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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 06:01

꿈속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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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의 여인




진모는 잠에서 깨었다.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을 조심스레 뜨니 방은 온통 깜깜한데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쪽에 베란다가 있어, 그곳만이 어렴풋한 새벽빛을 띄고 있었다. 유리창에 한없이 부딪히는 복잡한 빗소리가 귓가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원래라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이부자리를 쓸어 휴대폰을 찾아내거나, 그럴 겨를도 없이 다시 눈을 감아버렸겠지만 오늘따라 별나게도 진모는 시선을 꺼뭇한 천장에다 못 박은 채 어떤 상념에 잠겨있었다.

 “방금 꿈에서 본 그 여잔 누굴까?”

어느덧 시야가 어둠에 적응되자 천장에 달린 둥그런 형광등이 침침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모는 그 둥근 모양을 도화지 삼아 꿈에서 본 얼굴을 그려보려 했다. 형광등의 가운데에 오똑한 코를 세우고, 은은하게 미소 짓는 입술을 그 밑에다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콧잔등을 타고 올라가 눈을 그려보려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만은 결코 떠오르지 않고 번번이 빗소리와 함께 뭉그러지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또렷하게 보았으나 지금은 그려지지 않는 눈. 그 눈을 꿈에서 건져내보고자 진모는 시선을 닫았다.

다시금 눈을 뜨니, 어느덧 빗소리는 그치고 적막한 가운데 가끔 새 우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밤에 내린 비로 인해 방안이 다소 꿉꿉하였다. 오늘은 아무 약속 없는 토요일이기에, 새벽 때와 마찬가지로 진모는 눈만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벽에 도화지로 쓰였던 형광등이 이제는 바깥 빛을 받아 하얗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진모는 다시금 꿈에 보았던 그 여인이 떠올랐다. 또 한 번 형광등에 대고 얼굴을 그려보았다. 전처럼 코와 입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여전히 눈만은 잘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떠오르지 않는 눈을 그리기에 아침은 꿈속과는 달리 너무도 밝기 때문일까. 진모는 이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 보니 소파에 어머니가 잠들어 있었다. 곱슬기 없는 머리에 흠집 같은 흰머리를 종종 매달아두고, 얼굴에는 유난히도 축 처진 눈꺼풀과, 몸무게로 눌리어진 소파와 닮은 주름을 파놓은 채 거기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소파 아래에는 빈 소주병이 3개 있어, 그것 역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술 냄새가 어지럽게 올라왔다.

 

진모가 5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뒤는 그 뒤로 줄곧 아버지와 살았다. 그러다 3년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어머니가 진모의 손을 붙잡고, 남은 인생이라도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랑 살고 싶다며 눈물을 보이는 바람에 진모는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재혼을 안 하셨지만, 어머니도 여전히 홀몸이었다.

그렇게 근 20여년 만에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되었지만, 그새 어머니는 술 없이 못사는 인생이 되어 있었다. 취해있지 않은 어머니를 보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드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이에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종종 음식점 주방에서 소일을 하며 일당을 받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받은 일당마저 당일 술값으로 탕진하기 일쑤였다.

남들은 자랄 때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면서도 성인이 되면 그간의 노고를 깨닫고 존경하게 된다. 그러나 진모는 성장기 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떠올릴 때 먹먹한 감정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것은 순전 동정심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지난 삼 년 동안 어머니의 폭음에 술잔이 비어가듯 바닥을 드러냈고, 가끔은 어머니와 다시 따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들 된 도리로서 이런 마음은 갖는 게 아니라며 혼자 고개를 저어보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입 밖에 내뱉을 때가 있을 것만 같았다.

 

진모는 소파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흔들어 깨워,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 했다. 그러자 흐윽, 괴로움 섞인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이더니 별안간 눈을 번쩍 떠 두어번 꿈뻑인다.

 “어머니, 방에 가서 주무세요.”

 “지금 몇 시야?”

