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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0 13:19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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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었다



 나는 문득, 오늘이라면 외출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무얼 할 지 궁리를 거듭한 끝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에는 확고한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내 방 안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낮은 천장이 내게 쏟아질 듯 힘겹게 버티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가끔은 천장에 핀 곰팡이 개수를 세면서, 그렇게 누워있었다.

 잠은 더 오지 않았다. 잠이라면 지겹도록 잤다. 자고 또 자도 다시 찾아오는 게 졸음이었기에 나는 너무도 많이 잤다.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 근 2년간의 얘기였다. 나는 2년 동안 쓰레기를 버리러 가거나 영 먹을 게 없어 슈퍼에 가는 것을 제외하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방안에는 쓸 만한 물건이 없듯 할 만한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하게도 자야했다. 아무 쓸모도 없이 살아 있기 보단 죽은 듯이 자고 싶었다. 하지만 삶을 잠으로 대신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날들. 그런 날들이 있었다. 자고 또 자도 찾아오는 게 졸음인데도, 가끔은 어항 속 붕어처럼 멍청하게 숨만 쉬며 곧 죽어도 깨어있는 날들이 있었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런 날은 2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냥 천장에 피는 곰팡이를 바라보거나, 벽지를 덮어가는 얼룩의 미묘한 변화를 찾는 걸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곰팡이나 얼룩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문득 외출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고작 잠이 안와서, 심심해서 바깥에 나가고 싶은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내 세계를 벗어나 저곳으로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런 작은 열망이 집착적으로 마음을 흔들자 불안과 묘한 기대감이 급기야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득, 오늘이 내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다지 논리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는 내 생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2년만의 외출을 결심했다. 오랜만에 의욕적으로 나서자 그저 결심만으로도 상당히 뿌듯해졌다. 나는 그 기분에 좀 심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즐거움마저도 내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쿵쿵쿵. 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내 기분 좋은 흥분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다시 모든 게 시큰둥하게 느껴지고 만다. 하지만 쿵쿵쿵, 하는 소리는 날 재촉 하듯 반복적으로 들려왔고 결국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나에게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는데 예진이는 둘째 동생이었다. 막내 동생이라 언제나 어린애 같은 녀석이었는데, 이젠 이 얼굴이 더 이상 애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와 9살 터울이니 이 녀석도 벌써 27살 인 것이다. 낯설고 익숙한 얼굴을 마주보고서 그 애가 26살인지 27살인지, 내 나이가 35살인지 36살인지 헷갈려하고 있을 때 예진이가 안으로 쑥 들어왔다. 한 번도 들어오란 법이 없지. 내 동의 없이 척척 걸어 들어오면서 녀석은 괜히 조잘댄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대답이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방 꼴이 이게 뭐야. 앉을 자리도 없네. 예진이가 다시 한 번 입을 연다. 나는 주섬주섬 바닥에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주워들었고 예진이는 그런 내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부자연스러운 내 왼쪽 다리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애는 날 찾아올 때 마다 이렇게 검열관처럼 굴었다. 내가 혹시 아사하진 않았을지, 인간다운 몰골로 살고 있는 건지, 내 다리는 여전히 병신인지 찬찬히 관찰하곤 했다.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이제 너무나 당연해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장애였는데. 누군가 보고 있는 것은 그저 나 혼자 인식 하는 것과 다른 것이었다. 특히 저런 검열관이 보고 있는 것은, 마치 다시 한 번 장애 판결을 받은 기분이다. 그래서 난 동생의 방문이 끔찍하게 싫었다.

 나는 최대한 정상적으로 걸어보려고 움직임에 정성을 쏟다가 이게 예진이에게 얼마나 안쓰러워 보일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차라리 불편한 다리 따위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한 표정을 연기하는 데에 정성을 쏟기로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그냥 둬. 내가 할게. 보다 못한 녀석이 두 손을 걷어붙인다. 널부러진 쓰레기를 줍고 빗자루를 찾아와 부스러기나 먼지나 머리카락도 야무지게 쓸어 담는다. 나는 그냥 얌전히 앉아있는 것을 택한다. 내 작은 공간은 빠른 속도로 정리된다, 왼쪽 무릎이 새삼 꾸덕꾸덕 굳어오는 것 같다. 경직의 느낌은 무릎에서부터 왼쪽 다리와 허리로 퍼져가더니 이내 온몸을 휘감았다. 이대로 뇌까지 꾸덕꾸덕해질 수 있을까. 그럼 이 방의 벽지나 바닥처럼 그냥 꾸덕꾸덕 한 채로 죽은 듯 있어도 괜찮을 텐데.

