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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0 08:09

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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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미


프롤로그

우르르 쾅. 천둥은 세상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을 깨려는지 간단없이 두드렸다. 하늘이 쪼개진다. 깨어진 틈사이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 했지만 삶이란 항상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 집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어야할 마녀 대신 그미가 있다는 것이 수정되었던 사항이었고 그래서 나는 기겁했다.


“그동안 늙은 몸으로 찾으러 다닌다고 수고 많았어.”


눈이 시리도록 젊은 그미가 말했다. 번쩍거리는 번개는 지루할만하면 비춰주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간헐적으로 그미와 나를 비추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미는 여전히 나의 12년 전 모습 그대로다. 그미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오히려 더욱더 젊어졌다. 그것을 받아들이려한지 오래됐으나 여전히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여기까지 찾아온 용건이 뭐야?”


아니꼽고 못마땅한 말투로 묻는 그미는 주름진 나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엉뚱한 화풀이까지 쏟아 부을 기세로 단단히 무장되어있었다.


“그저 내 나이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이제 마흔을 갓 넘겼는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마녀를 만나서 물어야겠어.”


그랬다. 겨우 40을 넘겼으나 흰 머리칼은 검은 머리칼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검버섯이 피어난 얼굴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80세 노파였다.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눈은 침침해서 돋보기 없이는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데다 노인의 외형을 비롯해 내부의 뼛속까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래? 이제 마녀는 없는데 어쩌지? 내가 널 얼마나 도와줬는데 이제 와서 나 몰래 마녀를 찾아다녀?”

“너는 어디까지나 나의 인생에 도우미 역할일 뿐이야. 너와는 차원이 다른 인간이라고!”


말하는 내 어깨는 부들부들 떨렸고 목소리 역시 그랬다. 기운 없이 떨리는 늙은이 특유의 음성은 카랑카랑한 그미의 목소리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이은수. 넌 어차피 늙어서 죽을 거야!”


빈정거리는 말투는 나 하나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을 충분히 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그미의 말하는 입부터 가격하고 싶었으나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지금의 처지였다.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미가 저토록 화가 난 건 내가 그동안 그미 몰래 마녀를 찾아 헤맸기 때문일까. 내가 그미를 제거한 이후 젊음을 되찾으려했던 게 그미를 화나게 했을까. 이제 그녀가 없을 새 삶을 탐닉한 것에 대한 분노일까. 오로지 마녀를 찾아서 마법을 풀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어쩐지 그미에게 못할 짓인 건 사실이었다. 마법이 풀린다는 건 그미가 소멸된다는 것의 동의어니까.


그미에게 많은 걸 의지하고 살아온 것에 대한 미안함과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허황된 욕망에 대해서도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이제 이 마법 같은 장난 그만두고 싶었다.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그러니 내 인생을 되돌려달라고, 나에게서 앗아간 젊음을 다시 돌려달라고, 이제 ‘있는 그대로’ 만족할 테니 제발 부탁한다고 말이다. 마녀를 찾아야한다. 아깝지만 나를 도와주는 ‘그미’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을 말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1.며칠 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마녀를 찾으러 다닌 지 꼬박 2주가 되어간다.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덕분에 마치 해가진 것 같았지만 밤이 아니라는 별일 아닌 일로 아직은 여유로웠다. 12년 전 마녀를 본 이후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다. 이제는 그녀를 반드시 만나야한다. 분명히 여기 어디쯤 길이 나 있어야했다. 나는 늙은 마녀가 사는 저주받은 집을 찾아가는 사연 많은 여자였다.

빵. 빵.

시속 20킬로미터로 기다시피 하는 나의 운전속도에 아까부터 짜증이 난 뒤따르던 차는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며 나를 조여 온다. 젠장. 그나저나 여기가 맞는데. 오른편에 있어야할 하얀색 바탕에 붉은색 페인트로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드립니다' 라고 쓰여 있던 집은 온데간데없다. 흰기와 빨간기가 어우러진 대나무 깃발이 흔들거리던 집. 반면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가 살 것 같은 과자의 달콤함이 묻어나 있었던 묘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2부. 12년 전, 매혹의 결탁