등 뒤에 걸린 벽시계를 바라보니 850분이었다.

 “850분이에요.”

시간을 듣자 다시금 눈을 감고 고개를 두어번 끄덕거린다. 그렇게 다시 얼핏 잠이 드려나 하자 기지개를 펴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실의 어지러운 술 냄새에 어머니가 풍기는 술내가 한껏 보태어져 순간 정신이 몽롱하였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쿵쿵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술내 때문에 식욕이 다 날아가는 심사라 진모는 다시 자기 방으로 가 거기 딸려 있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아침 공복에 피는 담배는 유난히도 어지럽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하얀 담배 연기를 뱉어내면서 진모는 저도 모르게 다시금 꿈속의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꿈의 내용을 복기했다.

꿈에서, 진모는 그녀를 한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고귀한 대상을 접한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진모의 완벽한 이상형이기도 했다. 그래서 감히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고, 말을 걸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편에서도 진모의 마음을 아는지, 불현듯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 진모는 그녀에게 꽉 안기는 듯한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꿈에서 깼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무척 인상적인 꿈이었기에 그녀의 코, , 미소는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의 눈만은 그토록 생각이 나지 않는지. 지금도 그 눈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누운 채로 진모는 문득, 이 꿈이 예지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단순한 개꿈이라면 이리도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돼지꿈이나 숫자꿈 같은 예지몽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진모는 꿈속 여인의 정체를 밝혀내고 싶다는 절실함 같은 것을 느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 뭐해?”

 “방금 일어나서 잠 깨려고 눈뜨고 누워 있어.”

 “형수는?”

 “민석이 데리고 아침부터 산책 간다더라. ?”

 “오늘 저녁에 뭐하나 해서. 시간 비면 밥이나 먹을래?”

 “밥 아니라 술도 먹겠지. 앞으로 너랑은 절대 술 안 마셔. 주당 새끼야.”

진모는 웃음이 터졌다.

 “아니 형, 나도 술 생각 없어. 그냥 이야기나 하자는 거야. 나올거지?”

 “그래. 토요일인데 진모 얼굴 한 번 봐야지. 어디서 보게?”

 “내가 형 동네로 갈게.”

무슨 고민이 있을 때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이 한살 위의 형은 든든한 상담가가 되어주었다. 오늘도 만나서 한껏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었다.

 

저녁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성훈 형은 특유의 큰 웃음으로 그를 맞이해주었다.

그들은 근처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가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주말 저녁이라 가게 안은 꽤 흥성흥성했다. 마침 소파 쪽에 자리가 있어 그곳에 앉았다.

지글지글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흥겨웠다.

 “오늘 왜 보자고 한거냐?”

 “에이, 우리가 무슨 이유 있어야 만나는 사인가 뭐.”

 

진모는 뜻 없이 집게로 불판의 고기를 한 번 꾹 눌러보고는,, 예지몽 같은 거 꿔본 적 있어?”

하는 것이다.

 “예지몽? 꿔본 적 없는데.”

 “내가 오늘 새벽에 꿈을 꿨거든. 어떤 여자가 나오는 꿈이었는데 별 내용은 없었어. 그냥 그 여자 얼굴만 떠올랐던 것 같아. 무슨 신체적인 접촉도 없었고. 그런데 꿈 막판에 그 여자가 나한테 미소를 지어줬거든? 날 안아주지도 않았는데 안겨있는 느낌이었어.”

 “.”

 “그렇게 잠이 깼는데, 되게 인상적이라서 새벽부터 지금까지 계속 생각나. 이런 걸 보면 아마 단순한 개꿈은 아닐 거야. 내 생각엔 조만간 그런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예지몽이 아닐까 싶어서.”

 “그 여자가 네 이상형이야?”

 “어쩌면 그렇지. 이 여자랑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완전 마음에 들었나보네. 그런 생각도 하고.”

