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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어둠 속의 반구(半球)

1

덜커덩 거리는 둔탁한 기계의 마찰음에 난 순간적으로 의식을 되찾으며 눈을 떴다. 짙은 안개의 얇은 막이 여러 겹 겹쳐 보이는 듯한 잿빛의 배경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뿌연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서서히 짙게 깔린 공기 속에서 불분명했던 사물들의 윤곽이 어렴풋하고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앞 좌석의 등받침이 순간 살아있는 어떤 형상처럼 꼿꼿이 서서 나를 기울여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불분명한 의식의 몽롱함에서 기인한 사물의 왜곡된 모습 때문인지, 내 몸은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갑갑함으로 경직됐다. 좌석이 몸에 꼭 끼어 움직이기가 버거웠고, 그 때문에 더더욱 숨통을 죄어오는 갑갑함이 정체불명의 희뿌연 연기처럼 섬약한 내 몸을 휘감아 가며 무력감의 늪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날 대항할 수 없는 어떤 상태에 빠뜨렸다. 무의식의 시커먼 물 속에 빠져 허우적 거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바람에 온 몸에 힘이 빠져갔다. 실제로 몸을 움직였는지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빠르게 넘나들고 있었다. 잠시 뒤,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은 난 몽롱한 상태로 힘겹게 뻐근한 목을 최대한 위로 젖혀 주변을 둘러봤다. 간간이 사람의 뒷통수로 보이는 까만 공의 윗부분과 같은 반원형의 테두리 선은 옅은 어둠과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고, 또 서서히 허물어뜨리면서 그 영원한 심연 속으로 사그라들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몸을 숨기고 불멸의 수렁 속으로 낱낱이 분해되기를 원하는, 진정한 그리고 깊은 휴식을 원하는 생에 지친 반구(半球)들. 지금이 새벽 시간때라 기차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건가? 새벽은 맞는 걸까? 깜빡 졸은 것 같은데 지금 몇 시나 된 거지? 도착하기까지는 얼마나 남은 걸까? 일몰 직전인지 일출 직전인지 가늠할 수 없는 애매한 시간대의 어슴푸레한 박명이 공기 중에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내 눈 앞을 지나가던, 옅은 어둠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천천히 부유하고 있던 먼지 한가닥은 미로 속에 갇힌 나의 생각들과 의혹들을 일시에 불식시켰다. 먼지는 마치 곤충의 시체에서 막 기어나온 기생충처럼 허공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종착지를 잃은 듯 배회하며 자신의 몸을 오직 공기의 흐름에 내맡기고 있었다. 주위는 너무도 조용했다. 방금 전 내 무의식의 터널을 관통하며 지나간 열차와 선로의 차가운 금속 마찰음과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몇몇 사람들의 가느다란 숨소리 외에는 온 사방에 싸늘하고 무거운 정적만이 소복히 내려앉아 있었다. 초침을 무겁게 짓누르는 잿빛의 옅은 어둠은 드문드문 들려 오는 그 미약한 소리들마저도 사라져 줄 것을 엄중히 요구했고, 이내 그 소리들은 짙게 깔린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녹아내렸다. 옅은 어둠과 정적은 감각 치환을 통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우호적 관계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난 옅은 어둠이 내는 정적을 귀로 들을 수 있었고, 겹겹으로 쌓인 잿빛 막의 정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정신이 점점 몽롱해져 가고 있었다. 몸에 점점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약에 취한 듯 나른해지고 기분이 얼마간 좋아졌다. 시야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몇몇 불분명한 형태의 검은 물체만이 둥둥 떠다녔고, 귀에는 나의 숨소리를 넘어 정적의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지며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머릿속을 온통 감싸는 의식의 끈이 점점 더 날카롭고 팽팽해지고 있었다. 그 끈에는 살짝만 건드려도 즉각적이고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어떤 울림이 내재되어 있었고, 그 공명은 내 몸을 휘감싸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듯했다. 이내 나를 둘러싼 옅은 어둠의 수 많은 막들은 정적만이 지배하는 무의식의 심연 속, 소용돌이치며 나를 집어삼키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그 거대하고 알 수 없는 암흑의 입 속, 그 곳으로 날 뚝하고 떨어뜨렸다.