 하지만 내 뇌는 굳지 않았고 사실 온몸도 경직되지 않았으며 나는 예진이와 두 달 만에 마주앉았다.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예진이는 언제나처럼 날 보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 같았고 나는 언제나처럼 그냥 말이 없었다. 이젠 아프지는 않지? 나와 마주앉은 예진이의 첫마디였다. 다리 말이야. 대답이 없자 녀석이 설명을 덧붙였다. 나를 찾아올 때 마다 묻는 말이었다. 그 사고가 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시간도 약인지라 이제 아프지 않을 때가 됐다는 걸 알텐데. 그럼에도 항상 이렇게 물어왔고 그럼 나는 항상 고민하게 됐다. 정말 아프지 않은 건가. 하지만 멈춰버린 신체가 아프지 않은 것 일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아프냐, 안아프냐 하면, 아프진 않았다. 고통은 지나간 지 오래였다. 다만 그 흔적이 고통보다 끔찍한 장애로 남았을 뿐이다. 결과적으론 아픈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뭐라고 대답해야 더 정확한 대답일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들을 입안에서 굴리며, 음미하며 어떻게 뱉어야할까 고민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또 침묵해버린다. 예진이도 곧 대답을 듣길 포기한다. 그래서 사실 난 그 질문에 한 번도 답을 한 적이 없었다.

 예진이가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상 위에 올린다. 난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어서 궁금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계속 침묵했다. 그제서야 왼쪽 무릎이 시큰시큰 아파왔다. 예진이도 이러한 내 반응이 익숙할 뿐이었다. 나에게 저번에도 했던 것 같은 말들을 태연하게 반복하는 녀석은 무엇인가 싫증난 사람 같았고 저번에도 들은 것 같은 말들을 고스란히 다시 듣는 나 역시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이달치야. 딱 평소 그만큼. 적지는 않아? 예진이가 물었고 금방 자기 말을 이어간다. 혹시 모자라거나 돈 쓸 일 있으면 꼭 다시 연락하고, 모자라지 않게 보내줄게. 이런 말들을 했다. 이 얘길 하는 동안 그 애는 앞에 있는 내 얼굴을 보지도, 상 위에 올려진 봉투를 보지도 않았다. 그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가방을 뒤적거리며 곧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꼬맹이는 언제 어른이 된 걸까. 언제부터 명품 핸드백을 들고 높은 하이힐을 신는 여자가 되었더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할 말을 마친 예진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도 따라 일어선다. 편히 앉아있으라고 하며 나설 채비를 하는 녀석이 문득 다시 뒤를 돌아본다. 저거 뭐야? 그 애가 어제 먹다 남긴 컵라면을 가리켰다.

 세상에, 언제 먹던 걸 이제껏 둔거야? 예진이는 사발면을 들여다보고는 질색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애가 탔다. 애가 타서 황급히 입을 열어 오늘 처음으로 예진이에게 대답했다. 그거 먹던 건데. 그냥 두지. 예진이는 예상치 못한 내 음성이 생소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며 되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냥 두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진이는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일그러진 입꼬리로 웃었다. 녀석은 컵라면을 변기에 처넣었다. 벌건 국물과 함께 불어터진 면발들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탄력을 잃은 면발은 차가운 변기물에 씻겨 그 연약한 몸을 낫낫이 드러낸 채 가라앉았다. 나는 그것들이 왠지 안타까웠지만 예진이는 고민 없이 곧장 물을 내렸고, 변기에 처박힌 면발들은 커다란 물소리에 갇혀 사라졌다. 물은 깨끗해졌고 허옇게 불어터진 면발 따윈 흔적도 없다. 맥없이 이를 바라보는 내게 예진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거 이미 먹을 만한 거 아니었잖아.