진모는 가위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근데 있지……. 희한한 게. 그 여자 코, 입이랑 미소는 떠오르는데. 눈이 생각 안 난다?”

 “?”

 “. 분명 꿈에서는 봤는데 말이지. 봤다는 건 기억나는데 정확한 형체는 안 떠오를 때 있잖아. 마치 옛날에 살던 동네처럼.”

 “어디서 들은 이야긴데, 꿈에서 본 얼굴은 살면서 언젠가 한번은 봤던 얼굴이라더라.”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본 적 있는 사람은 아냐.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몰라볼 리가 없어.”

 “혹시 아냐? 예전에 네가 짝사랑 하던 애일수도 있지.”

 “그런가? 아무튼 생각을 좀 깊게 해봐야겠어.”

그리고 진모는 잠시 머뭇거리다,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야 오늘은 술 안 마신다며?”

 “딱 한 병만 마실래. 술 마시면 안 떠오르던 게 떠오를 때도 있잖아.”

진모가 술병을 받아 잔에 채우려는 것을 성훈이 되려 뺏어 따라주었다.

그날 밤, 진모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집에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은 한발 내딛을 때마다 허공으로 쑥 빠지었다. 일보전진 이보후퇴를 거듭한다. 현관문을 열었다. 집으로 쏟아지듯 들어와 신발을 아무렇게나 토하고, 곧장 화장실로 뛰쳐들어 이번엔 술을 토해낸다. 변기통으로 우웩 소리들이 풍덩풍덩 빠져댄다.

한참을 그렇게 변기를 잡고 고꾸라졌던 진모는 천근같은 몸을 휘청 일으켜 세면대를 붙들고 섰다. 앞의 거울을 본다. 고역을 치르느라 얼굴은 그새 늙어버린 것처럼 죽을상이 되어 있었다. 눈꺼풀이며 볼이 아래로 죽죽 늘어지었다. 문득 그는 거울 앞으로 얼굴을 주욱 들이미어 본다. 무엇 자기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발견하려는 듯이. 그러다가 한쪽 손바닥으로 자기 코와 입을 가려보았다.

 “푸하하하핫!”

별안간의 웃음.

 “꿈속의 그녀여…… 나와…… 눈이 달므셔꾼요!”

그리고는 다시,

 “푸하학! 인연이군요!”

하고는 방으로 들어와 곧장 누워버렸다. 어떤 만족스런 미소가 누운 자의 입가에 번지었다.

 

다음 날부터 진모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꿈속 여인의 눈 생김새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의 눈과 닮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뜬 진모는 곧장 거울부터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전날 했던 것처럼 손바닥으로 자기 코와 입을 가렸다. 술에 취해 보았을 때보다 더욱 닮아 있었다. 맨정신일 때 보아서 그런 것이라 진모는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그 자세로 거울 앞에 서서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녀의 코와 입에 본인의 눈을 대입해보려는 것이다.

 “진모야, 일어났어?”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황급히 내렸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방문 새로 고개를 내민 채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해줄까?”

어머니는 전날 밤 또 술을 마신듯 눈이 뻘갰다. 그 순간 그는 방금까지 자기가 맞춰보려 했던 눈이, 어머니의 뻘건 눈을 봄으로써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어 그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방금 떠올리고 있었던 이미지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맥이 끊겨버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재차,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지.” 했을 때는,

 “괜찮다니까요?”

하고는 그만 자리에 누워버렸다.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진모는 방금은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괜히 어머니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은 없었는데 말이다.

잠시 자책하던 그는 못 다한 상상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떠오른 그것은 꿈속에서 봤던 그녀의 얼굴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눈을 끼워 맞춤으로 해서 전날 새벽부터 맞추려던 퍼즐이 드디어 풀린 것이다. 그는 꿈속의 그녀와 자신이 눈이 닮았다는 게 보통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두말할 것 없는 예지몽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제 수수께끼도 풀렸으니 그가 할 일은 꿈속의 그녀가 자기 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꿈꾸는 듯한 낯빛이 되어있었다. 그녀를 만나게 되는 날은 언제일까 상상해본다.

