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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0 00:27

서재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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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불이 붙었다.

 서재에 불이 붙었다. 타는 냄새에 뒤척이다 눈을 떠 보니, 서재에 불이 붙어있었다. 문 밑 틈으로는 마치 석양처럼 보이기도 하는 주황빛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혹시 몰라 손수건으로 문고리를 감싸고 서재 문을 열었을 때엔, 재가루가 날리는 것인지 활자들이 날리는 것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화마에 휩싸여있었다. 분명 타는 것은 허연 종잇장들인데, 날리는 것은 온통 새카만 것들뿐이었다. 119에 신고할 생각도, 책을 한 권이라도 살려보려는 생각도, 그 무엇도 하지 않은 채로 아니, 할 수 없는 채로 종잇장들을 불쏘시개 삼아 더욱 치솟는 불길을 가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책이 삐뚤빼뚤 꽂혀있기에 내일 기역 니은 디귿 순으로 정리를 해보려 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책들은 알아서들 소멸되어갔다. 불길은 가만히 있는데, 책이 불길 속으로 기어들어가 타는 것만 같았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책장이 무너진다. 그러면 나는 그 때야 불길의 시발점을 찾는다. 저 곳을 보면 저 곳이 시발점 같고, 이곳을 보면 이곳이 시발점 같고…… 불이 붙을 만한 것이 조금도 없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재였다. 불에 붙을 만한 물건은 그 무엇도 가져다놓지 않았다. 담배도 피지 않아 그 흔한 라이터 하나도 없다. 어디서 불이 옮겨왔는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려 허공을 날리는 책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허망해졌다

 집필하는 데에는 그리도 기나 긴 인고의 시간을 거치면서, 소멸되는 것은 어찌 이리도 무책임하고 무정하게 빠른 것인지. 나는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인 것만 같다.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엄청난 악몽이라도 꾼 듯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발작적으로 잠에서 깬 나는 멍한 얼굴로 마네킹처럼 가만 앉아있었다. 그러다가도 튕겨나가듯 몸을 일으켜 곧장 서재로 향했다. …… 꿈이었던가. 그 생생하던 화마가, 날리던 활자들이, 문지르면 검은 것이 묻어나오던 벽이, 모두 꿈이었던가. 책은 여전히 순서 없이, 분류 없이 이리저리 꽂혀있었다. 어제와, 오늘 아침과, 또 불과 몇 시간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대체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는 굳이 고민해보지 않았다. 스트레스일 것이리라. 무언가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면 곧장 악몽을 꾸거나 복통이 찾아왔다. 서재 문을 열어둔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식은땀을 슥 닦아내었다. 꿈이라 다행이면서도…… 일순간 허무함이 찾아온 것은, 왜인지.

 

 원고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여는 순간부터 덮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또 다시 생각도 나지 않는 문장을 창작하기위해 애쓰며 손톱만 까득까득 물어뜯을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마감 날짜가 사흘도 채 남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오늘 내로 반절은 써놓아야만 했다.

 마지막 수정 날짜가 이틀 전인 문서 파일을 열었다. 고작 두 줄이 작성되어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붑니다. 이번 여름 지독했던 폭염 덕에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오고 있는 거겠죠? 썼다고 하기에도 남 보기 부끄러운 문장이었다. 어떻게든 이어보기 위해 머리칼을 쥐어뜯었지만, 복통만 유발할 뿐이었다.

 

 “하아…….”

 아랫배를 움켜잡은 채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백지로 만들었다. 가방을 뒤져 아침에 챙겨온 매실원액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매실도 듣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지만, 그냥 심리적 안정을 위해 마시는 거였다. 원액인 탓에 오지도 않던 잠마저 달아나는 기분이 되었다. 입을 몇 번 다시고는 다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초조한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다그닥다그닥 춤을 추고 있었다. 화면에는 ㅁㄴㅇㄹ 따위의 마구 누른 자음들이 활개를 쳤다.