 예진이는 차에서 커다란 비닐봉지를 가져오더니 엄청난 양의 과일과 라면, 통조림 등을 꺼내 냉장고에 넣었다. 쌀은 아직 남아있지? 다음에 사올게. 이런 말을 남기고는 바쁘게 돌아서 나갔다. 과일은 있어도 깎아먹지 않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돌아갈 때까지 말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봉투에는 50만원이 들어있을 것이다.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써 2년째 여동생에게 받는 용돈이었다. 평소에는 계좌로 보내주곤 했지만 이렇게 두어 달에 한번 씩 예진이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 애는 나에게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으면서, 두어 달에 한 번쯤을 반드시 방문한다. 그리고 늘 오늘처럼 나를 불편해했고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몇 번 내뱉고는 봉투와 엄청난 양의 식량을 남긴 채 바쁘게 사라져갔다. 나는 녀석이 그토록 불편해 하면서도 꾸준히 날 찾는 이유를 알고 있다. 걱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단순한 연민이나 가족애는 아닐 것이다, 아마 나에게 느끼는 최소한의 죄책감이고 사죄를 위한 최소한의 동생노릇일 테다. 내가 이대로 아사하기라도 한다면 그 편이 더 죄책감으로 불편할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굶어 죽지는 못했다.

 나는 그 돈이 반갑지도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봉투를 등지고 누웠다. 지하 단칸방은 햇빛 한줄기 들지 않아 대낮에도 어두웠다. 빛이 없는 세상은 삭막하고 우울했지만 차라리 익숙해진 어둠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축축하고 어둡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옆으로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린다. 이렇게 방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자면, 오로지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가끔은 이 곳이 세상과 단절된 또 다른 공간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다른 말로 내가 이 세상 밖에 있는 것 과 같기도 하다. 그것은 퍽 외로웠지만 또 그렇기에 편안했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정돈된 공간이 어딘가 기시감을 일으킨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한참을 뒤척이며 방바닥에 새우자세로 웅크리고 누워있었지만 역시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했던 외출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입고 있던 옷에 대충 잠바 하나를 걸친 뒤, 덤덤하게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물론 문도 꼼꼼하게 걸어 잠갔다. 2년을 망설여 온 이 행위가 이토록 아무렇지 않을 줄이야. 몰려오는 실망감과 안도감의 괴리 속에서 나는 계단을 올랐다. 방이 지하였기 때문에 문 밖으로 나온 뒤에도 어두컴컴한 계단을 통해야만 지상으로 나설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 계단이 끝나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계단이 멈춘 그 곳에는 대낮의 햇살을 받아 하얀 빛이 잔뜩 감돌고 있었다. 터벅터벅하는 내 낡은 운동화의 리듬에 맞춰 조금씩 조금씩 작은 네모처럼 보이는 바깥의 이 가까워졌다. 나는 이 좁은 지하계단과 저 빛이 마치 천국과 그 곳으로 가는 계단을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가면 정말 아기 천사 같은 게 날아다니지 않을까. 그런 한심한 상상과 함께 작은 네모 모양의 빛은 커져가더니, 결국 내 몸을 집어삼켰다.

 나는 그 강렬한 햇빛에 뒤흔들리는 듯 갑자기 어지러웠고 순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려야 했다. 열기가 내 머리와 뒷덜미로 내려와 나를 덥힌다. 몸이 뜨거워졌다. 여름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나는 금세 더워져 식은땀을 흘렸고, 그래서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매로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벽을 집으며 갑작스런 따사로움에 적응되길 기다린다. 나는 눈부신 햇살이 내리는 현기증과 고통 속에서 이상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던 강렬함이 어느덧 잦아들며 기분 좋은 은은함으로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지상은 밝았고 뜨거웠고 활기찼으며 아기천사는 없었다.