 

며칠 뒤, 금요일이었다. 진모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술을 마시러 갔는지 없었다. 이따금 집 아래 주차장으로 자동차 들어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린다. 그것 외에는 고요하였다. 그동안 그녀가 꿈에 다시 나온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녀의 생김새는 여전히 선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덧칠하듯 기억을 떠올려보았기 때문이다.

진모는 문득, 어디선가 웅웅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역시 주차장으로 자동차 굴러들어가는 소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진모는 이불을 걷어보았다. 휴대폰의 진동소리였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성훈 형이었다.

 “여보세요?”

 “뭐하냐, 진모야?”

 “퇴근하고 그냥 누워 있어요.”

 “금요일인데 술 한잔 하자. 나와.”

마침 적적한 참이었는데 반가워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오늘도 동네에서 보자는 것이겠거니 짐작하고 어디서 만날 건지는 묻지도 않고 몇 시에 만날 거냐고 묻자, 대뜸 오늘은 번화가에서 보자며 2시간 뒤에 만나자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옷이나 깔끔하게 입고 오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으며 성훈 형은,

 “꼭 보자.”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한다.

번화가에 나가는 것은 진모로서도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그는 아침에 했던 면도를 재차 하고 옷장에 걸려 있던 옷가지들 중 제일 구김 없는 것을 골라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버스를 타고 가며 번화가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길거리가 사람들로 점점 채워져 갔다. 이윽고 버스에서 내렸을 땐 정말로 북적북적하였다. 몇 걸음 내딛을 때마다 어깨를 부딪힐까봐 몸을 비켜야만 했다.

전화할 때 성훈 형의 말투가 맘에 걸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진모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은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형 어디야?”

 “네 뒤에.”

보니 거기 성훈 형이 씽긋 웃으며 손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오늘 만남도 이런 식으로 웃으며 시작되는 것이다. 둘은 인파를 가로질러 어느 술집으로 들어갔다. 거리와 다를 바 없이 술집 내부도 북적북적하였다. 자리에 앉아 성훈 형의 안색을 살펴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쾌한 인상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은 없어 보여 진모는 내심 안심했다. 저녁을 먹고 온 성훈과는 달리 진모는 점심 이후로 아무 것도 먹질 않아 찌개와 밥을 한 공기 시키고 반주를 했다. 그다지 의미 없는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오늘따라 반대편에 앉은 성훈 형이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진모가 무슨 일 있냐고 묻자, 성훈은 그제야.

 “사실 오늘 한명 더 오기로 했거든.”

 “누구?”

 “형 아는 여동생. 너 소개시켜주려고.”

그래서 깔끔하게 입고 오라느니, 꼭 보자느니 하는 말을 했던 것이었다. 진모가 뜬금없이 무슨 여자 소개냐고 묻자,

 “하도 꿈 얘기를 심각하게 하길래 네가 많이 외로운가보다 싶었지.”

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쩍 손을 들어 진모 뒤편의 누군가에게 인사한다. 돌아보니 여자 한 명이 부끄러운 듯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핸드백 끈을 양손으로 내려잡은 채 사근사근 걸어온다.

 “안녕하세요.”

목소리도 동작을 닮아 있었다. 조곤조곤한 말속에는 어딘가 여성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진모는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아내려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런 진모의 낯을 성훈이 슬쩍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자기 옆으로 와 앉으라고 했다.

 “, , 안녕하세요.”

그때 꿈속의 여인이 떠올랐다. 뜻밖의 상황이긴 했지만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대해오던 것이 바로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모는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척하며 반대편에 앉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동시에 꿈속 여인의 얼굴도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공통점을 찾아보려 했다.