2

칠흑같은 어둠이 꾸덕한 진흙처럼 온 사방에 깔려 있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마치 어둠의 딱딱한 표피에 생채기가 나 구정물이 뚝뚝하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광막한 어둠 속 내려앉은 어느 한 점, 어딘지 짐작조차 안 될 공간에 난 멀뚱히 서 있었던 것이다. 왜 이 어둠에 갇힌 채 서 있는지, 우산도 하나 없이 왜 비를 맞고 서 있는지, 어디로 가는 중이였는지 난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나를 뚝 하고 이곳에 떨어뜨려 놓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현실 자각적인 의문들은 지금 내게 전혀 중요치 않았고, 내 관심은 그저 마음 속 기저에서 얕은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요동치는 그 불안은 내 마음 속 어딘가 놓여져 있는 정체불명의 커다랗고 까만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채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미세한 불안의 조각들은 힘차게 흘러나오는 연기처럼 나의 몸뚱아리 이곳저곳에 깊숙히 퍼져나갔고, 서서히 근육의 주름 하나하나를 긴장으로 중독시키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길의 한쪽 가장자리에 드문드문 위치해 있는 진회색의 가로등은 짙은 주홍색 빛을 가까스로 토해내듯 아주 약하게 발하고 있었고, 그 빛만이 온전한 어둠 속에 갇힐 뻔한 나에게 작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손길은 도움을 가장한 일시적인 호의일뿐, 종국에는 어둠 속으로 나를 떠밀어 버리려는 듯한 묘한 어색함과 긴장감이 서려있었다. 야릇한 주홍색 빛은 내 앞에 놓여진 어둠의 길을 칼로 토막내듯이 띄엄띄엄 비추고 있어 길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앞으로 길게 죽 이어져 있었다. 그 길은 수평선에라도 닿을 듯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고, 그 끝자락은 어둠의 기나긴 혓바닥을 거쳐 암흑의 단애인 목구멍에서 소실점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로등에서 뿜어내는, 거의 명멸하기 직전의 주홍색 빛은 어둠을 희석시키는 단순한 밝음을 넘어 어딘가 모르게 병적인 섬뜩함과 고독한 환상감마저 불러일으켜 어둠의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불어온 싸늘한 냉기와 축축히 온 몸을 적시는 빗줄기는 일말의 동정심마저 상실한 어둠이 보내는 냉소인 것만 같았다. 팔과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덜덜 떨렸고, 몸의 곳곳에서는 작은 경련들이 불안과 추위에 지친 듯 발작적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길의 오른편은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온통 메워져 있었다. 벽 상단에는 건너편을 전혀 볼 수 없도록 윤형 철조망이 두겹 세겹 겹쳐져 놓여 있었다. 콘크리트 벽 바로 옆에 붙어있는 가로등만이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며, 단조로움과 권태 속에 빠진 이 풍경에서 활력을 넘어 환상의 미약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왼편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반대편의 가로등 불빛이 간신히 그 주변까지 미치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고 어렴풋한 외곽선의 스케치가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둥근 돔 형태의 곡선이 어둠 사이를 부드럽고 완만히 갈라놓고 있었고, 그 주위로 삐죽삐죽 솟아있는 직선들도 아지랑이처럼 몸을 흔들며 허공에서 불안한듯 배회하고 있었다. 난 자의적인 힘이 아닌 꿈에 취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몽유병자처럼 한걸음씩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기 싫은 듯 질질 끌리며 땅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한 스무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가로등의 탁한 빛이 서서히 머리 위로 음울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 때, 왼쪽 발이 땅으로 깊숙히 파묻히는가 싶더니 미세한 유리 알갱이들이 공중에서 흩뿌리듯 발 밑에서 수천개의 작은 물방울들이 솟구쳐 올랐다가 이내 떨어지는 빗방울들과 합쳐졌다. 물방울들과 빗방울들은 서로 한 몸인듯 뒤섞여 물구덩이 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작은 물구덩이에 빠진 내 왼쪽 발을 황급히 끄집어 올렸을 때는 이미 발 전체가 흠뻑 젖어 신발 끝에서 물이 주르륵 하고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작은 물구덩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시커먼 물은 범접하지 못할 오염성을 지닌 악의 배설물 같이 느껴져 순간적으로 목 끝까지 신물이 치솟았다. 왼쪽 발로부터 온몸으로 전이된 어둠의 찌꺼기들은 내 몸 전체를 비참함과 막막함의 깊은 수심에서 발버둥 치게 만들었고, 빗물에 젖어 무거워진 옷가지들 역시 내 양쪽 어깨를 사정없이 짓누르며 날 어둠으로 점철된 그 구정물 속에 익사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 때, 왼쪽 방향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아주 빠르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무엇으로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날카롭고 찢어지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 소리 같기도 하고 호소하는 듯한 애절한 흐느낌 같이 들리기도 했다. 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좁은 샛길 하나가 나무에서 뻗어나온 가지처럼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소리는 무겁게 깔려 있던 정적을 빠르게 허물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에, 난 아주 잠시동안 환청을 들은 듯 멍하니 비현실감의 몽롱한 상태에 빠져있었다. 희미하게 내리쬐는 가로등 불빛은 샛길의 입구 부근만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고, 그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은 어둠의 무겁고 진득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그 어둠 속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난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소리였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의 그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날카로운 창처럼 내 몸을 가차없이 찌르고 있었지만, 감정의 평형을 맞추려는 듯이 한편으로는 알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랄까 힘이 강하게 일어났다. 범접하지 못할지도 어쩌면, 범접해서는 안 될지도 모르는 그 영역으로 난 홀린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로등 불빛이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그 명암의 경계선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다시 한번 야릇하고도 처절한 그 소름 돋는 소리가 바로 내 앞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 그건 결코 알 수 없지만, 난 어둠 속에서 그 무언가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볼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를 만큼 얼마나 빨리 샛길에서 빠져 나와 미친듯이 앞만 보고 달렸는지, 그저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곧 터져버릴 것 같이 뛰는 내 몸의 현상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내 시야의 왼쪽 편에는 탁한 주홍색 빛이 병적인 환상감을 발하고 있었고, 난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들이 머리카락을 타고 볼 양 옆을 간지르며 지나가 턱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오른쪽 편에는 곡선과 직선이 어지러이 뒤섞여 허공 속에 떠도는 망령처럼 어스름의 심해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난 저 멀리 광활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듯 하면서도 뚜렷이 어떤 형상이 드러나고 있음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무지의 한계에 굴복한 나의 연약함과 비겁함에 경멸의 냉소를 보내는 듯한 혹은 그런 모습에 연민을 느껴 흐느끼는 듯한, 아무튼 멸시와 동정이 혼합된 야릇하고 섬뜩한 양쪽 입꼬리가 어스름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고 또 드러났던 것이다. 어렴풋한 환상처럼 보였지만, 그럴수록 그 모습은 부인할 수 없는 어떤 형태로써 뚜렷한 현실감을 동반한 채 그렇게 거기에 존재해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기괴하고 섬뜩한 사실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했고, 두려움에 떠는 몸뚱아리를 거칠게 돌려 다시금 미친듯이 앞으로 뛰어갔던 것이다.    