 지상에서의 첫 순간은 강렬했으나 이후 경이로운 것은 없었다. 밝았고 뜨거웠고 활기찼으며 아기천사 대신 온갖 사유로 바쁜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 중 유일하게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느릿했다. 너무나 한가했고 또 너무나 평범했다. 강렬한 빛의 고통 속에서 느꼈던 묘한 쾌감은 내 무딘 감각들 너머로 잊혀지고 있었다. 실망스러웠다. 특별히 무언가 기대하진 않았지만,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 특별한 날이 될 꺼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지루하고 평범한 한 여름의 오후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잠시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일단 계속 걷기로 결심한다. 그 평범함이 날 실망시키는 동시에 안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밖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걸까. 아니면 기대했던 건가. 멍청한 고민을 곱씹으며 상점 유리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문득 다른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모습에 뿌듯해졌다. 물론 내 다리와 몰골을 흘깃흘깃 쳐다보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오늘 하루 집에 늦게 들어갈 것을 다짐한다. 긴 외출이 더 즐겁기 위해선 약간의 사치를 보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리 너머에 진열된 남자 정장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유리문을 밀자 문 틈새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쏟아졌다. 그 다음으론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직원들의 눈길이 쏟아졌다. 나는 그들이 나의 출입에 난처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최대한 왼쪽 다리에 힘을 주며 태연한 척 걸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작은 체구의 여직원이 종종 걸음으로 곁에 와 묻는다. 친절한 그녀의 눈웃음 속에 자리 잡힌 난감함과 의구심이 빠르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내게 과연 비싼 정장을 살 능력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며 나를 손님으로 대할 것인지 아니면 쫓아낼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 옷 좀 보려구요. 나는 대답한다. . 여자는 짧게 반응하며 어색하게 씰룩 웃어보였다. 그녀의 계산으로는 나에게서 돈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모양이다. 나는 잠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오늘 예진이에게서 받은 이달치 용돈이었다.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옷 좀 보여주세요. 봉투를 건네받은 여직원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봉투를 확인하더니 곧장 맑은 웃음을 보여주며 말했다. , 고객님.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여직원은 처음의 난감해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열성적으로 옷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상품은 재질이 어쩌구 저 상품은 핏이 어쩌구 해가며 꽤나 여러 벌의 옷을 가져다 보여주고 어깨에 대주었다. 어떠세요, 고객님? 그녀가 내 어깨에 옷을 올린 체 거울에 날 비추며 물었다. 그리곤 입어보라고 권유하며 나를 옷과 함께 피팅룸에 밀어 넣었고 피팅 한 나를 보고는 기계적인 감탄을 쏟아냈다. 고객님, 너무 좋네요! 직원이 상당히 과장된 하이톤으로 조잘댔다. 좋다는 건 어울린다는 것이겠지. 하긴, 나도 한때는 이런 정장이 제법 어울렸던 적이 있었다.

 나는 여직원에게 계산을 부탁했다. 그녀는 기쁜 표정으로 돌아서 카운터로 향했다. 그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또각또각 하는 경쾌한 하이힐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시선을 내려 그녀의 하이힐을 바라보다 문득 예진이의 하이힐을 기억해 냈다. 예진이가 내 방을 찾아올 때 그 애의 하이힐은 어떤 소리를 내곤 했을까

 예진이는 4년 전, 패션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동생이 유학을 결심함과 동시에 나는 졸업 포기를 결심해야했다. 우리 집은 해외 유학을 감당할 만큼 부유하지 않았고 어린 막내 동생은 철이 없었으며 나는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오빤 괜찮으니까 걱정 하지 마. 잘 다녀와라. 큰소리를 치며 어린 여동생의 등을 두들겨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곤 작은 건축회사에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입사해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신입사원이 되었다. 학벌이 대졸도 되지 않는 나는 회사의 입장에서 그리 유망한 사원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 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내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근무한 몇 달이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월급을 송금했다. 프랑스로, 가족에게로.

 그러나 나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해고당했다. 공사현장에서 왼쪽다리를 덮쳐온 쇳덩어리를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건은 순식간이었고 나는 기절도 하지 못한 채로 뭉개지고 뒤틀린 왼쪽다리를 바라봤다. 구급차는 조금 늦장을 부렸다. 덕분에 운 나쁘게 기절조차 하지 못한 나는 뜬 눈으로 날 것의 고통과 대면해야 했다. 수술실에 들어선 후에야 의사가 놓아 준 마취제 덕분에 잠 들 수 있었는데, 병실에서 깨워났을 때는 다리의 생명력이 다 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회사에서는 사원으로서의 내 생명력도 다했다고 판단했다. 치료 기간 동안 회사는 내게 해주어야 할 모든 의무와 금전적인 부분을 최대한 지급했고, 복직하고 한달 후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정리했다.