 

 글을 쓰는 건 언제나 고역이다. 작곡이든 작사든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창작해내는 것은 어렵다. 차라리 책 열권을 던져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라고 하는 것이 더 쉽겠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것이 내가 간헐적으로 배 아픈 것 말고 대체 무엇이 있겠는가.

 내가 무엇을 썼는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온갖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여 원고를 완성했다. 메일을 전송하고 시계를 보니 어느 새 시침은 내가 원고 쓰기를 시작한 시간으로부터 저만큼이나 달아나있었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어 나도 함께 흘러가기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하도 집에만 틀어박힌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라, 기장이 조금 긴 반팔 티와 추리닝 바지를 챙겨 입고 동네를 돌 작정이었다. 최근 흥행한다하는 영화도 한 편 보고 카페에 가서 생과일주스도 한 잔 시켜먹고, 말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나는 공허해졌다. 아무 것도 딛지 않은 채 걷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은 채로 숨만 쉬며 살아가는 느낌.

말을 많이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도 여전히 입 안은 사막이었다. 텁텁함에 집 앞 편의점에서 구입한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현관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맞은편에 꽉 닫힌 서재가 보였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한참이나 그 문을 노려봤다. 둥그런 문손잡이를 노려보고, 원목 소재의 문을 노려봤다. 그러다가도 벌컥, 열어보고.

 그대로였다. 정리 없이 마구 꽂혀진 도서들도, 서재 한 쪽 구석을 차지한 조그마한 나무 소재의 책상도. 달라진 것 없이 모든 게 그대로인데, 나는 왜 이렇게 초조해하는 건지. 멀쩡한 손가락 굳은살을 앞니로 까득까득 떼어낸다. 핏방울이 맺히고 나서야 짓을 그만두었다.

 

 이번 원고가 참 좋았다는 연락이 왔다. 내가 여태 써 내었던 원고 중 가장 좋았다고. 뭐가? 온통 내 것이 아니었던 문장들이? 아니면, 어디선가 보았던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빤한 격언들이? 아무리 반추해보아도 그 여섯 장 남짓 하는 A4 원고엔 내 글이 없었는데. 내가 쓴 글 중 가장 좋았다고 한다. 까르르 소년처럼 웃어제끼며, 나를 둥둥 하늘로 올려대었다. 여태 이런 글을 안 써 올리고 뭐 한 거야. 권작가? 권작가 볼수록 소질 있네.

 슬프게도 나는 내가 아니어야만 내가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몇 년간 아주 당연했는데. 건방지게도 그걸 잊고는, 이제야 감히 비참해하고 있었다.

 

 근래 이레에 들어서 악몽 같지 않은 악몽을 자주 꾸고 있다. 첫 날에는 서재가 몽땅 불에 타 소멸되는 꿈을 꾸더니마는, 이튿날은 물바다가 되어 책들이 불어 찢겨 사방팔방 종이가 부유하는 꿈을 꾸고, 사흘 뒤에는 웬 도둑이 들어 책들을 모조리 훔쳐가는 꿈을 꾸었다. 나흘 뒤에는 소리 소문 없이 책이 한 권도 남아있지 않는 텅 빈 서재를 꿈꾸었고, 어제는 서재 문이 꽉 잠겨 열리지 않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당장 오늘 새벽, 지금만 해도.

 “정신병자인가……

 내 자신이 서재 문을 열어 모조리 태워버리는 꿈을 꾸었다. 내 손으로, 나의 글과 타인의 글들을 모조리.

