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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8 06:11

그라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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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피티

누트의 얘기를 하려고 한다. 그녀는 나의 스텝시스터가 아니다. 동일한 셀에서 태어난 자매, 그것도 한 날 한 시에 출생한 일란성쌍둥이다. 달콤하고 영리하며 악마적인 누트. 누트는 그녀의 사이버 닉네임이다. NT라는 그라피티의 태그 또한 누트의 약자이다.

사람들이 사라진다. 사라진 사람과 사라지고 있는 사람, 곧 사라지게 될 사람들로 세상은 가득하다.

아빠는 한 줄의 유서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일이 벌어진 것은 그 해 겨울방학 때였다. 여중생 하나가 교정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이들에게 그 사건은 황홀한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J포 중학교 미술선생님이었던 아빠는 사건이 일어났던 날 이른 새벽에 귀가했다.

그 일로 누트는 매일 신이 나서 이야기를 꾸며댔다. 그녀의 얘기들이 모두 사실인양 받아 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죽은 여학생의 혀가 일 미터도 더 길었다느니, 자정 무렵이면 그 죽은 여학생이 소복을 한 채 원통해! 원통해! 울부짖으며 운동장을 돌아다닌다느니······, 누트가 만든 찌라시는 메르스바이러스처럼 아이들 귀로 감염되었다. 마치 보균자의 재채기처럼 그 사건은 누트가 아이들의 주도권을 잡는 원인체 역할을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 않고 아이들은 얘기에 빠져 들었다. 전교 일등의 천재, 맑은 용모와 깨끗한 복장, 인사성까지 밝은 학교선생님의 딸이 퍼뜨리는 소문을 믿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말을 꾸며내는 우성의 유전자는 그녀의 뇌에서 세포분열을 통해 증식하는 세균처럼 활동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녀가 공부에 집중할 때면 혀를 날름거리거나 키득키득 웃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성적이 오르지 않은 나는 곧 후회했다. 쌍둥이 돌연변이처럼 그녀와 나는 뇌의 구조자체가 달랐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시간에 비례해서 소문은 부풀었다. 사람들이 슬슬 우리가족을 피하고 있다는 눈치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엄마였다. 경찰이 몇 번 아빠를 찾아 왔다. 그것은 누트의 상상력에 휘발유를 끼얹어 주었다. 경찰이란 인물이 스토리의 복선으로 끼어들게 되자 그녀의 얘기는 입체성을 확보했다. 그녀는 왜 아빠의 속옷에 혈액이 묻어 있었다고 찌라시를 뿌렸을까. 그렇게까지 상상의 극치로 치달아야 할 만큼 앞 뒤 상황 가리지 않고 주역이 되고 싶었을까.

아빠의 시신은 양지바른 둔덕에서 발견되었다. 파도에 휩쓸리다 한 달 만에 낚시꾼의 의해 신고 되었다. 절벽에서 뛰어 내린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었다.

누트를 향한 지나친 아빠의 기대가 문제였을까.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를 나는 질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빠의 플래시를 받아 보려고 찔찔 울어도 보았지만 아빠의 눈총은 늘 상 누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자연히 애정구걸을 그만 두게 되었다.

엄마는 조금 달랐지만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1등 주의만 고집하는 사회가 책임질 일이라고 외조부모마저 누트를 두둔했다. 나는 부모와 외조부모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생각을 혼자서만 했다. 그러나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한 나는 솔직하게 말할 자격이 없었다.

모든 희망을 누트에게 걸었던 불쌍한 아빠. 유별난 애정을 품은 아빠를 배신한 누트. 아빠, 나 졸려. 내가 아빠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래? 들어가 자도록 하렴. 아빠의 말이 척추에서 흘러나왔다. 얼굴을 돌리지 않고 내게 말을 마친 아빠가 누트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우리 콩쥐는 하던 공부 끝내고 자야지? 저녁 밥숟갈을 놓고 난 후 아빠의 작은 화실에서는 그러한 모양새가 벌어졌다. 누트가 한 번 아빠에게 크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십중팔구 아빠랑 공부했던 문제를 실수로 틀린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트를 최고로 성장시키는 일만이 아빠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토록 그녀를 크게 기대하고 특별히 사랑했는데 그녀는 왜 그런 찌라시를 뿌리고 다녀야 했을까. 왜? 무엇을? 누구를? 나는 그 때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그렇게 아빠를 보내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누트의 표정을 보면서 내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그랬어? 누트! 나는 그렇게 물어야 했다. 그러나 A4 용지처럼 납작한 비겁함으로 나는 침묵했고 그녀는 대답할 기회를 잃었다.

