때문에 도시가 아닌 곳에 살기로 했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던 것이 어렴풋 기억난다.

 

아버지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보이신 눈물은 그 중년부부가 할머니의 사진 앞에 도착했을 때가 유일했다.

나는 우리 아빠가 우는 모습을 그 때 처음 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아저씨의 외투를 붙잡고 껄껄대며 우시는 모습을 멀리서 봤다.

어린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놀랐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점심이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목이 말라서 제일 먼저 내가 한 일은 부엌으로 가서 물을 충분히 마신 일이었다방금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것이 가능해졌는지 몇 번을 확인하고서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부재중이 된 전화나 메시지들은 그 용건이나 내용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도 결국은 핸드폰 안에 남아있다. 그 중 한 개는 친구 놈들이 내게 대화를 걸어 놓은 것이었는데 나는 그 메시지를 가장 나중 순서로 확인했다.

 

대화의 내용과 이유는 전에 약속했던 날이 오늘이라는 것과 술은 어디서 마시면 맛있겠다는 것이다.

나에겐 중요한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저녁으로 예정된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 녀석 두 명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학가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오는 순서대로 인사말을 나눴다.

얼른 술 마시러 어디든 들어가자고 누군가가 말한다.

 

오늘 우리가 술을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는 그날 술을 마시러 술집에 모인 사람들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각자의 욕망이랑 그동안 어딘가에서 겪었던 경쟁이랑 잘나가는 놈들 이야기랑.

그렇다고 친구 녀석 둘과 나, 우리가 지금 모여앉아 하는 말들이 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제 할머니 댁에서 봤던 아버지처럼 얼굴이 찌그러질 때까지 술을 많이 마셨다.

 

술값은 셋이서 정확히 삼등분 나눠 낸다.

우리는 당구장에 가려고 했다가 가지 않고 1시 쯤 헤어진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거리나 빈자리가 없는 만원 버스에 끼여 서 있는 저 사람들도 나처럼 속이 빈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저 친구 저 아가씨 저 아저씨 저 아줌마 저 할머니 할아버지.

주말 약속이나 티비 프로에서 알아놓은 맛집에서의 식사나 주말에 있을 축구경기 중계나 끊어 놓고 안 가는 헬스클럽 회원기간 만료일이나 아이들 성적표 따위를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눈앞엔 널찍한 창이 보인다. 빨간색 광역버스의 운전석 큰 창이다. 속이 안 좋아서 창을 통해 주행방향 쪽으로 아무리 멀리 내다보려 해도 안전손잡이가 시야에 걸린다. 이 안전봉은 주황색인데 도무지 주황색 보아뱀으로 보인다.

오늘 술자리에서 친구 녀석이 지 여자친구와 휴가를 맞춰 베트남 여행을 다녀왔다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줬다. 주황색 안전봉은 어색하게 웃는 친구의 목에 걸려있던 주황색 보아뱀 같다.

 

나는 곧 죽어도 강 건너 여기가지 와서 결국 술에 취한채로 다시 버스 시간을 헤아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이건 내가 낮에 강을 건너오며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다.

하루가 어찌되든 간에 나는 돌고 돌아 결국 우리 집 주소로 돌아간다.

 

어릴 때가 기억난다. 울음 많던 작은 아이가 돌고 돌아 이렇게 역마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기를 쓰고 서울로 기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오늘처럼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라고 해도 광역버스 안은 항상 덥다. 이유는 두 가지. 버스 안 가득한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빵빵한 히터.

몸이 뜨겁고 두피를 통과 해 나온 땀이 이마를 타고 찔찔 내려와서 제발 빌어먹을 외투 좀 벗고 싶은데 자리가 비좁아서 내 옆에 앉은 여자는 전화를 하며 내 팔을 툭툭 친다.

도무지 뜨거워진 몸 좀 식히고 싶다.

 

 

 

 

 

버스 안이 너무 더웠다. 나는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 같아서 얼마 못 가 버스에서 내렸다. 싸구려 안주에 술만 주구장창 마시니 제대로 취한다.

버스 안에다 토를 하느니 차라리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운동 삼아 고수부지까지 산책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데술 취한 정신에 내가 떠올리는 생각은 고수부지를 운동 삼아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비싼 택시비 안 내고 진짜로 집까지 걸어서 갈수만 있다면 내일 점심값을 굳힐 수 있다고 생각하니 이게 과연 일석 몇 조일까 계산까지 하며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남쪽 그다음에는 서쪽. 무작정 방향을 잡고 꽤 걷다보니 기분이 좋아졌다방금 전까지 비참하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도 어째 멋이 좀 나는 것 같다. 멀리 보이는 양화대교를 보면서 유행가까지 흥얼거리니 더욱 그렇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취한 정신에도 좌우를 살피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닳아버린 신발 밑창을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건너 양화대교에 올라탄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한다. 올라탄다.

 

몇 걸음 걷다보니 벌써 춥고 귀가 시리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봐도 내 잠바는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더 추워지기 전에 따듯한 잠바 하나 사야 되는데.