꿈을 꿀 때마다 나는 잠에서 깨어 서재의 상태를 확인했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무의식중 알고 있으면서도, 습관처럼, 버릇처럼, 숨 쉬듯 확인했다. 그냥 편히 잠에 들기 위한 절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악몽이라면 악몽인 그 꿈들을 꾸게 된 엿새 동안, 나를 지겹게도 괴롭히던 심장이 체 한 듯했던 답답함과 간헐적인 복통이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숨을 숨처럼 쉴 수 있게 되었고, 삶을 삶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병처럼 매실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모순처럼 꿈을 꾸게 해달라고 은연 중 바라고 있었다. 책들이 몽땅 다 소각되어버리는 꿈을 꾸게 해 주세요…… 도둑이 들게…… 물바다가 되게…… 문장이라고는 티끌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하면서. 짝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듯이, 나는 언제나 주체 할 수 없는 심장으로 달을 기다렸다. 서재가…… 그 수억 줄의 문장들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 마치 없던 것처럼. 원래부터 나의 집이라는 곳에는 서재라는 옥죄임의 공간이 없었던 것처럼.

 

 글은 내게 업이었고, 또 숙제였으며, 내게 부와 명예를 주는 동시에 복통과 답답함을 주었다. 또한 내가 가 아니게 되는 지름길이었다. 항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키보드 위의 내 손가락은 여러분. 긍정을 생활화하세요. 하며 가식적인 문장들을 찍어내고 있었다. 나는 희망을 주는 기계였다. 요즈음의 나는 가끔 생각한다. 수많은 기성작가들의 소름 돋는, 마치 나 보란 듯 존재했던 문장들을 보며 소싯적의 나는 글이라는 것이 감히 내 업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나는 왜 지금 그것들을 떨쳐내고 싶어 하는 건지. 불특정 다수는 소싯적의 나처럼 글이 자신의 업이기를 바라며 반복적인 필사를 하고 타이핑을 하고 또 자신이 아닌 자신을 문장으로 옮기고 있는데, 나는 왜 문장들이 불어 찢기고, 도둑맞고, 사라지고, 소각되는 것을 보며 감히 통쾌와 쾌락을 얻는가. 수분 없이 말라버려 뻑뻑해진 눈알을 꿈뻑꿈뻑 억지로 뜬 채로 또 다시 뱉어냈지. 나의 것임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은 나의 문장들을.

 

 한 동안 고향집에 내려갔다. 진득한 도시생활에 이제는 그만 낯설어져버리고 만 논과 밭들을 보며 이야기하고, 듣고, 쓰는 생활을 했다. 간간히 원고를 보내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은 내게는 유일한 돈줄이었으니까. 길을 걷다 배가 고파지면 거리낌 없이 동네 식당에 들어가 열무국수나 백반정식 따위를 시켜먹곤 했다. 그 무엇도 눈치 볼 것이 없는 날들이었다. 모아놓은 돈을 야금야금 써가며 그것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정신이 맑은 나날들을 보냈다. 그렇다고 서울에서 떠나온 뒤로 그 엿새와 같은 꿈을 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은연 중 바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나에게 일어나는 통과의례 같은 일이 되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하루하루 글들을 태워내고 있었다.

 “엄마. 나 무김치 좀 싸 줘.”

 “또 다 썩혀 내삐릴라고?”

 “아냐. 이번엔 다 먹을 거야.”

 “백 날 천 날 그렇게 말함서 다 쳐 먹은 적이 없자네. 인자는 아까워죽겄어.”

 “그럼 반찬통 하나만 싸 줘. 그건 다 먹을 수 있어.”

 엄마는 퉁명스러운 체 하며 내게 줄 익은 무김치를 싸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가려고? 엄마의 물음을 나는 한 번 못 들은 체 했다. 새삼스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이곳이 내 집이 아니었던 게지. 내 정신을 맑아지게 하고, 악몽 같지 않은 악몽의 횟수를 조금씩 잦아들게 하고, 향수에 젖어들게 하며, 반가운 이들을 만날 수도 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던 게지. 나는 마치 객식구라도 된 마냥 풀이 죽었다. 얼마나 있다 가냐고. 재차 묻는 엄마의 말에 일말의 생각조차 않은 채 일주일 정도. 하고 덜컥 답했다. 엄마는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하던 일을 계속 할 뿐이었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딸의 무김치를 담아 새지 않게 몇 번이고 꽁꽁 여민 뒤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 나는 어떠한 몹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으나, 모른 체 했다.