3

「어디 갔었어? 한참을 찾았잖아.」

어느 순간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낯이 익은 그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방금 그가 내 이름을 뭐라고 불렀지? X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Y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내 이름을 부르긴 했을까? 아무튼 그가 나에게 말하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저기 좀 둘러보느라고.」 「뭐 좀 찾은 거 있어?」 「아니.」 「어서 가자. 이럴 시간이 없어. 한시바삐 여기를 벗어나야지.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불안해져.」 「그래.」 「일단 비를 좀 피할 수 있을 만한 곳부터 찾아보자.」

가로등 맞은편 길 위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쫒기듯이 빠른 걸음걸이로 어둠을 헤쳐 나갔다. 그나마 간간이 보이는, 곧이라도 사그라져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우리가 지금 어둠의 두터운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탁하고 꺼지는 순간에는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우리라는 작은 점들은 암흑의 일부가 되어, 개별적인 존재가 규명될 수 없는 공허, 그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르게 그리고 깊숙히 분해되어 녹아내려 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가로등 근처에 다다랐고, 어둠과 결부되어 차갑게 느껴지는 주홍색 빛이 우리의 머리 위로 서서히 내리쬐기 시작했다. 어둠에 희석되고 왜곡된 주홍색 빛은 한층 더 묘하게 수줍은 광기어림을 내뿜으며 우리와 우리 주위 사물들의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에게서 한걸음이나 두걸음 정도 뒤쳐져 가던 나는 그의 개성 없는 시커먼 옷 끝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봤다. 내 눈이 가로등 빛에 마비가 되었는지, 점퍼인지 셔츠인지 모를 그의 상의와 투박한 민무늬 하의는 온통 주홍색으로 보였다. 그의 새카만 뒷통수는 가로등 빛이 내리쬐는 방향인 왼쪽 부분만 드러나 있었고, 나머지 오른쪽 부분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머리는 걸을 때마다 좌우로 살짝씩 흔들렸고, 왼쪽 뒷통수에 미역 줄기처럼 붙은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 착 가라앉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번들거림을 넘어 반짝이기까지 하던 그의 젖은 머리카락과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는 뒷통수를 보고 얼마 후 난 낯섦의 당혹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혀 본 적 없는 그 누군가가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것이었다. 생경함을 넘어 이질감까지 느껴지는 그의 뒷모습은 잠시나마 나 자신에 대한 의혹까지 품게 만들었다. 그가 날 부르며 다가왔을때 느꼈던 그 친숙함의 정체는 대체 어떤 것이였고 지금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난 대체 그를 누구로 인식했던 걸까? 어둠 속에 반쯤 가려진 그를 어렴풋이 처음 인식했던 방금 전의 상황이 블랙아웃처럼 뚝하고 끊겼고, 그저 내 앞에는 희미한 빛에 연명해 갈 곳 잃은 듯 둥둥 떠다니는 낯선 반구(半球)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4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그래.」 「아무래도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출발하는 게 좋겠어. 그때쯤이면 비가 그칠지도 모르고.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우리 앞으로는 내 키 정도 되는 둥근 돔 형태의 가건물 하나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슥슥하고 내 발목 주위로 뭔가 부드럽게 스치고 가는 소리는 습기로 가득 찬 풀들이 내는 마찰음 같았다. 짧은 풀 사이사이에서는 물기에 젖은 대지의 향내가 주위로 가볍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가건물 양 옆으로는 앙상하게 나뭇가지만을 드러낸 이름 모를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고독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두 그루의 나무는 가건물 주위의 착 가라앉은, 생의 활력이 소멸한 듯한 기운의 내부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듯 해 보였고, 그 기운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어둠의 흔적이 가진 비밀조차 꿰뚫고 있는 듯 했다. 나무 꼭대기는 어둠에 가려져 아예 보이지 않을 만큼 내 머리 위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모습은 이 곳의 분위기를 쓸쓸함과 고독함을 넘어 음산하고 섬뜩하게 만들고 있었다. 수십 년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방치된 음지 속에서 자란 야생꽃처럼 그 가건물과 두 그루의 나무가 주위로 뿜어내는 강하고 독한 기운에는 묘한 엄숙함과 숙연함이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가건물 입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고, 그는 철로 된 둥근 손잡이를 가볍게 돌렸다. 손잡이의 녹슨 부분 때문인지 빼싹 마른 잎이 바스러지는 듯한 가벼운 파열음이 귀를 빠르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팔 힘만으로는 문을 열 수 없는지, 손잡이를 돌린 채 가볍게 몸을 부딪혔다. 문은 잠시 버티는 듯 하다가 쿵하는 짧은 단말마를 거칠게 내뱉으며 비스듬히 열렸다. 우리가 그 문을 통과해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오래된 먼지와 흙가루의 매캐하고 텁텁한 냄새가 우리를 덥쳤다. 먼지와 흙이 합쳐진 그 냄새에는 골분에서 풍기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랄까 인생에 대한 무상함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권태에 지쳐 그 곳을 빠져나갈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것처럼 미세한 수십억개의 먼지 가루들은 우리의 온몸을 무자비하게 치고 문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해방의 짜릿함을 채 느끼기도 전에, 먼지 가루들은 순식간에 대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들이 떠나간 실내엔 약간의 씁쓸한 짧은 여운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우리의 옷 끝자락을 통해 뚝뚝하고 빠르게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이 단단하게 꽉 차 있는 실내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고 그의 움직이는 소리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겼다. 난 손을 뻗어 소심하게 휘저으며 최대한 방어적으로 앞으로 움직였다.

「여기로 와.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 잠시 앉아있자.」

그의 목소리가 어둠의 물결을 타고 흘러왔다. 그 목소리는 마치 어떤 살아있는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어둠 속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되어, 텅 빈 곳을 외로이 돌아다니는 망령과도 같이 내 귀에 와닿았다. 허공에서 머무르다 사그라들 어둠의 공허한 울림처럼.