전혀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나 또한 솔직하지는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솔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고양이와 개가 등장하는 우화집에서 읽었다. 그래서 종종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였을까, 끊임없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소름은 알레르기로 변이되어 가끔 쇼크를 일으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트는 아마도 허언의 독립기관을 별도로 달고 출생한 것 같았다. 그것이 가능한 일처럼 믿어진다. 나는 모기가 파리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의 내면을 알기 힘들었다. 언제부턴가 그 누구도 그녀와 나를 트윈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얼굴은 닮았지만 표정이 달리진 탓이었다.

그러함에도 안테나처럼 그녀를 감지하는 나만의 기묘한 센스에 전류가 흐르는 순간이 왔다. 하루에 한 번 또는 일주일에 한 번, 들쑥날쑥 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숙명 같은 전류였다. 나도 모르게 두 손바닥을 전류를 붙잡듯 모았다. 인공뇌라도 이식하면 누트의 허언이 고쳐질까요? 기도를 해 보았지만, 그녀는 부모의 유전자 밖에서 태어난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깊어갔다. 아빠나 엄마는 물론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트윈시스터인 나와도 성격이 닮지 않은 누트.

*

꽤 멀고 흐린 기억이 되었지만, 아빠를 땅속에 묻고 엄마는 이민을 서둘렀다. 만약에 엄마에게 기회가 허락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호주가 아닌 남극이나 북극 언저리에 살고 있어야만 한다. 멀리, 더욱 더 멀리······ 떠나고 싶어 했다. 우리 세 모녀를 서서히 살해할 것만 같았던 치욕적인 루머들.

어린 것이 뭘 알겠느냐고 엄마는 끝까지 누트를 두둔했다. 나도 어렸지만 내 판단은 달랐다. 아직 나이도 어린 것이 지독하게 이기적이면서 욕망만 가득해서······. 내가 기억하는 한 그녀의 계획을 순순히 실현시켜 준 건 바로 엄마일지도 모른다.

영어권에 이주한 누트의 허언은 자연 박멸된 것처럼 보였다. 호주로 잘 온 것 같구나. 누트가 호주랑 궁합이 맞나보다. 불행 중 다행이지 않아, 그렇지? 라고 말하는 엄마를 나는 불쌍하게 주시했다. 죽으란 법은 없다, 라고 말하는 엄마가 안타까워 나는 조금씩 아껴가며 울었다. 안타깝게도 엄마의 안도는 단명했다. 혈액 속에서 박멸되었던 에볼라가 안구의 수액 속에 재발견된 것처럼 누트가 다시 증식활동을 시작했다.

허언에 국경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누트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혀를 날름거리거나 키득거리는 대신 츄파춥스를 쪽쪽 빨며 공부했다. 영리한 누트는 곧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거짓말! 내가 말했다. 정말이라니깐! 새아빠라니깐. 그녀가 눈을 치뜨며 우겼다. 누트가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소문을 낸 일, 그것도 이제 막 엄마와 재혼한 백인 의부가 자신을 임신시켰다고 떠들고 다녔던 일 앞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누트를 향한 엄마의 분노는 그녀를 즉각 집 안에서 추방시켰다. 그 즈음에는 나도 누트 때문에 신경이 하이에나처럼 날카로워졌다. 고등학생이었던 누트가 집을 나가고 할 일을 잃었던 나는 난생처음 공부에 눈을 떴다.

누트의 소식은 겨우 소문으로 듣고 알고 있는 정도였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자유인이 되었다.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신경을 곤두세우던 이른 새벽이었다. 모르는 번호가 스마트폰의 액정에 떴다. 폰의 액정을 열기 전에 어째서인지 창문을 열고 하늘을 한 번 올려보았다. 오목하게 모은 두 손안에 뻔쩍, 번개가 저장되었다. 전화기 아이콘을 밀어 늘렸다. 누트가 스프레이페인트를 훔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불길한 소식을 축축한 목소리를 가진 청년이 전했다. 가련한 그녀는 처음으로 트윈시스터인 나에게 전파가 아닌 사람을 시켜서 소식을 알려온 것이었다.

페인트를 훔치다 누트와 함께 구속된 그라피티스트들은 몇 달 동안 풀려나지 못했다. 특출한 재능의 소유자인 누트만 삼일 만에 경찰서 정문을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나는 그녀를 끌고 한국촌의 순두부백반집으로 갔다. 경찰들이 멍청하다니까. 그녀가 순두부를 한 입 떠 넣으면서 말했다. 언니, 무슨 수로 경찰을 속일 수 있었지? 거짓말 탐지기는 없었어? 나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젓가락 두 짝으로 입술을 나란히 눌렀다. 남다른 재능의 그녀가 쏟아 놓을 매끄러운 말에 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누트를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센트럴 앞을 지나는데 팔과 목에 불루드래곤 타투를 한 청년이 내게 아는 척을 했다. 경찰서 유치장 입구에서 한 번 만났던 그는 누트와 눈, 코, 입이 닮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트가 밤마다 그라피티 윤색을 하고 다닌다는 타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운동화 코끝을 길바닥에 문질렀다.