와이퍼작동이 무색할 만큼 줄기차게 퍼붓는 비는 강력했으며 대단했다. 나는 부산외곽으로 달리고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 주 토요일까지는 고객의 손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옷을 그만 놓쳐버리고 있다가 금요일인 오늘 가져다주기 위해 서둘러 백화점을 나온 길이다. 차안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는데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 때문에 창문을 열수조차 없었고 이 차가 습기를 제거하는 기능을 이미 잃은 지 오래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안다. 어린아이를 다루듯 살살 다뤄야할 만큼 내 오래된 차는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 예민하기까지 했다. 죽기직전에 숨을 꺼이꺼이 들이마시며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의 모습처럼 늙은 차는 평소 같지 않게 다른 소리로 달달 떨리나 싶더니 곧이어 잠잠했다. 마치 힘들어서 더는 못가겠다고 시위라도 하듯 그렇게 늙은 차는 더 이상 줄게 없어 보인데다 애만 태우는 못난 차였다. 도착하려면 아직 3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자고 이 차는 이렇게 말썽을 부리나 싶은 게 지친마음에 더한 시련을 주었다. 나는 비가 오는 차안에 멈춰서 등을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잘 지내고 있냐? 통 연락이 없는 거 보니……. 아니다. 바쁜 것은 좋은 거다. 아무튼 젊은 날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아껴 써야지. 나는 자나 깨나 니 걱정이다. 늙으니 눈물만 앞서는 게 자꾸 인생이 서럽구나.’ 로 시작된 아버지는 결국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밥은 잘 챙겨먹는지, 객지 생활이 힘들진 않은지, 혼자서 잘 꾸려가는 모습이 대견하다는 식에 대한 나의 신상에 대해선 궁금해 한 적이 없다.


콘솔박스를 열어 보험 가입서를 꺼내든다. 전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차근차근 누른지가 벌써 세 번째다. 네트워크망을 벗어났다는 빨간 글자가 연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오늘은 전화기마저 내편이 아니었는데 이 고비를 넘겨야 할뿐이라고 소리 없이 외쳐댔다. 살면서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팽팽한 고무줄처럼 그저 버팅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줄이 더 팽팽해진다면 끊어질 일만 남았다는 절벽 앞에 선 인생이었다. 아슬아슬함만을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는 점에서 빤한 인생의 종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때 어렴풋이 불빛이 비쳐오는 외딴 집이 보여서 우산을 받쳐 들고 거기로 향했다. 유선전화라도 빌려 쓸 요량이었다. 쓸쓸하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 외딴 집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따뜻해보였고 어린아이의 요람처럼 안락함이 깃들어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집인데도 똑같은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한 것처럼 익숙함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경우 바른 나는 초인종이 없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초인종을 누르진 못했다. 그 바람에 무례하게 보였을 것이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물에 젖은 발로 집안을 내딛으며 주위를 휘 둘러본다. 현관 입구로 들어서자 커다란 액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높은 책장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었다. 선녀가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이 담긴 액자에 시선이 멈추었다. 가까이 다가가 바라본 선녀는 다름 아닌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선녀였다. 삶의 고단함을 무겁게 짊어진 모습이었다. 하늘로 오르기를 간절하게 희망할 뿐 올라가지는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이 스며들어있었다. 그 옆에 보이는 책장에는 전문서적일 것 같은 책들이 즐비했다. 표지에 걸맞지 않게 제목들은 하나같이 ‘에로스와 프시케’, ‘라푼젤’ 등 어린이들이 볼 법한 책들이었다. 무심결에 펼쳐든 책들은 온통 내용 없는 백지였다. 갑자기 등줄기에 얼음물을 끼얹는 듯한 전율이 일었다. 요상 야릇한 느낌은 이내 내게 말했다.

어서 도망가!


“누구요?”


뒤돌자 바투 다가선 낯선 여자를 보며 나는 기겁했다.


“저기 저 차가 아가씨 차로군. 그래 어찌 알고 왔소? 누구소개로 온 거요?”

“네?”


