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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오 dbsxogud7@naver.com 010-9107-0868

상상(狀想) - 형상을 생각하다

 

저것은 배수관이다. 배수관이 확실하다. 잡풀이 무성히 자란 아파트 뒤편에서 보인다. 세찬 비 때문에 안경 너머 세상은 흘러내린다. 건물 밖으로 길게 늘어진 배수관이 뜯겨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 뒤가 뜯긴 배수관은 높은 곳에서 녹슨 입으로 물을 뱉는다. 바닥에 나뒹구는 배수관을 빗물이 두들기는 소리가 퍽 경쾌하다. 뜯어진 배수관 안에는 물이 차있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달린다. 양 손으로 의미 없이 머리를 가리며 배수관이 뜯겨나간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간다. 비 내리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아침에 교인들에게 우산을 줘버린 것을 생각한다. 비는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내리기 시작했다. 문 밖을 보던, 전체가 다섯 명 남짓한 교인들은 나를 돌아보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만약 다음 주 주일까지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하나 있는 정장을 말릴 수 없겠지. 정장이 아닌 옷으로 강단에서 말씀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뜯어진 배수관을 생각한다. 오 층짜리 구식 아파트라 배수관을 바깥에서 미장하지도 않았고 이미 녹슨 지 오래였다. 세찬 비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진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애초에 떨어져나갈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비실을 찾아갈까 고민했지만 경비실에 사람이 있던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찌 됐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거 하나 떨어져 나간다고 더 크게 낡아 보인다거나 불편하지도 않을 테니. 누가 이 아파트 뒤편을 지나가다 배수관에 넘어지지 않는 이상, 저 상태 그대로일 것이다. 이곳의 이웃들은 얼굴보기가 상당히 힘든 사람들이다. 계단식 아파트에다가 원체 주민이 적기도 하고 거기다 아침에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활동적이지도 않다. 경비실이 아니더라도 고칠 방법은 분명히 있겠지만 아무도 그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 배수관에 넘어진 사람이 화를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중얼대며 직접 치워야 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축축한 양말을 신은 채로 화장실로 향한다. 안 그래도 비가 오면 습기가 차오르는 십 평 남짓한 바닥은 내 양말이 닿자 물자국이 번진다.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이 근처 초등학생들이 자주 치던 장난이라 무시할까 했지만 혹시 모르니 현관으로 향한다. 현관문에 난 유리로 밖을 보니 하얀 천 같은 것이 보인다. 내가 누구냐고 물으니 새 이웃이라 대답한다. 아마 이 아파트에 대한 적응이 부족한 사람 같다. 아직 이곳에서 어느 아파트 주민도 만나보지 못한 게 아닐까. 그들 눈 밑에 깔린 그림자와 느릿느릿한 발걸음을 아직 보지 못한 듯하다.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거 없지만 일단 목사라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건가 싶은 짧은 반성을 느꼈다. 웃음이 피식 새어나온다. 고작 새 이웃이라는 단어 하나에 별 생각을 다 한다 싶었다. 그러던 중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그의 모습은 화려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하얀 통 원피스 같은 옷 위에 햇살 같은 노란 곱슬머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약하게 튀어 올랐고 그 위에 노란 고리가 머리서부터 연결되어 얼핏 보면 떠있는 것 같았다. 키는 나와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컸다. 그의 하얀 피부 위 미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이 다소 충격적이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온 무례함도 잠시 잊었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그가 반갑다면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말한다. 이벤트 회사 사람인가. 나는 그가 청한 악수를 받는다. 투박할 것 같은 큰 손은 의외로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가 차 한 잔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축축이 젖은 내 모양새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큰 손을 생각한다. 그가 웃으면서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를 거실 식탁으로 안내하고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한다. 알 수 없는 기대가 느껴진다. 나는 물로 대충 몸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그의 앞에 앉는다.

내가 그의 앞에 앉자마자 그는 복숭아차를 마시겠다고 말한다. 웃기는 사람이다. 확실히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다 마침 다 떨어진 복숭아차를 찾다니.

"혹시 모르니 다시 한 번 봐보세요."