 

반대편에 앉은 여자. 이름이 지원이라고 말하는 여자. 그녀는 첫눈에 보기에도 확실히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전형적인 미인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예쁘다, 라는 인상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분명 방금 진모가 삼킨 미소의 의미는 호감이었다.

그러나 이내 혼란스러웠다. 꿈속 여인과 틀림없이 닮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코와 입이라면 어렴풋이 닮았는지도 모르지만 눈은 전혀 닮지 않았던 것이다. 진모는 애써 부정이라도 해보듯 지원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말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속으로는 눈이 안 닮았다, 하고 되뇌었다. 다시 흘깃 바라보니 그녀는 방금 눈이 마주친 탓인지 더욱 수줍게 웃고 있었다.

술자리는 조용하게 흘러갔다. 성훈 형이 특유의 유머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노력했으나, 진모는 진모대로 꿈속의 여인과 지원이 닮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어지러웠고, 지원은 또 지원대로 줄곧 수줍은 모습으로 가끔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이지 조용하였다. 술도 잘 못 마시는지 몇 잔 마시더니 금방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면서 또 주사는 없는지 수줍은 모습은 여전했다.

가게를 나왔을 때는 자정이 조금 넘어 있었다. 성훈 형이 택시를 잡아 지원을 태워 보냈다. 그러더니 진모에게는 자기랑 다른데서 좀 더 마시다 가자고 한다. 오늘따라 술기운이 영 오르질 않아 좀 더 마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고 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북적했다. 이번에는 좀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그나마 한적하였다.

 

자리에 앉자 성훈은 대뜸 지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어지간히 궁금했는지 술도 시키지 않았다.

 “, 술부터 좀 시키자.”

소주 두병을 더 시켰다. 몇 잔을 더 주고받자 진모는 아까 마신 술에 보태어 이제야 뒤늦게 후끈후끈 술기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까는 앞에 낯선 여자가 앉아 있어 긴장하여 술기운이 오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제야 뒤늦게 몸이 달아오르니 진모 편에서 먼저 지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예쁘구, 솔직히 첫 인상은 호감인데.”

 “호감인데?”

 “닮진 않았다. 꿈에 나온 여자랑은…….”

 

말해놓고 자기도 어이가 없는지 겸연쩍게 흐흐 웃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슬쩍 맞은편을 쳐다보니 성훈은 뭐 이런 놈이 있냐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더 취했는지 눈이 풀려 있었다.

 “그래서 싫다고?”

 “싫다기 보다는…… 에이, 형두 알잖아. 그 여자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이거 미친놈이네. 야 정신 차려 임마.”

그리고 앞에 놓인 술을 왈칵 들이마시더니,

 “. 진심으로 그 여자가 나타날 거라 생각해? 꿈 깨 이 새끼야. 임마, 하도 외로워서 그러는가 했는데 정신 나갔네 이거.”

성훈이 이토록 진모에게 새끼니, 뭐니 하면서 욕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간 진모에게 유쾌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술 마시면 성격이 난폭해지는 주사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진모는 적잖이 놀란 속을 감추려 잠자코 술만 마셨다. 성훈은 진모 편에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더욱 기세를 높여 두들기기 시작하였다.

 “얌마, 마음에 든다며? 호감 간다며? 그럼 연락두 주고 받아보고, 사적으로두 몇 번 만나보구 하다가 아니면 마는 거지. ? 꿈에 나온 여자랑 안 닮아서? ……참 나.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아니 임마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는 몰랐네. 진짜. 허 참. 야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그 년 때문에 당장 니 앞에 인연이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걸 마다할려구 해? 답답한 새끼야. 답답한 새꺄.”

진모는 그가 지금 자기를 무슨 정신병자나 되는 듯이 취급하는 것 같아 속에서 불현듯 불꽃이 확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껏 한 번도 말다툼으로 관계를 상해본적이 없는 사이에서 자기 역시 발칵 화를 내버리면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참았다. 또 성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묵묵히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질러버리고 나니 성훈도 잠잠하였다.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성훈은 흥분해서 미안하다며 자기 잔을 채웠다.