그녀의 얼굴은 뭐든지 넘쳐났다. 화장기도 넘쳐난 데다 탄력 잃은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온갖 삶의 풍파를 견뎌온 것처럼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역동적인 꿈틀거림이 그 얼굴에 가득 들어차 뭐든지 넘쳐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당황한 나를 여유 있는 미소로 바라보며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은 흡사 점집과 다를 게 없었다. 아까 그녀가 말한 누구소개로 왔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녀는 내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기도 했고 속까지 속속들이 살펴보겠다는 듯 잠자코 꿰뚫어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래. 그렇게 힘들게 살아도 별 볼일이 없지? 백화점에서 죽어라 12시간 일해도 만날 그 일에서 헤쳐 나올 수 없을 테지. 가방끈이 긴 것도 아니니 실력으로 승부를 볼 수도 없고. 부모가 힘이 있으면 또 모를까. 자네도 답답하겠구만. 그렇지만 영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안 그래?”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한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긴 나는 고개를 디밀었다.


“자네는 복 받을 것일세. 하긴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제 하늘이 복을 줄때도 되었지.

최근에 아버지가 눈 쪽이 많이 안 좋아지셨네.”


대기 중 먼지라도 좇듯이 흐릿한 초점으로 점쳐 보듯 중얼거렸다. 이 여자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까? 힘들어도 점집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던 나는 기꺼이 감탄하고야 말았다. 최근에 아버지는 당뇨망막증으로 힘들어했다. 그 결과 수술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서로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수술은 엄두도 못내는 형편인데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곁에서 정성을 쏟아 보답할 수도 없었다. 무형의 족쇄는 발목을 움켜쥐고 어느 것 하나 허용하지 않았다.


“아가씨는 인물도 훤하니까 다른 애 말고 아가씨와 똑같이 생긴 인간으로 주지. 이제 그 아이가 대신 돈을 벌어다 줄 거야. 시간도 많아질 거고. 아버지에게 효도도 할 수 있을 테고. 어때?”


내 외모에 대한 호평은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임에 틀림없었는데 철없는 나는 어김없이 기분이 좋아 붕 떠올랐다.


“저와 같은 인간이요?”


터무니없단 생각이 들면서도 솔깃했다. 그냥 넋두리하며 위로를 받고 돌아가는 곳이 절대 아니었다. 잘만 되면 인생 역전의 기회가 바로 코앞에 있는 거나 진배없었다. 이 여자는 미지의 세상 문을 먼저 열어본 자의 통찰을 가진 게 분명했다. 나의 신상에 대해 이처럼 정확하게 말하는 이는 나를 제외하고는 없을 것 같았는데 그녀는 남달랐다. 피부결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래가루를 붙여놓은 것처럼 오돌토돌 소름이 돋았다.


“여태 남들 고생할거 다했으니까 이제 좀 쉬면서 연애도 해야 공평하지. 안 그래?”


그녀는 관용을 베푸는 가진 자의 모습처럼 너그럽기까지 했다. 희망이 없던 삶은 언젠가는 나를 팔아야 하는 순간이 오리라고 속삭였다.


‘그래, 지금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거야. 이것은 기회야. 기회는 예기치 않게 오는 법이니까. 의심할 것도 없어. 당황하지말자. 여태 고생했으니 이제 좀 누릴 만도 하지. 누군가 그랬잖아. 삶에서 기회와 행운은 우연하고도 예기치 않은 순간, 그러니까 지금 같은 순간 찾아오는 법이라고.’


결핍이 많은 현실 앞에서 공짜가 주는 찜찜함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주면 손을 쭉 빼고 덥석 받는 버릇이 내게도 있었다.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불공평했던 삶에 예기치 않은 행운은 오히려 이제야 공평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불행했다고 여겼던 인생에 대한 안달은 이런 식으로 해소될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열악한 상황은 더한 궁지로 내몰린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해 성급히 결정지었고 인생을 우습게 본 죗값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따르릉.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감으려다 화들짝 눈을 치켜뜬다. 여느 아침과는 다른 아침이었는데 종일 잠만 자대는 그녀가 생겼다는 게 10분의 잠마저 달아나게 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제부터 너를 그미라고 부를게.”


‘한 가지 조심해야할게 있어. 이 사실을 누가 알아서도 안 되고 말하는 순간 너는 죽게 되니 입조심해야 해. 명심해.’


나는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 잠시나마 부르르 떨었다.


3부. 영혼을 헌납하고 얻은 것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또 한해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미와 지낸지 8개월도 넘었다. 그간 그미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매출은 본사에서 상위권을 향해 내달렸다. 그 바람에 우리 매장은 특별 보너스까지 받게 되었으며 그 돈은 아버지의 눈을 밝혀주는데 일조했다.