「여기야 여기. 여기 앉아. 근데, 아까 너 혼자 어디론가 갔을 때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응.」 「진짜야?」 「그렇다니까...」 「왜냐하면, 아까 너랑 마주치기 전에 어떤 소리를 들었거든. 웃음소리랄까? 울음소리랄까? 아무튼 기묘한 소리였어. 너가 달려오던 그 방향에서 들리던데? 그래서 물어보는거야.」

나 자신의 손조차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 갇혀 있었지만, 난 그의 의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가 보이는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그의 각진 눈매가 내 눈동자에 품고 있는 진실을 캐내려는 듯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동그란 눈동자가 만들어 내는 온전한 원형은 점점 커져 결국 내 앞에 당도하더니,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의 집념과도 같은 불꽃이 그 원 주위를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 원은 가려지거나 감춰진 부분이 전혀 없는 온전한,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도 교만한 구(球)였다. 하지만, 난 정말 본 게 없었다. 설령 뭔가를 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두려움이 만들어 낸 환상일 뿐, 실체가 아니었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기괴한 소리를 내는 입꼬리는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모습이자 사실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적의 상태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 앞에서 어른거리던 원형도 결국 내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서히 사라져갔다. 물결이 서서히 잔잔해지며 파동을 줄여가듯 그 원형은 외곽부터 서서히 와해됐고, 먼지보다 훨씬 미세한 가루로 흩어져 현실의 저편으로 조용히 흡수되고 있었다.

「알았어.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눈 좀 붙이고 있자.」

그는 내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변이 너무 조용해 그의 얕은 숨소리 마저 없었다면, 그가 옆에 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둠이 흩뿌리는 정적은 우리 주위로 수북히 쌓여갔고, 난 벽에 등을 기대고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딱딱한 벽 안에 숨어있던 서늘한 기운이 내 등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빗물에 흠뻑 젖은 몸에 오한이 찌릿하며 척추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고, 문 밖으로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탁한 먼지 가루들은 입안에 텁텁함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텁텁함은 무지로 가득 찬 상황과 감정, 그리고 존재에 대한 알 수 없는 답답함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어둠과 정적 속에서 난 알 수 없는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5