 아무 저항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매달려 애원도 해 보았고 일인 시위도 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은 힘을 잃고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다. 회사는 모든 산재처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내 장애와는 상관없는 적당한 해고사유를 덧붙여 그럴 듯하게 날 자른 것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억울한 경우가 있다. 이 세상에는 그러한 일이 허다하게 많다. 그리고 그 허다한 일들 중 하나가 내 경우였다. 모두가 억울해도 그렇게 잊혀 진다. 나 또한 잊혀 지고 있었다.

 나는 시위는 그만두고 재취직을 준비했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썼다. 하지만 나는 수없이 많은 서류전형에서 탈락해 면접을 볼 기회조차 잡기 어려웠다. 가끔 면접을 볼 수 있었던 날에도 면접관들은 내게 궁금한 것이 왼쪽 다리 이외엔 없어 보였다. 그저 힐끗 거리며 다리를 쳐다볼 뿐, 그들은 의식적으로 나를 피해 다른 지원자들에게만 질문했다. 나는 그들의 오가는 시선과 미소, 말들 중에서 유일하게 무의미했고 그저 허공에 떠도는 먼지들에 시선을 맞추곤 했다. 늘 면접을 망치면서도 나는 또 다른 회사들에 이력서를 냈고 늘 연락은 거의 오지 않았다. 내가 94번째 이력서를 쓰고 있을 때 내 애인은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나를 떠났다. 그 후로도 몇 번의 면접과 탈락을 반복하다가 결국 다 포기해버렸다. 이제 나는 이전처럼 평범하게 세상과 섞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게 된 것이다.

 손님, 감사합니다. 여직원이 영수증과 남은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입고 온 칙칙한 옷가지들도 쇼핑백에 고이 담아 돌려준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 매장을 나왔다. 또각또각 기분 좋은 하이힐 소리가 문틈에서 새어 나왔다. 매장에서 나온 나는 내 남루한 옷가지를 담은 쇼핑백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곧장 미용실로 향했다. 옷차림의 변화는 날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놓았다. 내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눈초리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 활기찬 영업용 미소로 나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친절한 남자 미용사의 손길로 이발까지 마쳤다. 거울에 비치는 멀끔한 모습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몇 년 전만해도 나는 이런 모습이었다. 꽤나 준수하면서도 평범했고 세상과 어울릴 줄 알았다. 하지만 기우뚱 거리는 왼쪽 다리가 거슬릴 때 마다, 그 때와는 같을 수 없음을 실감하곤 했다.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망가진 사람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그런 기분에 마취를 당한 듯 나는 다음 할 일을 찾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멋을 낸 남자는 보통 뭘 하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현 듯 엉뚱한 결심을 하고 말았다. 바로, 오늘은 여자와 잘 것이라는 뻔뻔한 결심이었다.

 벌써 어슴푸레한 빛이 내려앉은 밤이다. 여름인지라 아직 어둡지 않았지만 홍대는 벌써 밤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젊고 뜨거운 열기가 빛을 내는 듯이, 홍대 거리는 이르지만 찬란한 네온사인들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근처 ATM 기계에서 현금을 뽑았다. 예진이가 달마다 보내주는 용돈은 방 월세를 제외하곤 거의 쓸 일이 없어 그럭저럭 쌓여가고 있었다. 문득 오늘 예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애연금도 받을 수 있으니 신청해 보라는 것이다. 큰돈은 아니지만 챙길 수 있는 건 챙겨야지. 예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문득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 중 내 몫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사고 이후 급격히 약해지셨고, 술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내가 밖에 발길을 끊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쓰러지시더니, 그대로 앓아누우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어머니께 가지 않았다. 그래서 혜진이가 혼자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어야 했다. 혜진이, 내 첫째 동생. 그 애는 나를 원망한다. 어머니가 약해지신 것도, 쓰러지신 것도, 돌아가신 것도 다 나 때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자 노인의 병수발을 다 들어야 했으니 독기가 오를 만도 했다. 오빠는 엄마 아들도 아니야. 오빠는 내 오빠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던 그 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리였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라고 정의됐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소식도 장례식이 모두 치러진 후에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갈 자격조차 없었다. 어머니의 사망보험금을 받을 자격도 없었다. 여동생들은 어머니의 보험금에 대해 나에겐 일체 말하지 않고 저들끼리 분할을 마쳤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나를 시장에서 주워왔다고 말했다. 내 사고 이후 술이 늘었던 어머니는 어느 날, 술에 취해 내게 고백했다. 시장바닥에서 웬 쪼끄만 사내놈이 헐벗고 돌아다녔는데, 나를 막 쫓아와 버렸어. 나한테 엄마, 엄마 하더라. 그래서 너를 아들 삼았다. 어머니는 또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고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왜 내게 얘기해 주신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대학교 졸업을 포기하겠다고 말 했을 때, 내가 어머니의 친아들이었어도 쉽게 허락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의 친아들이었어도, 예진이의 유학을 위해 졸업을 포기하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을까. 묻고 싶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친아들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인생은 그녀의 아들로서 살았다. 그런데도 내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냐. 나는 혜진이에게 묻고 싶었던 적이 있다.