그와 헤어져 나는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봄이라곤 하지만 빗방울이 얼음같이 차갑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타투 청년에게 전해들은 말들을 세찬 소나기에 씻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천둥아 울려라, 번개야 치렴, 소나기야 쏟아져라······.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보는 그 순간 호주머니 속의 폰이 진동했다. 나는 건물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텍스트 메시지는 두 번째 수신한 불길한 누트의 소식이었다. 날벼락 같은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 내 발목이 몇 번이나 접질렸다.

누트가 빌딩에서 추락했다. 퀸엘리자베스빌딩에 기어 올라가 그라피티 윤색을 하려다가 경찰의 출동을 받고 뛰어 내렸다. 3층의 타원형 지붕에서 떨어진 그녀의 다리에 금이 갔다.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며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외상을 많이 입었다. 두 눈이 찢어졌고, 코뼈가 부러졌으며 입술을 비롯한 볼의 살점들이 몇 백 그램 떨어져 달아났다. 그녀는 그 기적을 성형을 관장하는 신의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갖게 된다는 기대감에 꿈자리가 어수선하다고 떠벌렸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면 다리가 금이 간 것도 살점이 떨어진 것도 대수가 아닌걸요. 그녀는 생판 낯선 육인병실의 방문자들을 붙잡고 말을 쏟았다. 어떻게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누트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나의 지능을 한탄했다. 가족과 떨어진 그녀는 그라피티가 삶의 목표가 되어 있었다. 언니,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집으로 들어와. 내 좁은 식견으론 그녀의 일탈이 외로움과 고독함 때문이라 여겼다.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굽 낮은 욕망이 판독한 오류였음이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센트럴역 앞에서 잠시 만났던 타투가 전해준 말대로라면 그즈음의 그녀는 기차나 전동차, 고속도로, 높은 탑, 고층빌딩, 경찰서 등에 그라피티 윤색을 하려고 매 순간 벼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호주의 한 그라피티스트가 자살을 했다. 호주 사회는 물론이고 지구촌의 곳곳의 인간들이 그 사건을 놓고 갈라지고, 깨진 목소리를 앞 다투어 내 놓았다. 안티그라피티들은 이때라고 높은 목소리로 죽은 그를 질타했다. 소수의 옹호자들마저도 나름대로 구호를 부르짖었지만 다수에 밀려 논쟁에서 죽어들었다. 그러함에도 누트의 행위는 점점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심심찮게 다치거나 죽는 멤버들이 생겼다. 문제는 그라피티 외에 강력한 속도감과 극렬한 에너지의 분출 그리고 극채색을 표출할 수 있는 다른 대체물이 그들에게 없었다.

무릇 누트가 도안한 문자나 디자인 중에는 가벼운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누트는 예술가 행세를 하고 다녔다. 그녀의 불타는 열정은 목숨을 내팽개쳐놓고 도전했다. 도마뱀처럼 콘크리트 외벽을 타고 상당히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갔다. 성형수술을 하던 날 누트가 지껄여대는 소리를 들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 의사는 화를 벌컥 냈다.

“의사 선생님,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최고가 되는 게 아닐까요? 그 누구 보다요!”

“아가씨, 인생에 최고란 없어요. 최선이 있을 뿐.”

트레인 바밍 하는 행위가 절벽위에 선 것 같은 상황이 도래 했다. 뉴사우스웨일스는 트레인을 보호하기 위해 쥐덫작전을 고안해 냈다. 누트를 포함한 멤버들이 자그마치 87명이나 쥐덫에 걸려들었다. 그녀가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여 경찰서를 당당히 걸어 나오면서 깁스다리를 절뚝거리며, 찢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애착하는 윤색행위 중의 하나거든. 내 그라피티가 윤색된 트레인이 하루 종일 도시를 순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순간만은 내가 최고라는 희열에 푹 젖어 있을 수 있다고. 넌 모를 거야,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그 황홀한 순간을.

바늘자국의 흔적으로 짓뭉개진 그녀의 얼굴에 텅 빈 눈물방울이 맺혔다. 순두부백반을 떠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내 흔적을 더욱 많은 장소에, 유일한 곳에, 더욱 오래 남길 수 있다면 그까짓 목숨이 대수겠어? 말끝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최상의 목표인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온통 그라피티로 윤색하는 날이 오겠지.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러 남은 물기를 훔쳤다. 티슈를 뽑아 코를 푸는 그녀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 그녀가 동공의 초점을 사납게 눈 끝에 잡아당겼다.