갑갑한 느낌이 든다. 온몸을 누군가 옥죄고 있는 듯 아니면 머릿속을 어떤 틀로 꽉 잡아 놓은 듯 숨이 막히고 심장이 막 두근거린다. 팔 한쪽 조차도 들지 못할 정도로 뭔가 거대한 막에 쌓여 있거나 막혀 있는 듯하다. 몸을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는 어떤 관(悺)에 갇혀 있는 걸까? 영원히 출구가 없는 좁고 답답한, 텁텁한 먼지와 흙으로 가득 찬 그 곳. 아니면 그저 그런 느낌일뿐인,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또 다른 나라는 허구의 존재가 보내는 어떤 위험의 신호인걸까? 그 갑갑한 느낌에는 지독한 어두움도 한 몫하고 있다. 시야라는 백색의 화폭에 검은 물감을 쏟아 놓은 듯 주위는 온통 캄캄하다. 그 자체로써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우리의 감정마저 지배하는 어두움, 그것은 무엇일까? 어두움 뒤에 정말로 어떤 실체가 버티고 있는걸까? 그 실체에 대한 감정은 태고의 무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두려움일까? 순간, 몸이 가볍게 들썩이고 난 뒤 난 내가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자의적인 움직임이 아닌 어디론가 향해 가는, 향할 수 밖에 없는 숙명에 처한 비운의 바퀴처럼. 뒤쪽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엔진소리가 대기의 저변에 깔린 배경음처럼 내 귓바퀴를 끊임없이 돌고 돈다. 그 주위로 빠르게 뭔가 옆을 지나가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아주 잠시 뒤에 그 소리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듯 사라진다. 난 어디 있는 걸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차를 타고 있는 걸까? 눈을 떠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눈꺼풀이 너무나도 무겁다. 안간힘을 써 눈을 떠보려 하지만, 이미 뇌의 통제에서 벗어난 눈꺼풀은 굳건하게 눈 위에 버티고 서서 아주 조그만 틈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귓바퀴를 돌고 도는 소리들의 불협화음은 참기 힘든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고, 내 신체기관의 불협화를 마음껏 비웃고 있는 듯 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눈이 번쩍 떠짐과 동시에 난 순간적으로 내 옆을 빠르게 돌진해 오는 어떤 빛을 본다. 그리고 나선 내 몸이 공중에 붕 뜬다. 그저 저 멀리서 명멸해 가는 것 같던 그 작은 빛은 정말 순식간에 내 눈 앞에 당도해 있고,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몸집으로 내 몸을 집어삼키는 듯하다. 기차 창문으로 비치는 한 줄기의 가는 빛일까? 흐리멍텅한 주홍색 빛을 내는 잿빛의 가로등일까? 맞은 편에서 오던 차일까? 그 빛은 존재 자체의 명암을 쉽게 구분짓고 판단하는,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한 지각의 한계, 그 저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무언가처럼 보인다. 그저 온통 새하얀, 시각적인 경계를 훌쩍 뛰어 넘어 오관의 오만을 모두 허물어뜨리는 그런 강렬함이다. 새하얀 벽지로 온 세상이 도배된 것 같은 그 짧은 순간 속에서 난 커튼 주름처럼 뭔가 물결처럼 출렁거림을 본다. 제각기 움직이던 그 출렁거림은 어느새 양쪽으로 갈라서 도열한다. 그 모습은 마치 비웃음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입꼬리같다. 냉소와 멸시가 가득 찬 입꼬리.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괴기스러운 소리가 입꼬리를 거쳐 흘러나온다. 목을 뭔가로 긁는 듯한 끽끽하는 불안정한 음정의 소리가 꽉 막힌 식도에서 가까스로 삐져 나오는 듯 하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불안과 공포에 가득 찬 내 눈을 보고 웃는걸까? 나의 한계로는 자신의 존재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웃음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정말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왜 이 상황에 놓여있는지. 내 눈에 정말 불안과 공포가 담겨있는지. 괴상한 입꼬리의 존재가 왜 자꾸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지. 그 입꼬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대체 나는 누구인지.           

6

순간적으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꿈인지 몽상인지 모를 그 애매한 공간 속에 빠져있던 날 일깨웠다.

「일어나. 이제 출발하자. 벌써 날이 밝았어.」

그의 뒷통수가 어렴풋이 보였다. 어느새 새카만 어둠은 물러가고 희뿌연 연기와도 같은 진회색빛의 공기 막이 주위에 온통 둘러쳐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내 사라질 연기의 끝자락과도 같이 몽롱하고 희미하게 내 귓속을 파고 들어왔다.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벌써 둥그런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난 안 갈래.」 「안 간다고? 날이 밝을 때 출발해야지. 어제처럼 어두울 때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어.」 「뭘 찾아야 되는데?」 「뭘 찾아야 되냐니? 여기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지. 그리고...」 「그리고?」 「어제 들은 그 이상한 소리의 실체도. 말은 안했지만, 어제 우리가 마주치기 전에 너가 뛰어오던 방향에서 난 분명히 들었어. 그 기괴한 소리 말이야. 그리고 나서 얼마 뒤 너가 뭔가에 홀린 듯 미친 사람처럼 뛰어오던 모습도.」

난 회색빛 대기 속으로 경계를 슬며시 허물고 흐릿하게 번져가는 검정색 물감같은 그의 뒷통수를 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머리 전체가 시커먼 털에 뒤덮인, 표정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는 설인처럼 느껴졌다.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무지의 성벽을 허물 수 있는 듯 해 보여도, 거짓된 자신감의 자기기만에 빠져 있더라도, 그의 모든 신체기관이 긴장과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너 어제 정말 거기서 아무것도 못 본 게 확실해?」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니?」 「기억이 잘 안나. 필름이 끊긴 듯 가물가물하고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확신이 들질 않아.」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는 힘겹게 하지만 어떤 결심이 섰다는 듯 천천히 입을 뗐다.