뽑은 현금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들어선 클럽에는 벌써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클럽의 조명아래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모든 이성 따위 놓아버린 듯 몸을 흔들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역동적이라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은 이제 나에게 없는 것이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건강한 육체뿐이 아니었다, 그 움직임은 강력한 생명력 자체였다. 나는 그 거대한 에너지에 섞여들기 위해 처절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말을 듣지 않는 왼쪽 다리에도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게 너무 기뻐서 계속 춤을 추었다, 간절하게 간절하게 그들의 에너지를 갖고 싶었다. 섞여들고 싶었다. 그들처럼 살아 있고 싶었다.

 새벽이 미친 몸부림으로 깊어졌을 무렵, 나는 춤을 추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내 손에 잡혀 클럽을 나온 여자는 술에 흠뻑 취해 있었다. 취해 비틀거리는 여자가 자꾸 내게 몸을 기대왔는데, 그것은 내가 꽤 든든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퍽 뿌듯한 일이었다. 물론 다리를 절며 여자를 부축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모텔에 도착할 때 까지 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흡족했다. 클럽에서 여자를 데리고 나왔을 뿐 아니라 여자가 전적으로 내게 기대온다는 것은 우쭐한 기분이 들게까지 했다. 나름 근사한 남자 같지 않은가. 이런 식의 즐거움에 취해 이제 곧 다가올 더 큰 쾌락과 즐거움을 상상한다. 그리고 기대에 가득 차 모텔에 들어섰다. 모텔의 주인아저씨는 만취한 여자를 보고 혀를 차는 것 같았으나 이내 모른 척 고개를 돌렸으며 나는 방에 그녀를 눕혔다. 불을 껐고, 여자를 벗겼다. 여자는 술김에도 정신을 놓지는 않고 있었는데 그녀는 매달리는 날 보며 킥킥 웃었고 내 손길에 응했다.

 나는 여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여자의 몸이란 하얗고 여렸으며 그에 비해 나는 꽤 건장하고 우세해 보였다. 나는 그 작은 몸뚱이를 짓누르고 휘어잡고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적어도 이 밤은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 밤이었다. 나는 격정적으로 움직였다. 오랜만의 육체적인 쾌락이 생소했던 만큼 강력하게 느껴진다. 그 즐거움에 흠뻑 취해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그 하얀 몸뚱이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아득해지는 정신. 그래,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아찔한 전율이었다. 그것은 곧 온몸을 달뜬 흥분상태로 뒤덮었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소름이 돋는다. 나는 날렵하게 허리를 놀렸고 빠른 움직임이 반복되다가 이내 무중력상태에 놓인 듯 육체는 쾌감을 넘어선 자유를 맞았다. 그 순간에는 거슬릴 법도 한 내 왼쪽 다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몸은 그 여자의 하얀 몸 위에 군림해 있고, 지배자였으며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복의 몸짓이었다. 남자로써, 인간으로써 회복하기 위한 행위였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이 침묵했다. 내 침묵이 언제부터 습관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사실 내가 침묵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외면당했던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다리를 잃은 것만 아니라, 내 모든 가치를 잃었다. 아무런 쓸모도 없이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고 골방에 처박혀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침묵하고 잠들면서 버려왔던 나를 되찾고 싶었다. 생명력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내 욕망이 커질수록 몸뚱이는 뜨겁게 내달렸고 갈구하듯 처절하게 흔들렸다

 그 때 나는 불현 듯 내 방을 떠올렸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과 적막으로만 가득했던 그곳을 기억해낸다. 나는 그 곳에만큼은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옆으로 웅크려 누운 똑같은 자세로 아무것도 할 수 할 수 없이 그저 거기 머물기만 했다.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었던가. 그 곳은 편안했지만 어둠 뿐 이었고, 그곳에 머무는 이상 나는 그 어디로든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이 편안했던 만큼 두려웠다. 떠나고 싶었으며 떠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어떠한가. 나는 드디어 그곳을 떠났다. 그토록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게, 세상에 섞였고 지금은 여자와 몸을 섞는다.