그는 소리 내어 웃은 뒤에 말했다. 그의 확실한 어조 탓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한다. 어차피 복숭아차는 없을 테니 녹차를 내갈 생각이다. 찻장을 열어 녹차를 찾는다. 녹차가 담긴 통 옆에 복숭아차가 한 잔 만들 양만큼 들어있다. 나는 그를 돌아본다. 그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다. 기대가 조금 커졌다가 운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가라앉는다. 나는 녹차 한 잔과 복숭아차 한 잔을 만들어 그의 앞에 앉는다. 그가 고맙다고 말한 뒤 차를 두 손으로 잡고 마신다. 나는 그에게 옷에 대해서 묻는다. 조금 있다가 일하러 가야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의례적인 질문을 한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가 대답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할 것 같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교회는 잘 돼 가냐고 묻는다. 기대가 커지는 것과 동시에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흥신소? 스토커? 이 사람이 나를 찾아온 것은 의도된 것인가?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지나가다 몇 번 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말없이 차를 마신다. 밖은 줄곧 비가 내린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그와 나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듯하다. 나는 식탁 바로 옆에 붙어있는 조그만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빨래 통에 넣어버린 정장을 생각한다. 이 비가 장마라면 좋겠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는 장마. 한두 해 정도면 좋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해져 자살 하더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하시나 봐요."

멍하니 창밖을 보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나는 요새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저도 비 오는 걸 좋아해요. 비가 내리면 일이 많아지지만 신경 쓸 일이 줄어들기도 하거든요."

그의 말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교회 사람들에 대해 묻는다. 몇 명이나 되는지, 신앙심은 어떤지, 목사가 된 것에 만족하는지. 나는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여유로운 시골 목사처럼 대답한다.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조그만 공동체에서 각자의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죠. 목사가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짧은 한숨을 쉰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 뒤 목사가 되기 전에 뭘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건설업을 했다고 대답한다.

"그럼 좀 심심하시겠어요. 큰일을 그만두고 이런 소소한 사람이 되었으니."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본다. 그의 눈꺼풀 끝이 약간 쳐져있다. 식탁에 놓인 그의 두 손은 찻잔을 꼭 쥐고 있다. 찻잔에선 열기가 흘러 오른다.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생각한다. 조금은 솔직히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주 없지는 않죠. 큰 건들을 계속 얻고 성장하는 일만 남은 사업을 그만뒀으니까. 보상심리 같은 게 아직 남은 거죠."

그는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한 손으로 쥔다. 그리고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이라며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말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기대를 버리는 것이지만요."

나는 그 방법이 존재한다면 분명 사람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비 내리는 창밖을 내다본다.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릴 적 내가 보았던 아버지는 퀴퀴한 스웨터 냄새를 풍기며 서재에서 묵묵히 집필만 했던 사람이지만, 느지막이 깨닫게 된 아버지는 오직 받아드리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낮고 잔잔한 웃음소리, 씁쓸한 맛에 살짝 녹은 초콜릿. 어릴 적 잠이 오지 않는 밤, 아버지의 서재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의 무릎으로 올라오라 한다. 나는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들어 스탠드 불빛이 비추는 두꺼운 책들을 본다. 품에선 담배냄새가 미약하게 풍긴다. 아버지는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배를 살살 주무른다. 그래도 내가 잠들지 않으니 책상 서랍에 가득 채워진 초콜릿 하나를 꺼내 내 입에 넣어준다. 은박지에 쌓인 초콜릿은 언제나 조금 녹아있다. 끈적거리는 초콜릿을 혀로 감으며 입 안에서 천천히 굴린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자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잠에 든다. 선잠에 든 나는 그 조용한 읊조림을 듣는다. 전부 지나고 나서 기억해보니 그 말은 그만두고 싶다는 말의 여러 가지 형태였다.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러 가는 길이라고 했었나. 아버지의 차 앞을 달리던 트럭에서 떨어진 철근이 그를 통과했다고 한다. 분명 친구가 돈을 갚을 거라는 기대도 하지 않고 가는 중이었을 텐데. 그런 아버지가 왜 죽어야했는지는 철근 하나로 설명돼버렸다. 그 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와이어가 풀리고 철근이 날아가 유리를 찢고 통과. 그때 그 철근은 그가 꿰뚫게 될 그 몸뚱어리가 무엇을 하는 중이었는지 알고 있었을까. 그가 내 입에 넣어준 초콜릿에 대해선 알고 있었을까. 그럴 리 없지. 트럭기사는 철근을 와이어로 묶으면서 일을 끝맺고 마시게 될 술 한 잔 따위를 기대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겠지.