글 같은 감정이었다. 수많은 통증 없는 글들이 내게 통증을 주려 파도치는 감정이었다.

 

 반복적인 나날들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씻고, 엄마와 목욕탕을 갔다가 개운해진 몸으로 할머니를 뵈러 다녔다. 할머니는 몇 달, 몇 년간 보지 못했던 손녀를 자주 본다고 좋아라하셨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시기도, 노인정에 계시기도, 마당에서 닭이나 개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셨지만, 가장 자주 계시는 곳은 텃밭이었다. 할머니 집에서 그리 경사지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면 왼 편에 바로 있는 텃밭이었다. 내가 어릴 때에는 그 옆에 집채만 한 소 두 어마리가 있어서 언제나 거름 냄새와 분뇨 냄새가 코를 찔러댔었다. 지금은 오로지 풀 비린내밖에 남지 않게 되었지만, 나는 가끔 무슨 추억이라도 간직한 곳인 마냥 슥 쳐다보곤 했었다.

 “글 쓰냐?”

 “.”

 “재미는 있냐.”

 “.”

 “그려. 그럼 됐다.”

 할머니와 나만 있는 한갓진 텃밭에는 할머니의 호미질 소리만이 외롭게 날아다녔다. 나는 호미질 소리를 정겨운 마음으로 들으며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비라도 내릴 것처럼 눅눅한 구름이 손가락 끝에 닿을 듯 낮게 깔려있었다.

 

 한 손에는 무김치를 등에는 배낭을 이고지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초록과 멀어져 혼탁한 회색 속에 또 다시 둘러싸인 셈이었다. 벌써부터 익숙한 것들을 다시 마주 할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또 명치 어디쯤이 답답해지는 듯 기시감을 느꼈다. 다시 마주한 현실까지 짐 위에 빼곡하게 둘러맨 채 집으로 향했다.

엄마에게는 일주일이라 말했지만 흐지부지 끌다보니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열흘 동안 난 목욕탕을 아홉 번 다녔고, 할머니를 여덟 번 뵈었고, 열무국수를 다섯 번 먹었으며, 엄마와 두 번의 약주를 했다. 그 동안 나는 원고를 단 한 번 보냈다. 보내면서도 문장들을 앓으며 아파하지 않았다. 의외로 문장들은 술술 나왔고, 하루 다섯 시간 만에 뚝딱 원고를 만들어내는 기염을 토해냈다. 엄마는 빨리 원고를 쓰고 쉬는 나를 보며 그 일 할 만한 일인갑다. 하며 짐짓 안도했다. 스무 살 적부터 타지로 보낸 다 큰 딸이 이제 새삼 걱정이 되었는가보았다.

 

 나는 꽤 많은 일들을 하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내 집은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굳게 잠긴 방문들도, 반 쯤 열린 창문도, 서재의 책들도. 다만 그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열흘 간 방치해둔 탓에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것뿐이었다. , 하고 혼탁한 것을 불어냈다. 모든 숨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나는 집에만 오면 죽어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듣지 않으며, 무언가를 먹지도 않았다. 가끔 먹는 것은 물이나 매실 원액뿐이었다. 아사할 것만 같은 괜한 착각이 들면 비스킷이나 빵 따위를 꺼내먹었다. 생동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는 채로 손가락 끝에 영혼을 담아내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니 고되기가 그지없었다.

결국 내 것이 아닌 문장들을 내 것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무슨 연유인지 내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물론 뇌도 마찬가지였다. 사고가 정지한 듯 나는 그저 가만 앉아 숨만 쉬며 모니터 화면을 빤-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목구멍에 모음들이 박힌 듯 한숨조차도 아파했다.