깜깜한 밤이면 고통으로 신음하던 뉴사우스웨일스는 적극적인 대응책을 내 놓았다. 그라피티를 제거하는 일이 엄청난 정부예산을 잡아먹었다. 190도의 적외선 CCTV 두 대를 마주보게 설치해서 사각지대를 제거했다. 적외선은 어두울수록 더 선명하게 사물을 포착 한다.

떼거지들이 상황 빠르게 페리를 타고 잠입한 곳은 ‘코카투아일랜드.’ 란 곳이었다. 호주 정착시기의 청소년 수용소 건물이었던 낡은 벽은 떼거지들에게 별천지 같은 새로운 세계였다. 누구의 신고였을까. 정보를 흘려들은 경찰이 뜰채를 들고 쳐들어갔다. 완전 포위된 그곳 아일랜드에서 그들은 황금어장의 물고기들처럼 포획이 되었다.

코카투 아일랜드에서 소식이 날아온 날은 기온이 40도였다. 산불워닝일 거라고 열어본 텍스트 메시지는 잿빛 누트의 소식이었다. 마음을 졸이며 경찰서 정문 앞에 두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새 누트의 다리뼈는 잘 붙은 모양이었다. 목발 없이 당당히 경찰서를 걸어 나오는 재능이 특출한 그녀를 순두부백반집으로 데리고 갈 예정이었다. 나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언니 많이 먹어. 그리고 정신을······, 제발.” 땀을 뚝뚝 흘리며 정신없이 순두부를 퍼먹는 그녀에게 대고 말했다.

“빌어먹을 자식이 내 스타일을 모방했어. 아니, 내 이미지를 계속 훔치고 있다고. 그라피티란 이미지가 아닌 의미가 중요한 것도 모르는 바보자식들. 그리고 누군가 내 그라피티에 디스리스팩트한 놈이 있고 말이지.”그녀가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 쳤다.

그녀가 하는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였다. 24살의 얼굴은 먼지와 땀 그리고 성형한 흉터 때문에 족히 40살도 더 들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말문이 저절로 막혔다. 그리고 대답이 필요 없는 내용뿐이었다. 그녀도 내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누트가 부활했다. 그녀를 부활시킨 사람은 정녕 호주성형외과 의사였다. 의사의 손에 달라붙어 있는 능숙함은 동양미모가 아니라 서양미모였다. 흉터자국이 완전하게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동양적인 누트가 아니라 이국적인 미녀로 다시 태어났다.

“언니의 옛 모습이 보고 싶다면 나를 보면 돼.” 변해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농담을 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생소한 몸짓을 했다. 기지개를 켜는 척 팔을 끌어올린 후 몇 번을 너울거리다 팔을 쭉 뻗어 솟구쳐 새의 활강을 동작했다.

누트의 그라피티가 블로그에 날개를 달았다. 뉴욕의 흑인 그라피티아티스트는 그녀의 그라피티에 멋진 댓글을 달아주었다. 수많은 남성들이 그녀의 그라피티에 호기심을 보였다. 어찌되었던 그것은 충분히 그녀다운 행보였고 또 그녀라면 성공을 할 것 같았다. 그 즈음 그녀가 달그락거리며 전파하는 진동이 그 어느 때보다 혼란하게 내게 전해졌다.

누트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읽어내는 투시경 칩을 머릿속에 이식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성들의 마음을 그토록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아낌없이 남성을 칭찬할 줄 알았다. 호소력 있는 언어로 상대의 감정을 움직였다. 상대의 호감을 사로잡는 마력적인 말을 창조할 줄 알았다. 그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재능을 갖고 있지 못하며, 그 재능을 누트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 방법은 온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누트만의 방식이었다.

그녀가 꾸며낸 슬픈 이야기를 들은 남성들은 눈물을 뿌리고, 기쁜 얘기를 듣고는 환상에 젖었다. 그녀와 접촉하게 된 남성들은 그녀의 말을 경청한 후 자신들의 통장에서 그녀의 통장으로 서슴없이 잔액을 이체했다.

그녀의 또 다른 재능이라면 자신의 프로필을 변용하고 가공하는 것이었다. 의사인가 하면 며칠 후 변호사, 그리고 교수·······끝없이 변신 하는 그녀.