나는 울지 않았다. 태어난 것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어린 이에게 죽음이란 너무 이른 거니까. 그저 나는 서랍 속에 있는 초콜릿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해. 아버지가 유언을 남겼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라며. 나는 한동안 악몽을 꾸었다. 깨어나면 무슨 꿈인지 전부 잊어버렸다. 다만 깨어나는 즉시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 있는 조그만 옷장에서 아버지 스웨터를 꺼내 입고 스탠드를 켰다. 엄마가 정리해놓은 아버지 물건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초콜릿을 하나씩 집어먹었다. 마지막 초콜릿은 악몽과 함께 전부 비어졌다. 떠나고 나서도 아버지는 나를 위해 한동안 서재에 머물렀다.

초콜릿 드실래요? 애들 주려고 주머니에 항상 넣어놓고 다니는 거예요.”

그가 은박지에 쌓인 초콜릿을 건넨다. 그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럽게 웃는다. 나는 그 초콜릿을 받아 은박지를 벗긴다. 초콜릿이 조금 녹아 은박지에 들러붙어있다. 나는 양손으로 그것을 펼쳐 혀와 이로 꼼꼼히 핥는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바스락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맛은 씁쓸하고 부드럽다. 어딘가에서 담배냄새가 미약하게 나는 듯하다.

왜 곁에서 좀 더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빨리 떠나는 걸까요.”

나는 무슨 대답을 바란 거지. 무심결에 그도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며 그가 흘려들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는 테이블 위에 양 팔꿈치를 올리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나무로 만든 테이블은 그가 팔꿈치를 올리자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떠났나요?”

나는 대답하기를 망설인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은 아니다. 그날부터 굳어진 습관 때문이다. 새로 만난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멍청한 습관. 지금 그에게 대답을 한다면 계속 부풀어 오르던 그에 대한 기대가 이뤄질 것이라는 설레발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방금 전에, 우리 집 현관에서 광신도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신고했을지 모를 일이다. 더군다나 그가 물은 질문, 원하던 때보다 빨리 떠난 사람. 그 사람은 내게 그 습관을 남겨놓고 떠났다. 누구인지 전혀 알려주지 않고.

부드럽고 큰 손이 이미 늙은 나의 머리를 감쌀 때, 노인의 피부처럼 얇아져가고 탄력을 잃어가는 등을 두드릴 때, 나는 그의 어깨너머로 목재 단상을 응시한다. 눈물 때문에 흐릿했지만 단상은 잔잔한 조명 가운데 분명하게 서 있다. 어쩌다 찾아간 좁은 예배당 안에는 그와 나 둘 뿐이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만이 가득하다.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묻는다. 그녀는 왜 떠나려는 거죠, 왜 자식들은 저보다 자기네 엄마를 선택한 건가요. 이제 기사식당에서 한 끼로 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인가요. 당신은 목사니까 신에게 물어봐주세요. 애석하게도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를 끌어안은 채로 그저 말없이 울어댈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내 귀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내 눈은 그의 너머에 서 있는 단상에서 답을 얻었으니까. 저곳에 서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내 상황을 납득할 수 있으리라.