 노트북을 열어 지난 열흘간의 일을 써내려갔다. 미사여구 같은 것은 없었다. 낯간지러운 묘사 같은 것도 없었으며, 희망을 주는 격언이나 오늘의 명언 따위도 없었다. 나만의 글이었지. 오로지 나만이 쓰는, 나만이 보는, 나만이 읽는…… 나만의 글이었지.

무엇인가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글을 써내려갔다. 이런 것도 하나의 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활자들이 주르륵 이어져있으니 건방지게도 이라 칭하겠다. 쓰다가 빼먹은 것이 있거나 뒤늦게 생각나는 일들이 있으면, 굳이 수정을 하지 않은 채 아 맞다. 따위의 무책임한 글자들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나는 어이없게도 즐거워했다. 어린아이처럼, 마구 낙서 같은 글을 뿌려대고 있으면서, 즐거워했다. 돌연하게 피식하는 실소들도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미친 것처럼 써갈기다보니 시간은 어느 새 쓰기 시작한 시각으로부터 일각이 넘게 지나있었고, 내 입 꼬리는 올라가있었다. A4는 여덟 장을 돌파했다. 내가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 한 일들이 이다지도 많았던가? 습관적으로 벽시계를 쳐다보지 않았다면 아직도 사이코마냥 생각 없이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었다. 올라간 입 꼬리의 감각을 무심코 느꼈다. 헐벗은 몸으로 명동 한복판을 지나는 듯이 수치스러워져 입을 꾹 다물었다. 다물어서인지, 웃고 있어서인지, 나도 모르는 감정으로 입매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글을 업으로 삼고 난 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내 글을 이토록 육체로 느꼈는가. ,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나는 평소 군중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는 후보를 손꼽자면 단연 선두를 다투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붙임성도 없거니와 말을 걸면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단답형 어조로 대답했고, 무언가에 골몰하게 되면 말수가 급격히 적어지고 누군가의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꽤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동기 작가들 회식자리서 이번에 써 올린, ‘내 것이 아닌내 원고가 도마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내 이름 석 자가 난무했다. 나의 발가벗은 문장들을 쏟아냈다. 얼굴이 홧홧해져 그만 터져버릴 것만 같은 어쭙잖은 칭찬들을 늘어놨다. 나는 당장에 내 반 쯤 남은 술잔에라도 참방, 하고 뛰어들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제 발이 저려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쯤 되면 내가 그 원고를 아파하지 않은 채 제출했다는 것을 알고도 나를 골려대는 것으로까지 느껴졌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입에 발린 칭찬들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게 순수 나의 글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 그저 한 번 이러고 말 뜨거운 냄비가 될 화젯거리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우니 그만들 해 주세요……

나는 어쩐지 우쭐해했다. 내가 아닌 를 내가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구역이 몰려왔다.

 

 환복하지도 않은 채, 그렇다고 세안하지도 않은 채,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재 문을 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구 뒤집었었다. 내 글과 타인의 글을 구분할 이성조차 잃은 채로 그저, 마구. 문득 창문 유리로 옅게 보이는 나는 누가 봐도 속히 말하는 미친 년과 같았다. 술이 떡이 되어 들어와서는 본인의 집, 본인의 서재를 밭 쑤시듯 쑤셔대고 있었으니. 어쩌면 미친 것도 같았다. 차라리 미쳤으면 했다. 잡념이라도 사라지게, 깔끔하게 미치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지도, 그렇다고 울어대지도 않은 채 책들을 훼손시켰다. 쓸어내리고, 던지고, 밟고, 차고.

 “……

 갑자기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과 발과 허벅지에 차가운 도서의 느낌이 와 닿았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우쭐함이 가시질 않았다. 술을 왕창 먹었음에도, 또 그걸 다 게워냈음에도, 이 짓이 술김인지 맨 정신인지 모름에도, 자꾸만 헛된 칭찬들만이 귓바퀴에 돌돌 감겨 떠나질 않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던 글들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나를 자꾸만 아프게 했다. 정신을 탁- 하고 놓아버릴 만큼의 환멸들이 자꾸만 내게 답답함과 복통을 일으켰다.