*

누트가 사라졌다. 달링, 마이 달링·······, 으로 시작될 전화나 메시지를 기다리는 조마조마한 날들이 흐르고 있다. 집에서 쫓겨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수 없는 누트. 여름과 가을이 내 앞에서 온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남기고간 캘린더를 한 장 한 장 넘긴다. 그녀의 그라피티가 그려진 캘린더를 넘길 때마다 내 눈동자는 푸르스름하게 날이 선다.

하늘이 뻥 뚫린 방에 누워 하나 둘 셋······, 별을 세고 있을 그녀를 상상한다. 별빛이 스카이라이트에 부서질 때면 그녀는 깊은 숨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으리라. 그것은 지독하게 그녀다운 모습이다. 최근에 만났다는 그 남성의 방에 누우면 욕망보다 많은 별을 셀 수 있다고 자랑을 했었다. 미역 같은 머리를 풀고 누워 별을 세는 그녀를 상상할 때만은 나도 행복할 수 있다. 그녀가 세는 별들이 내 손에 한 개 두 개 잡힐 것도 같다.

내게는 우울한 보라색 아픔이 남아 있다. 그날, 누트는 할 얘기가 있다며 내 팔을 세차게 잡아끌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찾아 헤매던 완벽한 남성을 만났다고 미소 짓던 그녀. 푸르스름한 영상을 남겨놓고 사라진 그녀와 함께 먹었던 저녁. 온통 보라색 계열의 치장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던 누트. 미역줄기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머스크향이 진하게 풍겼다. 그러나 그녀는 조갈증 들린 표정으로 간간이 생수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인도 위에서 스마트폰을 켰다. 달리는 자동차 안의 남성들이 핸들을 꽉 잡은 채 누트를 힐끔거렸다. 액정을 밀어 내 앞에 들이미는 그녀에게 와우! 멋진 사람이다. 나는 해처럼 눈꺼풀을 둥글게 벌리며 감탄해 주었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을 야성적이었지만 입가는 온순해 보였다. 옅은 갈색의 머리칼, 사십대 초반의 싱글······. 그 남성의 프로필을 자랑할 때 가와사끼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오토바이의 굉음에 토막토막 잘리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 나는 미간을 찌그러뜨렸다. 의사······, 바다······, ······집,······, 유능한······. 들리거나 잘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 끄덕거렸다.

그날, 석양이 퍼플로 사그라지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유리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누트의 표정은 다 타지 않은 해거름 탓으로 푸르스름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자동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기, 누트가 검지로 창가를 화살처럼 쏘았다. 우리는 막 자리를 털며 일어서고 있는 사람들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테이블이 정리되기를 기다리며 벽면에 걸린 모나리자를 올려다보았다. 눈썹 없는 여자는 물어도 대답할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허기진 미소를 던졌다.

누트는 콤팩트를 열며 테이블에 앉았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집어 삼킬 듯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거울을 뚫어 보았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그녀를 외면했다. 주문지를 든 웨이터가 다가왔다. 핸드백의 루이뷔통 로고를 치타처럼 자그락자그락 긁으며 메뉴를 들여다 보는 누트. 웨이터가 볼펜을 입에 물고 침 묻힌 손가락으로 주문지 한 장을 넘겼다. 누트의 눈꺼풀이 메뉴의 순서를 따라 아래로 감겼다. 나는 손바닥을 문지르며 그녀가 착용한 그라피티 상표 브라운브레스에 눈길을 옮겼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광선에 그녀의 핸드백로고가 반짝 빛났다. 나눈 진품 같은, 아니 진품보다 더 돋보이는 그녀의 핸드백을 째려보았다. 엔초비, 모짜렐라, 올리브······, 엔 페퍼로니. 그녀가 손톱으로 메뉴를 톡톡 두드리며 주문했다. 나는 그녀의 긴 손톱을 바라보며 야채샐러드와 파스타를 시켰다. 그녀의 보라색 매니큐어가 불빛에 블랙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그는 완벽해, 결국 찾아냈어. 후후후. 누트가 동공을 굴리며 말했다. 나는 액정의 남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 끄덕였다. 그렇지, 완벽해 보이지? 그녀의 고개를 따라 별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그녀가 그라피티 문양의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테이블에 탁 올렸다. 근데, 완벽하다는 것은·······, 가짜, 한마디로 짝퉁이란 뜻이야. 나는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음 낀 표정을 힐끔거렸다.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 하는 그녀, 그녀의 핸드백 속에서 장지갑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진짜, 좋지. 진짜, 진짜······, 그럼 뭐하냐! 애든 어른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짝퉁에 미치고 죽는데. 마이크로웨이브 안에서 터지는 팝콘 같은 그녀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창밖으로 굴러가는 바람결을 만지려고 손을 내밀었다. 유리창에 내 손이 탁 아프게 부딪혔다.