그는 한동안 울어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단상에 꽂혀있던 시선을 그에게로 올린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 구겨진 미간에서부터 코와 입을 따라 길게 이어진 주름이 깊게 파여 있다. 눈가에서 붉게 번진 색감과 늘어진 피부는 흘러내릴 듯하다. 그늘진 탓에 거뭇거뭇한 턱수염이 나뭇가지처럼 얼굴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누구보다도 슬픈 표정이 잘 어울린다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그가 말한다. 나는 왜냐고 묻는다. 당신이 슬퍼한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공감할 수 없어서, 그래서 미안합니다. 나는 그런 당연한 일에 미안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운 뒤 옆으로 길게 늘어진 장의자에 앉힌다. 당연하다고, 익숙하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는 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의자에 눕는다. 어지러움 때문에 세상이 멀어졌다가 다가오기를 반복하는 느낌이 든다. 내가 울었던 그의 품도, 이곳도 낯설어진다. 나무 장의자의 야릇한 냄새가 미약하게 풍겨온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가 기도를 해주길 바라는지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내 손을 부여잡고 머리 바로 위에서 기도를 한다. 가까이에 있지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스스로도 들리지 않을 아주 조용한 목소리다.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하는지를 몰라서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의 손이 떨린다. 그가 우는가 싶었지만 오히려 화를 참아내는 듯하다. 나는 잠을 청한다.

잠에 빠지기 직전에 그가 무엇인가를 가져온다. 냄비에 끓인 라면이다. 그것을 보니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장의자에 달린 짧은 상 위에 라면을 올린다. 그는 나보고 먹으라 한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찬송가집을 꺼내온다. 설마 내가 먹는 동안 찬송가라도 불러줄 건가. 하지만 그는 냄비를 들어 올리더니 찬송가집을 그 밑에 깐다. 웃음이 터져버린다. 정장을 입은 목사가 눈물범벅된 얼굴로 찬송가집을 냄비 받침대로 사용하는 꼴이라니. 그도 피식 웃는다. 그는 냄비 받침대가 없다는 얄팍한 핑계를 둘러댄다. 나는 한참을 웃다 지쳐 라면을 먹는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지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나온다. 그는 내가 라면을 다 먹자 냄비를 치워주며 오늘은 여기서 자고가라 말한다. 내가 혹시 이불이 있냐고 묻자 그가 정장을 벗어 내게 내민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불을 전부 끈다. 나는 장의자에 누워 그의 옷을 덮는다. 창을 통해 가로등 불빛이 조금 들어온다. 내일 뭘 해야 하는지, 변호사에게 해야 할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돈다. 나는 그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가로등 불빛을 본다. 하얗기도 파랗기도 한 불빛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그 또렷한 모습이 어쩐지 안도를 느끼게 한다. 나는 잠에 든다.

아침이 돼서 교인들이 나를 깨웠다. 이곳에서 뭐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에게 이 교회 목사와 같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목사라고 대답했다. 나는 주름이 깊게 파인 호리호리한 체격의 목사와 같이 있었다고 하자, 그런 목사는 이 교회에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사무실로 가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내가 꿈을 꾼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와 함께 울며 보았던 강단을 보자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이 그 강단에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 웃음이 터져버렸다. 목사도 아니었어?

조그만 교회를 지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신학대를 다녀 전도사 과정을 거쳐 목사라고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 나이에도 열정이라는 것이 타오를 수 있긴 하나보다. 기본 바탕 없이 시작한 사업을 위해 온갖 것들을 다 태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강단에 올라서는 것이 내 목숨을 연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렇기에 다른 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것이 내 스스로 납득이 되었는지도 정리해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았다. 왜 나를 떠났지, 왜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지, 무엇을 근거로 내게 양육권이 없다는 거지. 그 물음들을 되짚어 보지 않았다. 그 앞에 올라서면, 내가 단상을 보았던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그분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이니. 하지만 여전히 조그만 교회. 졸거나 심드렁한 교인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마를 짚는 것뿐이다. 비가 그치지 않길 바라면서.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앞에 앉은 이에게 기대를 건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는 내게 대답을 재촉한다. 나는 목사 행세를 했던 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가 이야기를 듣더니 자지러지게 웃는다. 나도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피식피식 흘러나온다. 바깥에서 빗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그의 웃음이 잔잔해질 때쯤 그가 나지막이 중얼 거린다. 그땐 참, 그 소리에 나는 되묻는다. 그러자 그가 말한다.

그나저나 당신이 물어본 질문을 그 사람은 이미 대답한 것 같은데요.”

나는 곰곰이 생각한다. 무슨 얘기지. 일찍 떠난 이유에 대한 대답을? 그는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한다.

그 사람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나 봐요. 당신에게 미안했던 이유처럼.”