“은수야, 우리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 갈까?”

“무슨 이사? 부산시내에서 여기만큼 싼 곳도 없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미는 자랑스럽게 통장 잔고가 보이도록 내민다.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돈이 어디서 났는지 물었다.


“그 동안 인센티브 받은 것도 있고, 실은 이제 월급매니저가 아니야. 매장도 여러 곳을 관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자신도 생겼어.”


그미의 능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미가 성장하는 만큼 나를 통제하려는 건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우리 사이는 점점 그렇게 부정적으로 흘러갔다.


햇살은 금빛가루를 뿌려대며 따사로웠다. 화창한 날씨 때문에라도 상쾌해야할 아침이지만 피곤했다. 한층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던 나는 탄력적인 그미가 문득 부러운 순간이었다. 정신 차리기 위해 샤워하러 화장실로 들어간 내가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봤을 때였다. 생리기간이 아닌데 붉은 석류를 쪼개놓은 듯 쓰다 버린 생리대가 보란 듯이 펼쳐져있었다. 그미가! 이것은 사건이다. 그녀는 피도 없고 먹지도 않는다. 따라서 아픔도 모르는 일종의 나의 탈을 쓴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다. 그에 반해 내 모습은 어쩐지 한층 늙어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다 에이, 설마 했다. 그러면서 거울 속 나를 응시했다. 다행히 밤잠을 설쳐서인지 눈 밑에 시커먼 수면부족의 증거 빼곤 여전했다. 따라서 조금 늙어 보이긴 했어도 잠을 충분히 잔다면 거뜬히 회복될 수준이었다. 평균이상의 미모도 여전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 조건은 그나마 내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미도 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친다면 나만 그미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미가 집을 살만큼 돈을 벌든 내가 말아먹을 만큼 돈을 써대든 그미에게 미안해하거나 지나치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프다. 아픈 것은 내가 아니라 그미였다. 전에 없이 열이 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저체온이었다. 하기야 그미는 인간이 아니니까 뭐든 인간 기준으로 뭔가를 비교하면 안 되었다. 급기야 한자리수를 기록했다. 8도.


먹지도 않고 싸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거라던 마녀의 말은 뭐하나 맞는 게 없었다. 이러다 그미가 죽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잠시나마 나의 안위를 점쳐보게 된다. 그미가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기대 심리와 반대로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나까지 영혼이 찢어발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심리로 우왕좌왕했다.


4부. 죽도록 살고 싶어.

하늘은 파랗고 산은 주황빛으로 물드는 가을이었다. 다음계절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게끔 비는 시원스레 한차례 내렸고 어김없이 날씨는 서늘해졌다. 다시 한차례 비가오고 나니 다가올 계절에 발맞추기라도 하듯 결국 쌀쌀했다. 그미가 완벽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없는 사실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지난날이었는데 그래서 그미를 통해 전부를 얻었다고 여겼는데 착각이었다. 나의 소중한 젊은 날은 몇 푼 안 되는 돈과 바꿔치기한 인생이 되어버렸고 늙어가는 나는 점점 불안했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일까. 이제 그미가 내 삶에서 사라지기 바랐다. 그렇다면 그미가 사라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어보였다. 그런 생각들로 어지럽던 내가 그미의 핸드폰의 메시지를 몰래 들여다보고는 기겁했다.


-이제 당신의 몸속 일정부분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곧 이은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


- 걱정하지 마세요. 열이 떨어지는 병치레는 조금씩 인간의 형태로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위해 아픈 게 아니라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듯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이 그렇게 거듭나는 중입니다. 또 하나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한층 늙어가는 이은수의 모습과 어느 정도 상관있습니다. -


-이은수 나이 29세, 혈액형 A형. 내향적인 성격이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책임감 있으며 주도적인 면도 강합니다. 물론 주도적이다 보니 인내보다는 끈기가 강한 사람입니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도약을 꿈꾸는 자로서 당신에게 적격입니다. -


가슴이 주저앉으며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괴기한 불안과 두려움이 어려 있는 메시지였다. 컬러풀하게 어룽거리던 집안 사물들이 삽시간에 색을 잃어버리고 퇴색된 회색빛이었다. 후각을 잃은 짐승처럼 어떠한 냄새에도 무감각했고 그저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새하얗게 질려 이성은 마비됐고 이내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순간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다. 영혼이 파 먹혀 가도록 이은수의 주인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나의 가슴속에는 악의가 무방비 상태로 스며들었다.