「그래... 넌 같이 안 갈꺼야?」 「응.」 「알았어. 그러면 나 혼자 갈게.」

그는 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렸고, 녹이 슬어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잡이를 당겼고, 문은 약간 주춤거리며 비스듬히 열렸다. 밖의 시원하고 맑은 공기가 순식간에 실내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향긋한 풀내음, 구수한 땅 냄새가 약간 비릿한 비 냄새와 합쳐져 수분기 가득한 자연의 향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 비는 언제 그쳤는지, 더 이상의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그저 어딘가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툭툭하고 가볍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열린 문으로 빛이 거대한 막에 부딪혀 수 없이 굴절되고 희석되어 그 본연의 색깔을 잃어버린 듯한, 지치고 권태의 수렁에 빠진 듯한, 무언가에 억압받아 짓눌린 희미한 움직임처럼, 텁텁하고 숨막히는 진회색의 옷을 입고 실내로 저벅저벅 들어왔다. 밖은 한 치 앞도 내다 보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짙게 깔려있었고, 한 발짝만 문 밖으로 내딛는 순간 어디에 떠 있는지도 모를 구름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불분명한 대기의 미로 속에 갇힐 듯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안개를 가장한 채 유독가스처럼 꾸역꾸역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그 중심으로 그가 발걸음을 내디뎌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확신이 들지 않고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그 무언가를 향해. 그가 서서히 두터운 안개를 뚫고 그 안으로 해체되어 아주 조심스럽게 흡수되고 있는 듯 했다. 난 그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기 전 다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