왜인지 모르게 허탈해진다. 헛웃음을 뱉는다. 나는 다 비워진 찻잔을 본다. 차마 걸러내지 못한 찻잎이 바닥에 가라앉아있다. 그 사람과 오래 보았다면 많이 웃기야했을 텐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닥까지 내려온 그의 흰 옷이 의자에 살짝 걸린다. 그러고 보니 그는 맨발인 건가. 그가 산책을 가자고 말한다. 나는 웃으며 창밖을 가리킨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끌어당기며 운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별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가면서 신발장을 유의 깊게 본다. 그는 하얀 토슈즈 같은 신발을 신는다. 순간 아쉬운 기분이 든다.

나는 그에게 우산이 집에 없다고 말한다. 교인들에게 줘버렸다고. 그러자 그가 알았다고 대답한다. 알긴 뭘 알았다는 거지. 계단을 내려가자 빗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그는 내 손을 끌어당기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다. 우리는 내려간다. 오층에서 사층으로, 사층에서 삼층으로, 일층에 가까워질수록 빗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내려가면서 상상한다. 일층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그치고 햇빛이 아파트 단지를 내리쬐는 풍경을.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 그런 내 기대가 채워지는 순간이

올 줄 알았다. 정신없이 뛰어 내려간 아파트 현관은 호우 수준의 비가 내리고 있다. 그는 방역차를 쫓아가는 아이처럼 신나서 뛰어나간다. 두 팔을 허공에 휘젓고 날아갈 듯이 방방 뛰면서 달린다. 그가 뛸 때마다 토슈즈가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아 빗물이 사방으로 튄다. 하얀 옷이 축축이 젖어 묵직하게 흔들린다. 머리에 고정된 링은 대롱거린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손짓한다. 어서 뛰어들라 말한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도 그를 따라 비 오는 길로 나간다. 빗방울이 머리로 먼저 떨어진다. 목 뒤가 서늘하다. 곧이어 추위를 느낄 수도 없이 비에 젖는다. 비에 전부 젖은 옷 탓에 몸이 무거워진다. 익숙한 느낌. 하지만 머리를 가리진 않는다. 그처럼 팔로 공기를 가른다. 앞이 아닌 위를 달리듯 뛴다. 팔과 다리를 멋대로 휘두르며 달린다. 빗소리가 파도처럼 깊게까지 다가왔다가 조금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머리가 식는 것 같다. 그가 환호성을 지른다. 그 소리가 아파트 단지 속에서 이리저리 튕기며 돌아다닌다. 아직까지도 자고 있을 주민들의 고막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간다.

어디로 갈 거예요?”

이 앞에 국밥집으로!”

나는 큰 소리로 웃는다. 웃음소리가 그의 환호성처럼 이곳을 돌아다닌다. 이런 꼴로 국밥집이라니. 식당 아주머니가 잔소리 하겠네. 우리는 정신없이 달린다. 아파트 단지 앞 상가에 다다르자 휴대폰 가게에서 재즈음악이 흘러나온다. 그와 나는 그 앞에 우뚝 멈춰 선다. 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듯이 허공에 팔을 유연하게 흔들거린다. 나는 볼을 부풀리고 양 손으로 색소폰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놀린다. 우리는 몇 초 정도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국밥집으로 들어간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아주머니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면서 말한다. 국밥 두 그릇 주세요, 하나는 다데기 빼주시구요. 아주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생긴 건 외국 총각이 말하는 건 완전 한국 사람이구만. 그나저나 홀딱 젖어버렸네. 수건 줄까? 국밥집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전부 우리를 쳐다본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감사하다고 대답한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이 상황이 그저 우습기만 하다. 국밥을 끓이는 커다란 철 솥 옆을 지나친다. 따뜻한 김이 몸을 덮친다. 나는 그에게 이곳에 잠시 서 있자고 말한다. 그와 나의 몸이 열기에 감긴다. 아주머니가 수건을 건네주며 방해되니 자리에나 앉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자리에 앉는다. 그는 링을 잡아 위로 올리고 나서 머리를 닦는다.