‘침작해지자.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았던 삶에 악심을 가지고 나타났다 하더라도 참을성을 잃지 말고 나는 내가 지켜야 해.’


나를 지킬 사람은 오직 나였지 그미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뿐이었다. 순간의 욕념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라도 다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일단 그미는 내 생명을 앗아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미와 맞서야 할 때였다.

 

5부. 인간세계의 신분증 소멸.

마녀를 찾으러 다닌 지 꼬박 3주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어야할 집이 온데간데없다는 사실을 3주째 확인받는 게 전부였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폐경을 맛봐야했으며 염색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외출할 수없는 추락한 나약함만을 가지고 오늘도 나섰다. 바람이 불든 말든 상관없이 무릎뼈마디마디가 쑤신 데다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거려서 화장은 꿈도 못 꾼다. 검버섯은 군데군데 피어나고 쇠한 기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찾던 집을 보았다. 허름해질 법도 한 그 집은 마치 요술을 부린 것처럼 재현되었다. 29세였던 아가씨가 이제 늙은이가 되어서 찾아왔지만 나를 못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은 없다. 그들의 장난으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저기요.”


현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액자를 바라보고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승천을 하기위해 몸부림치던 선녀는 다름 아닌 나 이은수였다. 간절하고도 애처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선녀의 눈은 하늘어딘가를 향해 시선을 두었지만 이미 글러 먹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 그림이었다. 빠르게 지하세계로 빨려들어 갈 것처럼 보이는 무거운 다리는 푹푹 꺼지고 있음을 진행하듯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저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선녀는 내가 아닐 거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나 이은수가 확실했다. 영원한 고요와 번뇌 속으로 침잠하려는 것처럼 쓰라렸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비탄과 회한을 느끼기에는 아직 일렀다.


“에로스와 프시케, 라푼젤, 쌀 한 톨의 비밀, 그리고 그미…….”


내용 없는 책들이었다.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책들. 그미가 처음 내 곁에 왔을 때도 껍데기였던 것처럼 이 집의 많은 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책의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유 없이 나와 그미를 연상시키는 그 책을 끄집어 들었다.


⌜그미⌟


젊은 여자의 역동적 삶을 그린 이야기로 도약의 끝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마는 위험을 모르는 자의 위험수기 또는 모험수기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위험을 모르는 자가 가장 위험한 법인데 그 주인공은 거기에 딱 들어맞는 인물로 자신의 영혼을 바치고 짧은 인생을 과감하게 마감하는 여자였다.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 여주인공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나와 동일했다.


날카로운 화살이 정수리를 관통해 쪼개놓고야 만다.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들이라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탓에 이제는 내 영혼이 희생되어야할 때였다. 내 삶을 지키기 위해서 했던 모든 결정들로 인해 내 삶으로부터 버림받을 차례였다.


우르르 쾅.

마치 육중한 쇳덩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세상 전체를 뒤덮었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어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주의력을 잃고 말았다. 마녀가 머물고 있을 방안에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왔다. 천천히 그곳을 주시하며 걸어가는 발걸음이 죽음으로 향하듯 무겁고 멀기만 했다. 긴장은 탄성을 가진 고무줄처럼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미와 마주한 순간 팽팽했던 고무줄은 회초리로 쳐 내리듯 탄성을 잃은 채 튕겨져 나가 떨어졌다. 그미를 보자 망연자실했다.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기실 희망이 없었던 시절보다 더 힘겨웠다. 그미와 나는 이제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고 죽음 같은 침묵 앞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 이렇게 죽음 앞에서 무력해도 되는 거냐고, 이렇게 모든 것들이 허망했느냐고 가슴에 대고 물어보았다. 그미의 눈빛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삶이 그런 거라고. 그렇게 살다 죽을 인생을 두고 처절하게 투쟁했노라고. 그것이 우리네들의 삶이라고.’


마치 나라는 사람을 본보기로 해 인생을 통째로 배워서 다 알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이은수 너는 실패자라고. 그미자신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눈빛으로. 이제 걸음마를 뗀 초보자가 죽어가는 실패자를 바라보며 거울삼겠다고.