 

겨울에 한강다리 위는 정말 춥다. 강바람이 세차다. 강바람은 빽빽이 내 몸통 안으로 불어 들어온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번호부를 훑기 시작한다. 이건 일종의 버릇인데 내가 최대한으로 아는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맨 위에서부터 맨 아래까지 확인해 보는 이 행동은 심심해서 생긴 쓸데없는 습관이다.

나는 이런 쓸데없는 습관을 아주 많이 갖고 있다.

 

오랫동안 걸어온 것 같은데 어디쯤 왔나.

반은 건너왔나.

몇 시쯤 됐을까.

 

뒤를 돌아보고 손목에 시계를 한 번 봤다.

아직 반도 못 건너간 것 같아 보이고 카시오는 02:33을 표시했다.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나.

이렇게 추우면 정신이 바짝 들어야 하는데 아직도 알딸딸하다.

왜 걷기로 해가지구.

 

신발 밑창이 더 이상 닳으면 안 되니까 발을 최대한 땅바닥에 끌지 않으려고 걸음걸이를 의식한다.

 

신발은 또 언제사지.

 

잠깐 멈춰 서서 괜히 신발 밑창을 한번 들여다봤다.

나의 시선으로써 닳아버린 밑창이 새것으로 부활하길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고 단지 닳는 속도라도 좀 늦추고 싶어서 들여다본다.

 

강바람은 지랄 맞게도 춥다.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다리의 끝을 한번 노려봤다. 저 멀리 끝이 보이긴 보이는 것 같다.

 

시간문제네.

 

아버지는 지금쯤 무얼 하고 계실까.

 

어제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난 아버지의 아들. 사회적 성공을 향한 반듯한 길을 걸어가기는커녕.

술이나 마시고 집에 가는 차비 아끼겠다고 한강다리를 걸어서 건너가는 그런 아들이에요.

 

나의 사춘기는 남들보다 몇 배 더 어두웠을 거라는 오만한 생각은 내 의식 속에 깊게 박힌 나쁜 생각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편모는 손들라는 선생님의 말에 실눈 뜨고 부끄러워 손도 못 든 나인데.

우리 아빠 효도시켜 드린다고 떠들던 그런 나의 조각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니 아버지를 생각 할 때면 부끄럽고 죄송할 뿐이다.

 

이제 거의 다 건너 온 것 같은데 몇 미터 앞에 커다란 검은색 비닐봉다리 같은 게 보인다.

 

아 근데 저기 저거 뭐지.

아 사람이네.

 

아 저 아저씨도 참.

나보다도 못난 놈이 저기 있네.

처자식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술 처먹고 한강다리 위에서 쓰러져 자고 있다니. .

 

남자는 이 추운 날 딱 봐도 싸구려 같아 보이는 홑껍데기 양복만 입고 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로부터 물리적인 충격을 받고 쓰러진 것처럼 옆으로 길게 누워있다

 

양복 색깔을 뭐 저런 걸 입냐. 뭐 그러니까 아저씨지. 저게 아저씨 색깔이니까.

 

남자는 머리카락이 짧았다. 딱 봐도 어디 저 중소기업 다니는 대리 쯤 되어 보인다.

인상이 딱 그런 인상이다. 좆도 없는 내가 봐도 눈을 얇게 뜨고 쳐다봐지는 그런 인상.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앞을 보니까 다리 위에서 전망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카페가 보인다. 지금은 유리문이 까맣게 닫혀있다.

 

춥지도 않나.

어쩌다가 여기 이렇게 누워있을까. 설마 뛰어내리기로 작정하고 한강다리를 찾는 그 쌍팔년도 IMF맨 비슷한 건가.

어째 나보다도 불쌍하다 이 아저씨. 밤새 저대로 놔두면 얼어 죽지 않을까.

 

지갑은 마이 안주머니에 있나? 바지 뒷주머니에 있나?

그래도 몇 푼은 지니고 있을 텐데 누가 지갑이라도 뒤지면 어떡해.

 

길바닥에 술 취해 쓰러져있는 사람한테 나 지금 뭘 원하는 거야.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단추가 한 개만 채워진 양복 재킷은 양쪽으로 벌어져 안주머니 위 상표가 다 보인다.

 

지오지아? 얼마쯤 하더라? 이거.

 

지갑은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게 확실하다. 그 곳이 불룩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싹 한번 둘러본다.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고 사람은 당연히 없다.

 

뭐야 아무도 없네. 싹 다 죽어버렸나.

나도 죽어버릴까.

다 죽여 버릴까.

씨팔.

 

지갑을 손쉽게 빼냈다. 이 아저씨 정신을 아주 잃어있다.

 

만약 이 아저씨가 눈을 뜨고 있었더라면 그거 같지 않았을까. 그거. 생일날 촛불 불 때 주인공 아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눈빛. 초점 잃고 히죽거리면서 촛불을 바라보는 그 눈빛 아니었을까.