 “이렇게 말하려던 게 아닌데 흥분해서 미안하다. 아무래두 지원이는 내가 아끼는 동생이구 하니까…….”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진모야. 네가 그 꿈에 대해 애틋하게 생각하구 있는 거 안다. 솔직히 나는 그런 꿈 한 번도 안 꿔봤으니 네 심정을 백 프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또 혼자 잔을 벌컥 들이킨다.

 “네 말대루 그 꿈이 뭣, 예지몽이라 치자. 치자구. 그렇다면 내 생각에는, 그 꿈에 나타난 여자가 그대루 네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냥, 곧 좋은 여자가 나타난다는 암시인거지. . 어디 꿈이란 게 구체적으로 얘기해주냐? 뭐 그, 돼지꿈이든…… 태몽이든…… 해몽이란 게 왜 있겠어?”

진모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숫자꿈두 그래……. 그 숫자가 로또 번혼지 너랑 사고 날 자동차 번혼지 어떻게 아냐구. 나무를 보지말구 숲을 봐야지. . 그 꿈에 나온 여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꿈을 꾼 이후 지원이를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알아들어?”

그럴싸한 얘기였다. 진모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은 지원이가 먼저 널 소개해달라더라. . 예전에 한 번 네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디……. 맘에 들었든 모양이야. 너두 호감이긴 하다니까 나중에 연락처 보내주께……. 연락해봐라.”

그제야 진모의 잔이 여태껏 비워져 있던 걸 알고 겸연쩍게 웃으며 채워주었다.

 

다음 날, 일어나서 휴대폰을 보니 성훈이 메시지로 연락처를 보내놓았다. 일단 번호를 저장하고 뭐라고 먼저 연락을 보내야 할지 앉은자리에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여러가지 문장들이 말풍선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일 무난한 게 낫겠다 싶었다.

 “어제 성훈 형이랑 같이 만났던 사람이에요. 집에는 잘 들어가셨어요?”

이렇게 써 보내놓고는 그대로 이부자리에 휴대폰을 던져놓았다. 민망하였다. 대충 아침을 지어먹고 다시 휴대폰을 보니 그새 답장이 와 있었다. 가슴이 설핏 뛰었다.

 “잘 들어갔어요! 진모 씨는 잘 들어가셨어요?”

잘 들어갔고 말고. 그는 진모 씨하는 지칭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답장도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던져버렸다.

어제는 수줍고 말없는 성격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얘기가 꽤 잘 통했다. 취미도 비슷할 뿐더러, 의외로 말주변도 좋아 진모가 답장하기 편하게끔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이었다. 나이도 서로 동갑이라 말을 놓기로 했다. 지원의 말투는 점점 어떤 활기 같은 것을 띄어갔다. 진모는 그녀의 이런 반전적인 모습에서 다시금 매력을 느꼈다. 원래 있었던 호감이 더욱 두터워졌다. 하루 사이에 둘은 부쩍 친해져 가까운 시일 내로 영화도 보러가기로 했다.

그는 문득, 너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찌됐든 자기는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꿈속의 그녀를 찾아 헤매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불과 하루도 안 되어 다른 여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설렘을 느끼고 있다니. 이래서야 될 일인가 싶었다. 아직까지 그 꿈이 지원을 암시하는 것이라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바로 다음날 영화관에서 지원을 마주하자 눈 녹듯 사그라졌다. 어차피 내일도 일요일인데 자기는 그날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으니 너도 그렇다면 바로 만나자는 지원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막상 이렇게 마주본 지원은 엊그제 봤을 때보다 더욱 예뻤다. 전의 수줍은 미소만큼은 또 여전하였는데, 그녀의 주변에서 피어나는 은은한 향수 향기 덕분에 어떤 신비감까지 느껴졌다.