“어차피 비가 많이 오니까 여기서 자고 가. 나도 여기서 잘 테니까. 마녀는 더 이상 오지 않아. 기다리지 마.”

“나는 이제 얼마나 살게 되는 거야?”


그미는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는 사실이 어쩐지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됐고 불안했다. 이대로 잠들어서 눈을 못 뜨면 어쩌나 싶은 게 아직도 삶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었다. 요행과 요령으로 눈치껏 살아왔던 운 좋았던 자의 최후는 보잘 것 없어도 무관했고 그만한 특혜에 감사하기는커녕 죽음 앞에서 발작하는 망종의 인간으로 낙인찍혔다.


“네가 죽고 나면 강아지 한 마리 기를까 해. 이은수로 살면서 사람보다 짐승이 훨씬 좋은걸 알았어. 인간을 알면 알수록 고양이나 개가 이뻐지더라고. 내 말 이해돼?”


그미는 깜깜한 방에 누워 있다가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서 나의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삶을 구겨지게 했던 인생의 주름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미는 나를 이해하고 있을 것이고 나는 그미를 이해해야했다. 이해한다고해서 존중한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개와 고양이 보다 못하다는 말은 어째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호응하기가 불편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실컷 연애도 해야지. 아직 넌 젊은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아.”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갈 거면서 그동안 그미에게 고마웠다고 말 한마디 할 줄 몰랐던 나였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한때의 꿈처럼 짧은 생이었으나 고마웠다고, 실은 네가 있어 외롭던 삶을 의지하며 잠시나마 행복했노라고 말할 용기도 사라졌다. 더하여 너무 인간을 싫어하지 말라고, 짧은 생을 미워하다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나처럼 이렇게 살다가 뒤늦게 후회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존중하지도 않았던 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미에게 자발적으로 준 것이 없었다. 생명은 자발적으로 준 게 아니라 뺏긴 거나 진배없었기에 흔쾌히 준 것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은수야.”

“응. 은수야.”


나는 그미에게 내 이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하나였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도 그미의 모습은 행복해보였다. 이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젊은 날 그토록 이은수의 처지와 상황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미는 그저 이은수가 될 수 있음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결국 나라는 사람은 만족을 몰랐기에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집착과 사랑은 일종의 분노가 아니었나 생각하게끔 했다. 나를 파괴했던 것은 관대하지 못했던 세상도, 그미도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세상의 틀 안에서 성공을 부르짖으며 필사적이었던 나는 나 하나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되어 있지 않았던 무지한 사람이었다. 무지는 죄였고 그 죗값을 치르려고 이 자리 이렇게 그미와 나란히 누워있었다. 회색 잿더미를 뒤집어 쓴 머리칼처럼 인생도 회색빛으로 퇴색되었다.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우리의 게임은 어느새 막바지로 향했다. 어둠 뒤에 빛이 있다고 했던가. 이제 빛에 가려진 어둠이 나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눈이 감긴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난다.


에필로그.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사람 온 줄도 모르고.”

“어머, 오셨어요? 장부 보느라고 정신이 팔렸어요.”


능숙하게 고객을 맞이한 나는 예전으로 돌아와 일상을 이어간다. 불만족스러워했던 예전과는 분명 다른 예전이었다. 이 일에 이력이 날만도 하겠지만 이제 더 이상 지겹다느니 삶에 있어 불공평을 문제 삼는 일은 어리석은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힘을 갖지 못해도 외롭고 힘을 가진들 외로움 피할 길 없었다는 점에서 오십소백 [五十笑百]인데 말이다.


원하는 것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아 영혼을 지불해가며 가졌던 것들이 의외로 불행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안될 것 같아 움켜쥐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것들을 놓아버리자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미는 내가 수용할 수 없었던 어두운 부분의 또 다른 나였다. 그미와 내가 대극을 이루고 있었으나 결국 그것은 한 뿌리에서 나왔던 것들이었다. 이제 그미이자 이은수인 나는 다시 주어진 일상에 대해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살아있으니까 그것으로 족했다. 이제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창밖에는 쏟아지는 햇살을 무차별적으로 공격받아도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고통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아진다면 마녀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어질 것이다.

                                             

끝.

황민정

연락처 010-7336-0057

이메일 lhmj0128@naver.com

  • profile
    은유시인 2016.06.30 01:57
    열심히 정진하시면 좋은 결실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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