의지와는 다른 눈물방울이 서재바닥을 적셨다. 나는 여전히 무표정인 것만 같은데도 내 입술 사이에서는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그만 창피해져 울음을 욱여넣으려 애써보지만, 돌아오는 건 점점 매워지는 눈가였다. 평소 울게 되면 눈부터 새빨갛게 충혈이 되어 머리부터 지끈지끈 아파오는 체질이라 우는 것이 배가 아픈 것보다 싫었는데……

나는 신생아처럼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눈물이 우박처럼 후두둑 떨어졌다. 마음 속 깊이 짝사랑하던 사내에게 차인 여린 여자마냥, 책들을 끌어안고, 책들에 파묻혀, 울고 있었다.


 처음 술을 접하던 시기부터 난 남들과 다르게 적게 마시든 많이 마시든 숙취 같은 건 없다고 자부했었는데,

 “아이고. 두야……

 오만이었다. 잔뜩 알코올이 들어가 열이 받아있는 상태로 몇 시간을 정신 놓고 울었는데, 감기기운이든 숙취든 없을 리가 만무했다. 내 입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술 지린내에 내가 그만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데, 내 몸 위에서 우수수 책들이 떨어진다. 그 새 많이 낡은 본새가 무슨 중고서점에서 몇 년 간 썩은 애물단지 같았다. 도서라면 사족을 못 쓰던, 옷 사는 것마저 줄여가며 도서를 사들이던 내가 갑자기 왜 죄 없이 꽂혀만 있던 책들에게 이런 식으로 술김에 화풀이를 한 것인지는 굳이 생각지 않도록 했다. 또 다시 어제처럼 눈가가 매워져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나는 라이터를 쥐고 서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타고 있었다.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불구덩이 속으로 대책 없이 던져진 마냥 온 몸이 홧홧했다. 불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책들을 하나하나 집어 어이없게도 정성스레 불을 붙였다. 책들은 미아가 되어버린 나의 마음을 알았던 건지, 열심히 탔다. 불로 아우성쳤다. 활자들이 타는 걸 보니 마음은 이상하게도 고향이 되었다. 논 같은 고요함과 밭 같은 종용함이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어쩌면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책들이 활활 타오르는 걸 보면서 나는 복통을 느끼지도, 그렇다고 답답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베갯잇과 이불 숲에 에워싸여 끝없이 편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그만 아득해졌다. - 하고 무언가가 끊기는 느낌에 마른 사막 같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또 꿈의 한 편린이었다. 글을 써보겠다고 방에 들어와서는 또 스르륵 토막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고향집에 내려갔다 온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니,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인 꿈이었다. 꿈에서 막 깼을 때의 나는 허무와 안도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있었다. 나는 또 다시 기계처럼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내가 어질러놓은 상태 그대로, 그것이 멀쩡한 상태라면 멀쩡하게 서재는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꿈이 거짓됨을 알았다. 집에는 라이터라는 물건은 티끌도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그런 방화를 저지를 만한 대범함이 실오라기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왜인지 그만 침울해졌다. 우울해진 손으로 책들을 정리했다. 머리로는 정리하는 김에 기역 니은 디귿 순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난지도처럼 마구 꽂을 뿐이었다. 손 가는대로, 시선 가는대로, 마구.


 나는 어쩌면 현재 내게 일어나는 이 모순 같은 일들이 글에 대해서만큼은 순종적이었던 나에게 하는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쓰는 것을 힘겨워하면서도 투고 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때의 뿌듯함과 보람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갉는 것인 줄은 몰랐다. 그것이 나를 환멸 속으로 잠식시킬 줄은 몰랐다.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책들 틈에서 우박 같은 눈물과 함께 잠들었을 때, 나는 사실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고향에서 돌아와 미친 것처럼 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썼던 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좋아한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처음으로 내 글을 아파했고, 또 느꼈으며, 또 기뻐했다. 동료 작가들에게 낯 뜨거운 칭찬을 듣던 날을 기억한다. 또 혐오한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다른 의미로 내 글을 아파했고, 또 느꼈으며, 또 슬퍼했다.