술 취한 정신에 내가 떠올리는 생각은 생일파티에 모여 앉아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 턱에 침이 줄줄 흐른다. 정말 더럽다.

 더러운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나는 술 먹어도 침은 안 흘린다. 이 등신아.

 

지갑을 열어본다.

 

칠천 원이 뭐니. 이 새끼도 딱 사이즈 나와. 차비 없어서 집에 걸어가는 중이었네.

민증은 왜 이렇게 낡았어.

 

사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새낀지. 민증까지 빈티가 난다.

뒤통수 딱 한대만 갈기고 싶다.

 

이 나라에서 제일 불만 많은 놈들이 이런 놈들이지. 사짜들 부러워서 뒷담화나 까는 새끼들. 이 나라가 사회 저 밑바닥에 묶어놓은 부류들.

 

나 왜 이렇게 화가 나니. 나 지금 왜 이렇게 화가 나지.

 

나는 이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이 새끼는 멍청한 표정으로 뻗어있다.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요.”

아저씨 좀 일어나 보라구요.”

소리를 쳐봐도 아무 대꾸가 없으니 더 화가 난다.

 

손바닥으로 뺨을 있는 힘껏 갈겼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 새끼는 입술만 씰룩거린다. 볼은 벌게져가지고.

 

븅신.

한심한 새끼.

오늘밤에도 죽지 못해 산다고 짓거리면서 술 처먹다가 이 꼴 났을 거다.

 

발로 툭툭 건드리다가 가슴팍에 발자국도 내본다. 기분이 더럽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오늘 이례적으로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왜 그랬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마침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필이면 오늘 마침 503호 여자와 마주친 것이었다.

 

제일 먼저 나는 그 여자 엉덩이를 봤다. 그 다음 그 여자가 신고 있는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시선을 어렴풋 위쪽으로 끌어 올린 그 순간 503호 여자는 막연한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사달라고 엄마를 조르는 아홉 살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창백하고 조그만 얼굴의 표정만으로 자신은 지금 숲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 공주이며 한 시라도 빨리 자기 입술에 키스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목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계속 걷는다. 강바람이 매섭다.

 

 

 

 

 

(......)

 

"그냥 딱히 죽이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도, 쓸모없는 걸 쓰레기 통으로 넣는 느낌?

그냥 좀 무거운 쓰레기봉투를 들어서 난간에 기대어 놓은 다음에 종아리를 두 팔로 감싸고 그대로 위로 들어 올렸어요. 꽤 힘들 줄 알았는데 그리 무겁지도 않던데요.

가벼웠던 것 같아요.

 

시원한 느낌? 분리수거 날짜 놓쳐서 몇 주째 밀렸던 쓰레기를 드디어 내다 버린 느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쑥 하고 쓰레기가 밑으로 빠져 들어 갔어요. 다리 아래로 흘러 떨어졌어요. 깜깜해서 그렇게 자세히는 못 봤고 사실 그때의 느낌이 잘은 기억 안 나요.

 

철썩하는 소리가 꽤 오래 있다가 들렸고. 소리도 희미해서 그냥 들렸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깜깜하긴 해도 밑을 계속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무슨 형체 같은 게 보이긴 보였는데.

 

분명 뭔가가 보이긴 보였어요.

 

까만색 천 쪼가리가 물 위에 잠시 떴다가 그러게 다리 반대쪽으로 멀어지는 듯싶다가 사라졌어요.

 

가라앉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죠. 그게 그렇게 가라앉은 것 같아요.

 

저는 계속 다리 난간을 두 손바닥으로 붙잡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어요. 기억나요. 그 천 쪼가리가 사라지는 순간 손이 엄청 시렸어요.

그때 제가 정신이 없긴 없었던 게 손에 아직 그 남자 민증이 들려있었어요. 그것도 다리 밑에 강물로 던져 넣었어요.

 

그런 다음 뭘 했더라.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요.

아마도 곧 바로 주머니에 손 찔러 넣고 다리 마저 건너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 같아요. 집으로 돌아올 때의 기억은 없으니까.

그냥 그렇다고 쳐야겠죠."

 

(......)

 

 

 

 

 

커다란 벽이 나를 덮쳐온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벽은 그대로 있다. 나는 몸집이 커져서 벽을 부수는 초록색의 나를 생각 한다

 

나는 어제 실제로 일어난 일과 내 머릿속의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 본다.

 

어젯밤 내가 실제로 내가 한 일과 외부로 부터 얻은 조각들을 나도 모르게 모은 허구의 사실.

그 두 가지를 혼동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도대체 나한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뭐지.

 

담배를 다 피우고 내 방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무얼 할지 정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다 잠이 든다.

 

 

 

 

 

(......)

 

 

 

 

 

 

"그런데요. 아부지."

"지금까지 제가 한 말 사실은 다 거짓말이에요. 전부 다."

 

나는 아버지처럼 껄껄대며 웃는 것처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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