진짜? 진짜 좋아하네. 너, 사막 한가운데 살고 있는 진짜 호주 애보리진을 좋아할 수 있어? 족장의 아들, 순수의 왕자. 그랑 너 섹스 할 수 있겠어? 검게 탄 피부, 제멋대로 자란수염, 발톱은 마치 코알라 같은······.

단정을 짓고 하는 누트의 말에는 사실 답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꿈꾸고 상상하는 세계가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그녀에게 자칫 토를 달았다간 대판 싸움만 벌어질 것이 뻔했다.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있냐고? 물개섬에도 물개는 이제 더 나타나지 않거든.”

“그럼 언니가 만난 그 완벽한 남자도 가짜야?” 나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아니. 그 남자는 내가 만난 완벽한 남성중에서 가장 탑이야. 다르다는 것이지. 나를 능가하는 완벽한남성이라고나 할까.” 누트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리다가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나오는 말을 참았다.

“잘 생겼다는 것은…, 같은 일을 하고도 잘생긴 사람이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녀가 콧소리를 냈다.

“······”

“흠 흠 흠…후광 효과란 거지. 잘생긴 남자 보면 너도 감동 팍 먹잖아. 전염성 강한 아메바처럼, 지폐다발처럼 말이야.” 그녀는 게슴츠레 감고 있던 눈을 반짝 치떴다.

누트가 공상의 시위에 활줄을 당겼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 일이 일어 날 수 있는 것까지 구체적이고 완벽하게 조합한 후에 활줄을 놓는 누트의 상상력. 자신의 뇌가 스스로 기억을 조작해서 자신이 만든 공상의 세계가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그녀와 말을 주고받는 일에 넌덜머리가 났다.

웨이터가 나타났다. 피자와 파스타를 양손에 들고 있는 웨이터에게 누트가 동그랗게 입술을 말아 내밀었다. 그녀의 입술이 풀리면서 가공된 미소로 변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웨이터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가 그를 향해 윙크를 했다. 보랏빛 입술에서 금방 휘파람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나는 파스타를 시계방향으로 포크에 말면서 그녀를 응시했다. 피자를 한 입 베어 물 때 그녀의 별 모양의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내 눈에 비친 그녀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피자위의 엔쵸비 한 줄을 집어 먹고 손가락을 쪽쪽 빨며 말했다. 끈끈한 타액이 그녀의 손가락에 기름처럼 반들거렸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 나는 게임처럼 내 삶을 창조해 갈 뿐이야.”

그녀의 표정은 황홀한 나르시스에 빠져든 한 마리 치타 같았다. 충동적이고, 즉흥적이며, 장난기까지 끼어든 그녀의 상상력 넘치는 말을 나는 귀담아 듣지 않은지 오래였다. 혼자 질문하고 스스로 응답하는 나의 영원한 시스터인 누트여! 나는 아려오는 명치를 몇 번 문질렀다.

입술을 닦은 누트가 가방을 집어 들고 레스토랑의 뒷문을 밀쳤다. 계절풍이 그녀의 옷자락을 펄럭 뒤집었다. 책상다리를 하고 소파에 앉은 그녀가 핸드백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서 천천히 연기를 뿜어냈다. 비스듬히 지나가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입을 뗐다. 연기가 창문으로 빠져나가며 창가에 걸터앉은 내게 몰려들었다.

너는 내가 나쁜 사람으로 보여? 누트가 말했다. 나한테 왜 그걸 물어보는데?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왜 너는 사람을 마치 거짓말쟁이처럼 쳐다보느냐고? 말하는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언니는 미친 것이나 다름없어. 아빠도 언니가······.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혓바닥 밑으로 감췄다. 내 분노는 언제나 그녀 앞에서 A4 페이퍼처럼 납작하고도 비겁할 뿐이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누트가 벌떡 일어서서 동시성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허니, 나의 허니. 그녀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몸을 감싸 안았다. 아빠 얘기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마. 그때 나는 언니의 뺨을 한 대 갈겨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손목조차 올리지 못했다.

스위티, 사람들이 나를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알잖니. 내 어깨를 감싼 그녀의 눈 꼬리가 날카롭게 일어선 것이 상상되었다. 그녀가 소파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으며 성난 표정을 숨겼다. 내가 판단하는 누트는 동전의 양면, 악어의 각갑과 속살, 음각과 양각, 빛과 어둠, 조개껍질과 혀, 낮과 밤, 그늘과 양지······, 웃음과 분노를 한 얼굴에서 동시성으로 연기 할 수 있다. 내가 죽었다 환생한다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녀의 재능 중 하나다.