그제야 성훈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자기가 꿨던 그 꿈은 예지몽이 맞다. 하지만 만나게 될 여자가 누군지도 예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장처럼 꿈속의 여자가 아닌, 꿈같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 해몽이었다.

진모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의문의 응어리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운명의 그녀가 지원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되레 무방비 상태가 되어 그녀에게 열렬해졌다.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방해물이 사라지자 그의 감정은 댐이 방류하듯 엄청난 물살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쏟아졌다. 영화를 본 다음날은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났다.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그리하여 이제는 되레 진모가 지원에게 언제 만나자 하고 제안하는 형편이었다. 실로 급격한 태세 전환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싫지 않았기에 정말로 급하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흔쾌히 좋다고 하는 것이었다. 진모는 역시 우리 사이는 운명이기에 만나는 것마저 문제없이 잘 풀리는 것이라 여겼다.

어느 날 밤이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모는 지원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녀의 팔이 알게끔 떨렸다. 그러나 거부감은 없었다. 잡은 채로 슬쩍 바라보니 푸욱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때 그녀는 어떤 얼굴일까. 궁금하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까이 하였다. 그러는데 마침 지원도 이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순간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러자 누구랄 것도 없이 와락 달려들어 입맞춤을 하였다.

그날로부터 둘이 연인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일 터. 다음날 진모가 황홀한 기분으로 자고 있는데 웅웅 휴대폰 진동이 울려 잠결에 받아보니 성훈이 비웃는 목소리로,

 “내 그럴 줄 알았다!”

하고 바로 뚝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진모는 기분 좋게 다시 전화를 걸어 다음에 자기가 술 한 잔 사겠다고 했다.

 

한편 진모의 어머니는 여전히 술을 절제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아침에 깨면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출근 때문이라 여기고 이해했으나 요즘은 퇴근 시간에 집에 오는 일이 없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기에 안 그래도 별 교류가 없던 사이가 더욱 멀어진 느낌이었다. 회식이겠거니 생각도 해보았으나 회식을 그리 자주할 리도 없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니며 옷에서 고기 냄새도 나질 않아 그것은 아닌성싶었다. 다른 예감이 들었다.

며칠 뒤, 진모가 또 밤늦게 돌아오자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던 그녀는 다가가,

 "진모야.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 그녀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역시 자기가 생각한 것이 맞았다.

 "여자 만나는 건 좋은데…… 혹시라도 너 결혼하게 되면 엄마는 어떡하지?"

 "……결혼이 뭐 그리 쉬운 일인가요.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하고 진모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그로서도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진모와 지원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은 사이가 되어갔다. 이제 공식적인 연인 사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지원은 지원대로 자신의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해주었으며 진모 또한 그녀를 만나게 해준 운명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종종 진모는 예전에 꿨던 꿈을 떠올리곤 했으나 그것은 이제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라는 인식이었다. 꿈속 그녀와 지원이 눈이 닮지 않은 것에 나름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지원은 꿈속 그녀와 코, 입이 닮았고 자기는 눈이 닮았으니 지원과 나를 합치면 꿈속의 얼굴인 것이다.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는 마리아 에지워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보내는 날들은 순간순간이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시간은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돌아보니 사계절은 이미 한 번씩 옷을 갈아입었고, 두 사람은 결혼을 얘기하고 있었다. 지원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 미래의 장인, 장모가 될 두 분께서 진모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진모의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일이었다. 일찍이 지원은 진모가 아버지 없이 어머니하고만 산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편부모 가정이 부끄러운 것이 어디 초등학생 때뿐이지 번듯한 성인이 된 지금은 티끌만큼도 맘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지원은 어서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했다.

진모는 머뭇거렸다. 어쩐지 예전보다 취해있는 일수가 부쩍 늘어난 어머니를 지원 앞에 보이기가 두려웠다. 더군다나 어머니도 이미 지원과 본인의 사이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혼에 대해선 회의적일 것이었다. 그러나 결혼 전에 며느리 될 사람을 어머니께 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다음 날, 퇴근 후에 진모는 어머니께 가서,

 "이번 주 토요일에 지원이 데리고 인사하러 올게요."