 나는 더 이상 무고통의 글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집에서 떠나온 지가 팔주를 넘어가고 있었다.

글을 쓸 수 없는 작가는 의미를 상실했다는 생각에 다니던 일자리마저 그만두었다. 언제든 다시 오라며, 그 여행이 끝나는 대로 다시 오라며, 나의 글을 환영한다고 했다. 나는 내 뜻대로 기뻐하지 않은 채 예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첫 이레 동안은 내 마음 속을 마구 범람하는 환멸이라는 것 때문인지, 일상생활이 힘겨울 정도로 우울해져있었다. 그 때의 나를 지켜보았던 몇몇 지인들은 나를 산송장으로 칭하며 금방이라도 픽 하고 쓰러져 사월의 눈처럼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며 혀를 내둘렀었다. 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거울 보는 것을 꺼려할 정도였으니까.

 또 보름부터는 그래도 사람처럼 살았다. 점점 핼쑥하고 야위어져 가는 모습이 싫어 억지로 밥까지 챙겨먹었다. 처음엔 먹는 대로 배에서 핵탄두라도 터진 것처럼 부글부글 끓더니마는,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정말 있기는 한 모양인지, 아니면 그저 익숙해진 것인지 추후엔 밥알을 삼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한 달이 조금 안되었을 때는 참으로 오랜만에 독서를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전라도 어딘가의 갈대밭에 있었다. 사람 사는 풍경이 익숙한 어느 시골 마을이었던 것 같다. 노오란 갈대들이 줄지어 바람에 춤을 추는 것을 보며 도서의 마지막 장을 덮고 벅차했다.

 한 달하고도 아흐레가 지난날에는 경상도 어딘가의 부둣가에 가닿았다. 방파제를 제멋대로 넘실거리며 부서지는 포말을 보고 있자니 시나브로 마음속에 훈기가 차올랐다. 무작정 걸어 다니게 된 이후 나는 복통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는 평온함이 익숙해져, 그 때의 내가 자주 앓았다는 사실도 까마득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팔 주 즈음이 지난 오늘, 나는 처음으로 펜을 잡았다. 타이핑을 시작하는 것은 조금 더 훗날에 할 생각이었다. 나는 목하 글로 다가가는 걸음마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시집부터 필사를 시작했다. 현실에 치이고 밀리다보니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로 이라는 것을 마주하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손으로 쓰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조금 쓰다보면 흑심이 사라져 연필을 깎을 때가 왔고, 또 조금 더 쓰다보면 굳은살이 박혀버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생겼다. 마음에 드는 타인의 문장이 나오면 그 사람이 되어 그 문장을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읽어보았다. 감정이 범람해 눈물을 데리고 오도록 내버려두었다. 종이 위로 투두둑 떨어진 눈물은 검게 반짝였다.


 몸이 지쳐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마구 부려놓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것 말고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런대로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여행을 다녀온 직후 나는 무모함으로 똘똘 감싸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환경들이 준 무모함. 대책 없는 편안들이 준 무모함. 그저 인테리어용이라고 생각했던 벽난로를 쓸 일이 생겼다. 조금 추워진 탓도 있겠으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불쏘시개 할 만한 것을 찾아다녔다.

하얀 것들이 제들끼리 엉겨 붙어 마음껏 불살라졌다. 한 동안 나를 괴롭히던 감정의 포말들이 방파제에 부딪혀 잔잔해지는 지점에 이르렀다. 나는 타이핑을 시작해보자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나의 것을 써보자고. 불길이 사위어갈 때 쯤, 내 마음에 불이 붙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홍수가 밀려왔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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