그가 밥을 먹고 자신은 일을 하러 가야겠다고 말한다. 내가 다 젖어서 괜찮겠냐고 묻자 그는 곧 마를 거라고 대답한다. 허무해진다.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더니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는 떠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당신도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겁니까. 내가 그에게 다음에 꼭 다시 보자 말한다. 그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는다. 그가 성경을 전부 외웠냐고 묻는다.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구절은 외우지만 전부 외우진 않았다고 대답한다. 식사가 나온다. 따뜻한 열기가 그와 나 사이에 들어찬다. 나는 부추와 소면을 집으러 젓가락을 든다. 그가 젓가락으로 그것들을 집어 열기를 비집고 내 그릇에 넣는다. 자신의 것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는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에게 전화번호를 묻는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꺼낸다. 저는 욥기를 제일 좋아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 욥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고난을 당하죠. 신앙심이 깊고 선함에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다. 아파트 호 수를 묻는다. 그게 마음에 든다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하고 다를 바 없어서. 그가 국밥을 한 숟가락 뜬다. 하얀 국물이 입속으로 들어간다. 수저를 휘저어 그릇 안에 잠긴 밥알을 일으킨다. 나는 누구에게 물어보면 되냐고 묻는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멍청한 사람들이에요. 있지도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고민하는 꼴이라니. 그가 작은 그릇에 국물만 덜어낸다. 수저로 국밥에 담긴 밥알들을 헤집는다. 그러다 밥알을 한 곳에 모두 모은다. 나는 조금 다급해진다.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묻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본다. 내 목소리가 조금 컸던 것 같다. 그는 나를 한 번도 보질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빌닷은 자기 입으로 정답을 말해버려요. 89절에서요. 나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와 눈을 마주치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한다. 제발 대답해달라고. 그가 고개를 든다. 나와 눈이 마주친다.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그가 말하고 나서 작은 그릇을 들어 한 번에 마신다.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한다. 내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그것이냐고. 그가 웃으면서 모르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에게 묻는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가 소매로 입을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한다.

국밥 드시면 되요.”

그가 걸어서 밖으로 향한다. 나는 그에게 또 뛰어서 갈 것이냐고 묻는다. 그가 웃으며 나를 돌아보더니 한 번이면 족하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릇을 바라본다. 그가 남기고 간 밥알을 본다. 그가 입을 댄 수저를 본다. 그가 머리를 닦은 수건을 본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에 모은다. 그의 목소리로 국밥이나 먹으라는 말이 들린다. 뒤를 돌아본다. 그가 아주머니에게 돈을 건네며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다. 처음으로 그가 인상을 썼다. 내가 그것들을 제자리에 둔다. 나는 멍하니 국밥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본다. 점점 빗소리가 멎는다. 테이블 바로 옆에 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다시 뒤를 돌아본다. 그가 없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한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길을 막는다. 저 총각이 아저씨 다 먹는 거 좀 봐 달라 그러던데. 나오려 하면 좀 막아달라면서. 나는 차마 아주머니를 뿌리치지 못하고 바깥만 내다본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사라졌구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가는 듯하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간다.

햇볕이 내리쬔다. 몸이 따뜻해진다. 구름이 조금 끼긴 했지만 화창하다. 아직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거리엔 사람이 거의 없다. 매번 보는 길이지만 유난히 낯설다. 나는 집으로 향한다. 축축이 젖은 신발이 걸을 때마다 소리를 낸다. 약한 바람이 분다. 온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엄지손가락 쪽에 감각이 없다. 이러다 동상 걸리겠네.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손톱으로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꾹꾹 누른다. 아프지 않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아침에 보았던 배수관이 떠오른다. 나는 일부러 조금 돌아서 배수관이 있던 곳으로 간다. 비가 그쳤으니 다음 주엔 교회를 가야할 것이다. 만약 그가 비를 그친 것이라면 차라리 그러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와의 만남이 이게 전부라는 생각에 나는 침울해진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억지로라도 부탁할 걸 그랬나. 국밥이나 먹으라니. 그게 그렇게 짜증나는 일이었나.

아파트 뒤편에 다다른다. 고개를 든다. 눈으로 뜯어진 배수관을 찾는다. 쓰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나뒹군다. 나는 그것을 본다. 아니,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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