하고는 부디 그날 취해있지만 마시라는 말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아들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일말의 기대도 품어보았다. 그러나 절망적이게도 그녀는 금요일까지 취해 있는 상태였다.

토요일 점심, 진모가 지원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나갈 때까지도 그녀는 술에 취한 채 방에 누워 자고 있었다. 진모는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된 이상 지원에게 어머니의 못 볼꼴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지원을 데리고 현관문 앞에 선 진모는 제발 어머니가 거동을 가누지 못할 만큼만 취해있지 않기를 바라며 벨을 눌렀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벨을 누름으로서 마지막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쿵쿵쿵쿵, 점점 이쪽으로 커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퍽 규칙적이었다. 문이 열렸다. 진모는 조심스럽게 안을 쳐다보았다.

 "어서 들어와요. 네가 지원이구나!"

의외로 그녀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자태로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기 싫게 널려 있던 머릿발은 다소곳이 빗어 넘겼고 항상 맨얼굴이던 분이 오늘은 곱게 화장까지 하셨다. 평소보다 십 년, 어쩌면 이십 년은 더 젊어보였다. 여태껏 함께 살면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어머님 안녕하세요. 정말 미인이세요!"

 "어쩜 이리 고와? 꼭 젊었을 때 나 보는 거 같네! 호호."

두 여인이 반갑게 인사했다. 진모는 기분이 묘했다. 어머니의 낯선 모습 때문일까.

집으로 들어가니 그 많던 소주병은 흔적도 없었다. 답답하게 피어오르던 술 냄새 대신에는 상쾌한 향기가 났다. 거실에 이미 방석과 상이 놓여 있었다. 거기 앉았다.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적어도 지원과 진모의 어머니에게는. 둘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서로에게 좋은 말만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모는 하려는 말을 언제 꺼내야 할지 몰랐다. 아무래도 신혼부부가 어머니와 함께 살기는 불편한 것이다. 와이프를 위해서도 그것이 옳은 결정일 테고, 본인 역시 예전부터 은연중에 어머니와 다시 따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말하려면 역시 오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지원과 어머니가 웃고 떠들고 있다면 곤란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어머니가 현명하신 분이었다면 먼저 알아채고 말씀해주셨을 텐데. 이런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신혼집은 아직 안 구했지? 그러면 이 집에서 살거라. 이미 나는 따로 집을 봐뒀으니까 거기 가서 살면 돼."

속이라도 읽힌 것일까. 진모는 적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벌써 그런 것까지 생각해두고 계셨다. 그것도 모른 채 자기는 오늘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것은 지원도 마찬가지였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손님 왔는데 과일이라도 좀 내야지."

화제라도 전환시키려는 듯 어머니가 일어선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가져왔다. 앨범이었다.

"이거라도 좀 보고 있어요. 진모 어릴 때 사진 모아놓은 건데 얼마나 귀여웠는지……."

이런 앨범이 있는 줄은 진모도 몰랐다. 얼른 앨범을 폈다. 지원도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운 얼굴들도 지나갔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진모는 문득 가슴이 먹먹해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는가 하는데,

 "어머! 이거 자기랑 어머니 아니야? 어머니 완전 미인이시다!"

지원이 사진 한 장을 꺼내들어 진모의 눈앞에 내보였다.

사진 속에는 어린 그를 안은 꿈속의 여인이 미소 짓고 있었다.

 “자기 눈은 어머니 닮은 거구나!”

부엌에서 어머니가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냐는 듯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모자 성명 : 이정민

이메일 : al_bowlly@naver.com

연락처 : 010-9169-2708

  • profile
    korean 2016.08.30 01:24
    잘 감상했습니다.
    열심히 습작을 하시면 좋은 결실을 이뤄내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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