너까지 내 말을 믿지 않겠단 말이지. 그녀가 담배를 연달아 길게 빨아들인 후 재떨이에 놓았다. 나는 그 때 누트를 밀치고 일어설 수도 있었다.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러 지그재그로 문질렀다.

재떨이에서는 불붙은 담배가 그녀의 욕망처럼 길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담뱃불처럼 달아올랐다. 나는 그녀의 흰자위에 번진 실핏줄만 힐끔거렸다. 담배를 집어든 그녀는 조각상처럼 꼼짝하지 않고 연기만 뱉어냈다. 나는 창턱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팔짱을 끼고 담배피우는 허영의 조각상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트가 담뱃재를 비벼 끄고 일어섰다. 공중돌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그녀가 소파걸이에 손을 짚고 바닥에 원을 그리며 한 번 돌았다. 톡톡 치마에 떨어진 담뱃재를 털었다. 제비꽃 빛깔의 원단이 고급스럽게 물결을 일으켰다.

차례로 한 짝씩 구두를 벗은 그녀가 마치 치타처럼 훌꺼덕 소파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어 몸을 공처럼 만들었다. 둥글게 말린 누트는 마치 부화할 시간을 기다리는 달걀처럼 보였다. 밀폐된 그녀의 얼굴대신 그녀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트윈 시스터인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전파를 감지했다. 달걀 같은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어떤 불길한 암시를 저지하려는 몸짓 같아 보였다.

누트가 벌떡 일어섰다. 두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의 액정을 밀자 샘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액정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표정이 곤두섰다. 그 사람의 어머니가 위독하데. 완벽한 남성이 보낸 메시지야?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응. 액정속의 메시지에 눈을 꽂은 채 담배연기처럼 무의미한 음성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무심함과 가련한 욕망이 반반쯤 섞인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핸드백에서 장지갑을 꺼냈다.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는 현금카드와 크레디트카드에서 플라스틱 소리가 빳빳하게 들렸다. 종이백을 내게 던지며 그녀가 팔에 핸드백을 걸쳤다.

나는 누트가 황망히 떠나던 날 오랫동안 창틀에 앉아 있었다. 으쓱한 석양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고개가 뻣뻣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녀의 굽 높은 힐을 바라보며 나는 애먼 그라피티 백만 꾸겨지도록 껴안았다.

종이백에는 누트의 그라피티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시야에서 깨끗이 사라진 후 그것을 소파위에 엎었다. 삐죽삐죽하고 현란한 기호와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라피티는 24장 그녀의 나이와 같은 숫자였다. 톱니처럼 뾰족한 글씨들, 입체적인 기호와 그림들, 화려한 색상들······. 글자와 그림이 뒤섞인 그라피티를 내 낮은 지능으로 판독 하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의미가 뭔지, 무슨 뜻인지, 읽거나 읽지 못했다. 즉흥적이고 장난스럽고 충동적인 역동성이 그녀와 닮아 있었다. 그것들로부터 그녀의 울부짖음 과 함성, 절규, 폭발이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별모양 위 NT를 손톱으로 긁어보았다. 도무지 긁어지지 않았다. 페인트는 종이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그라피티는 누트의 성향처럼이나 입체적이었다. 그녀의 허위를 자르고 가두고 유혹하여 담은 판도라의 상자. 그녀가 허위성에 빠져드는 순간은 마치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연주에 몰두 하는 것과 같았다. 얼굴 표정은 농밀한 과일처럼 반들거렸다. 허구의 세계에 빠져드는 그녀의 정신에 도무지 딴 생각이 끼어들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먼저 그녀의 눈동자가 은밀하고 섬세하게 굴렀다. 그것은 그녀의 공상이 발동한다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허언을 잘 하는 우성의 유전자를 도대체 누구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그리고 누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녀를 떠나보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녀의 환상적인 모습이 영화 속 영상처럼 펼쳐질 때 나는 꿈속에서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꿈속에서 내 방안을 하염없이 날아 날아다니던 증후군의 여자는 내 시스터가 틀림없었다. 미련을 접지 못한 연인처럼 그녀는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녀의 하늘하늘한 보랏빛 치맛자락은 동색계열의 아이섀도우와 립스틱 그리고 볼연지와 마스카라······, 영락없는 한 마리 나비였다. 의식으론 누트인데 영상은 나비자체인 그녀를 꿈속에 본 날 나는 얼마간의 고통으로 신음을 토했다. 그 꿈 이후 누트의 전파가 끊어져 나는 고통스러워했다. 내 설명을 들은 한 지인은 그녀가 틀림없는‘리플리증후군’일거라고 말했다.