「잠시만, 근데 너 내 이름이 뭔지 알아?」

왜 그를 향해 그런 질문을 했는지, 그런 질문이 이 상황에서 적절한지, 그리고 그 질문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난 입 밖으로 내뱉은 직후에야 깨달았다. 정말로 그게 궁금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에 아무 말이나 했던 걸까? 하지만, 순간 그가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있는지, 있다면 맞게 불렀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는 나의 돌발적인 질문에 그 자리에 정말 아주 잠시동안 꼼짝 않고 서 있더니,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까만 머리가 시계뱡향으로 정말 천천히 돌아가더니 어느새 가려져 있던 부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난 순간적으로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민낯이 드러나지 않기를, 그의 까만 머리카락이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난 그의 대답과 그가 지을 표정을 감당해 낼 준비가 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였다. 천천히 상체의 일부와 함께 돌려진 그의 얼굴 반쪽은 나를 향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멀리 안개 낀 허공을 지그시 주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난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갈 곳 잃은 듯 서 있는 그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에 붙어있는 그 신체 기관들의 조합을 내가 한번이라도 전에 접해봤던가? 생소하고 낯선, 그런 불안과 긴장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다시금 솟구쳤다. 그의 얼굴은 잿빛의 배경속으로 흐릿하게 번져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난 그의 얼굴 세세한 부분까지 더 잘 보이는 듯했다. 그의 입은 무슨 말을 하는지 끊임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쉴새 없이 형태를 바꿔가며 움직이고 있는 그의 입 양쪽으로 난 입꼬리도 입가 주위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며 짧은 파동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애절하게 흐느끼는 듯한, 가볍게 냉소짓는 듯하며 끊임없이 형태가 변하고 있어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제자리로 돌림으로써 모호함에 빠져있던 나를 다시금 각성케 해주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그렇게 짙은 안개 속으로, 서서히 일몰하는 하늘의 배경처럼 저릿한 여운을 남기며 내 눈 앞에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난 그가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그는 연기 속 그 어느 공간으로 흔적도 없이 잠적해 들어갔고, 그가 있었던 공간에는 그저 그가 남기고 간 기억의 희미한 끈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끈은 정말 위태롭게 큰 폭으로 요동치고 있었고, 야속한 시간의 흐름은 그 끈을 더 장난스럽게 잡아당기며 끊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환경에 의해 변질되기 쉽고, 실재와 허구를 넘나들며 우리를 현혹시키는 의식의 모호한 끈. 그 끈은 어느새 너무도 팽팽히 양쪽으로 당겨져 있었고, 난 그 연약한 끈이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끊어질 것임을, 그리고 나라는 존재도 그에 따라 의식과 무의식의 불분명한 경계를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넘나들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7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 나는 아직도 잿빛의 흐릿한 공기 속에서 탁한 먼지가 온몸에 흩뿌려진 채 좁은 의자에 파묻혀 있음을 깨달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쇠의 마찰음은 긴장으로 둘러쳐진 고요함을 뚫고 빠르게 지나갔다.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세하게라도 이어지던 사람들의 숨소리가 어느새 뚝 끊겨 있었다. 