 나는 그녀를 안으며 뿌듯한 쾌락에 몸을 맡긴다. 여자의 몸속에 사정 할 때 마다 우습게도 자신감을 얻었고 더욱 당당해졌다. 그래서 더욱 거칠게 그녀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몸뚱이와 정신 속에서 아득히 영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변기에 울컥울컥 쏟아져 내리던 컵라면이었다. 그거 이미 먹을 만한 거 아니었잖아, 하던 예진이의 음성도 떠오른다. 그렇게 버려질 수는 없다. 한심한 컵라면 같으니. 음식 주제에 먹을 것도 못 되는 컵라면 같으니. 그렇지만 예진이 역시 그렇게 버려서는 안됐다. 그게 컵라면 잘못도 아닌데. 나는 더욱 힘차게 내달린다. 밤은 그렇게 꿈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꿈이란 아침이 찾아옴과 동시에 깨져 사라지는 것이다. 당신을 강간 혐의로 체포합니다. 이 낯설고 끔찍한 문장이 나를 잠에서 깨웠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한참 생각해야했는데, 사실 그럴 정신도 없이 낯선 이들에게 둘러싸이더니 휘어 잡혔다. 나는 포박당한 후에야 그들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문장을 곱씹어보았다. 당신을 강간 혐의로 체포합니다. 그제 서야 그 말뜻을 이해한다. 나는 황망해진다. 넋이 나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명을 원하는 듯 침대위의 여자를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침대에 여자는 없었다.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으며, 하는 경찰의 음성이 뒤따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에 귀를 기울일 정신이 없었다. 내 눈은 여자를 찾느라 정신없이 헤맸고 마침내 여자를 찾았을 때는 더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경찰들의 뒤에서 몸을 감싸 안은 여자는 두려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잔뜩 움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저 여자를 강간했나? 이제 나는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졌다. 알 수 없었지만 진실과는 관계없이 나는 강간범이었다. 경찰들에게도 여자에게도 그렇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이 거칠게 강간범을 연행했다. 내게 주어진 배려는 고작 팬티를 주워 입을 시간 뿐 이었고, 팬티를 주우며 나는 다시 한 번 꿈에서 깨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꿈이 깨진지는 오래였고 나는 곧 팬티차림으로 끌려 나갔다, 그때 여자가 나에게 언뜻 웃었다. 병신. 그녀의 입모양이 소리 없이 그렇게 말했다. 경찰은 그런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스쳐지나갔고 경찰에게 붙들려 있는 나 역시 그렇게 그녀를 스쳐지나 그녀 너머에 있는 경찰차를 향해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의 경찰차가 가까워진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나는 외출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괜한 환상에 젖어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그냥 방에 있었더라면, 나는 또 방에 가만히 존재하는 채로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멍청한 후회로 경찰차에 타기 전의 순간들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보 같은 자책만 되풀이 하는 사이 경찰차는 어느새 내 앞에 성큼 다가서 있었고, 키 작고 마른 경찰이 차 문을 열며 나를 밀어 넣었다.

 그때, 차 안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눈을 뜰 수도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내 삶의 아주 오래된 어떠한 순간에 직면한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오는 순간, 내가 보았던 그 빛이었다. 그것은 인생에서의 첫 순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너무 강렬해서 고통으로 남았다. 눈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고통은 쇼크에 가까웠고 갓 태어난 나는 몸부림치며 울었으며 그렇게 내가 시작됐다. 그 것이 고통이었든 아니든, 내 인생의 첫번째 순간에도 빛이 있었다. 나는 경찰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며 그것을 기억해 냈다.

 삶이 끝나는 것만 같은 이 순간, 나는 내가 태어날 때 보았던 그 빛을 다시 보았다. 눈이 부셔서 울었고, 울면서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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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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