누트가 사라진 후 여섯 달의 캘린더를 넘기던 날. 누구세요? 대문 앞에는 한 번 만났던 청년이 티셔츠을 입고 서 있었다. 그가 청바지 주머니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놀란 것은 한겨울에 티셔츠를 입은 청년 때문이 아니었다. 호주의 젊은이들은 겨울에도 흔히 티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닌다. 나는 불루드레곤 타투의 팔뚝을 보는 순간 떠오른 기억 때문에 흠칫 놀랐다.

이것을 누트에게 전해주세요. 나는 끊어져버린 누트의 전파 때문에 민감하게 날이 서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내게 우편으로 보내왔어요. 나는 무뚝뚝하게 말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그가 운동화 코끝을 땅바닥에 긁었다. 침묵. 동양여자와 호주남자의 침묵······.나는 그의 손에서 누트의 전화기를 뺏어 호주머니에 넣고, 그리고 그의 번호를 내 폰에 입력시켰다. 나는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멀어져 가는 타투의 티셔츠에는 지푸라기가 붙어 있었다. 나는 뿌리내린 나무처럼 서서 흩어진 기억의 지푸라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염원의 새끼줄을 엮었다.

별이 보이는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직업이 의사라는 남성은 리플리증후군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시집을 읽고, 쇼핑과 여행을 즐기며, 요리가 취미이고, 날마다 외식을 한다는 그는 누트를 능가하는 리플리증후군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누트는 그를 E-하모니에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위급하다는 메시지를 전송한 것이 누트를 불러내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길 바란다. 누트의 통장잔액을 몇 분 만에 인출해버리지 않았다면 좋겠다. 그리고 누트를 속인 그가 사이버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리지 않았길 바란다. 그 무엇보다 그 남성이 누트를 살해하지 않았길 소망한다. 목을 조른다든가,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한다든가······. 지구상의 도처에 은닉된 흉악한 케이스로 그녀의 삶이 파괴되지 않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제발 다시 누트의 전파를 받고 싶다.

나는 보라색 톤으로 치장을 한다. 나는 보라색 가방을 바꾸면서 누트의 스마트폰도 챙겼다. 다. 내 몸의 나침반이, 아니 마음의 나침반이 알 수 없는 은밀한 자력에 끌리듯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지침 한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우울하거나 달콤하거나 악마 같은 추억이 뚝뚝 떨어진다.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내 스마트폰의 액정이 물소리를 지른다. 액정 안에서 미소 짓는 누트. 나는 내 가방 속에 넣어 다니는 누트의 스마트폰을 열어볼 수 없다. 어떤 비밀을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두렵다.

레스토랑의 양쪽 문이 열린다. 창에 비친 내 보라색모습을 주시한다. 사람들이 일어서는 창가로 걸어간다. 벽면의 모나리자가 입술을 달싹인다. 창문에는 흩어진 기억이 나풀거린다.

엔초비, 모짜렐라, 올리브···, 엔 페파로니 피자를 주시겠어요? 그리고 당신은 나의 트윈시스터를 기억하시나요? 이름은 누트! 기억하지 못한다. 보라색······, 오래전, 지난여름의 이브닝······. 공연히 말했다. 말하지 말아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다. 너무 늦다. 미안하지만 주문지 한 장과 볼펜을······. 그가 찍 침을 발라 주문지를 찢어 준다. 나는 반듯한 표정의 웨이터에게 윙크를 한다. 나는 피자를 먹지 않는다. 웨이터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레스토랑을 나간다.

목요일 밤의 도서관은 암호처럼 봉긋한 불들을 밝혀놓고 있다. 나는 그동안 누트의 폰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열어보지 않았다. 열어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트만의 것이었고 그것은 그녀만의 비밀의 장소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변명 같은 이유를 내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 그 안을 열어보는 일은 두려웠었다.

수십 종류의 충전기들이 암호를 여는 키처럼 열람실 벽 한쪽에 매달려 있다. 오늘 나는 누트의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세포처럼 꽂는다. 충전이 되는 동안 뮤직코너로 걸어간 나는 한 장의 CD를 대출한다. <Better be home soon>. 제목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손이가 집었다. 누트의 스마트폰을 충전기에서 뽑아 켠다. 비디오를 켜자 누트의 동영상과 목소리가 들린다.

······집이 그립다. ·······아빠 미안해요. ·······엄마가 보고 싶다. ·······내 트윈시스터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비디오를 보는 내 눈가에서 강이 범람하고 둑이 무너진다. 끝 (90매)

  • profile
    korean 2016.02.29 01:43
    좋은 글입니다.
    열심히 정진하시면 좋은 결실을 반드시 걷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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