난 힘겹게 고개를 살짝 위로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희끄무레한 배경 속에서 아까와 같은 자리에 똑같은 수 만큼의 까만 반구(半球)들만이 눈에 띄었다. 그 반구들은 순전히 타의로만 움직이는 듯,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어떤 움직임이 있을때만 좌우로 약간씩 흔들렸다. 잔잔한 바다에 떠 있는 부표처럼 반구(半球)들은 제 의지를 빼앗기거나 혹은 놓아 버린듯 무기력하게 또는 담담하게 그 움직임을 받아내고 있었다. 회색빛 대기 속 드물게 놓여진 반구(半球)들은 하늘에 가까스로 붙어있는 노쇠한 별들처럼 곧이라도 아스라이 멀어져 영면에 들 것 같았다. 난 다시 의자 등받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캐한 연기가 눈을 찌르는 것처럼 눈꺼풀이 너무도 무겁게 느껴졌다. 좁은 의자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벽관처럼 내 온몸을 강하게 압박하며 죽음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 듯 했다. 난 자의적인 힘을 온전히 빼앗긴 무력감의 홍수 속에 빠진 것 같았다. 그 때 외부에서 야기된 흔들림이 내 몸을 살짝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내 머리도 그에 따라 좌우로 약간씩 흔들렸다. 내 뒷통수도 내 뒤에 앉은 누군가에겐 힘 없이 흔들거리는 지친 반구(半球)처럼 보이겠지? 그러고 보니, 내 종착지는 과연 어디였을까? 내 종착지가 어디였는지 아무리 떠올리려 해봐도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종착지만을 향해 무심히, 어쩌면 우리에게 일말의 발언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냉정하게 어디론가 치닫고 있는 이 기차의 정체는 대체 뭘까? 내가 언제 기차를 탄 걸까? 내가 기차를 타고 있기는 한 걸까? 머릿속이 생각으로 꽉 차더니 온몸에 긴장과 공포의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점점 부풀며 곧이라도 머리통이 뻥하고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오한을 동반한 극도의 불안함이 내 온몸을 빠르게 엄습해왔다. 지금이 새벽이였던가? 왜 여전히 안개 속에 갇힌 것 처럼 모호함은 시간의 끝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걸까? 개별적인 것들의 경계를 희미하게 하고 감각을 넘어 의식의 끈까지 서서히 무너뜨리는 잿빛의 탁한 공기는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온전한 휴식과 영면을 방해하는 애매하고 불분명한, 내 가슴을 꽉 막히게 하는 이 텁텁한 공기는 대체 어디서 흘러 들어온 걸까? 탁하게 느껴지는 공기가 점점 나를 감싸고 호흡을 불규칙하게 만들고 있었다. 몽롱한 대기 속에 내 앞에 펼쳐진 이 시각화된 그림은 과연 현실인걸까? 현실과 꿈, 이성과 감성, 기억과 망각, 환각과 지각의 경계 이편 저편을 넘나드는 의식의 주체인 난 대체 누구인걸까? 갑자기 나라는 존재가 너무도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바로 그 순간, 둥둥 떠다니던 잿빛의 공기가 내 눈 앞에서 일시에 사라짐과 동시에 어둠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희끄무레하게라도 보여지던, 모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은 그 실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의 몸을 어둠 뒤로 숨겼다. 그저 새카만 어둠속에서 모든 것들이 무(無) 그 자체로 돌아가 하나로 융합되는 듯했다. 내 의식의 경계도 서서히 허물어지는지, 눈 앞에 주홍색 빛의 가로등이 보였다 사라지기도 하고, 기괴한 소리를 내뱉는 입꼬리도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고음과 저음의 불협화음들이 귀에서 왕왕 울려대기도 했다. 그리고선 암흑 속으로 다 사라지더니, 몇 개의 반구(半球)만이 희미하게 둥둥 떠다니다 서서히 사라져갔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 걸까? 그저 환각일뿐인 걸까? 아니면 꿈에서 깨는 신호인걸까? 그것도 아니면, 혹시 여기가 반구(半球)들의 종착지인 걸까?<끝>


참가자 인적사항

이름: 조성백

이메일: chosb378@nate.com

전화번호: 010 8725 3426



  • profile
    korean 2018.02.28 21:54
    열심히 쓴 좋은 작품입니다.
    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믿어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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