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오늘:
20
어제:
8
전체:
305,757

접속자현황

  • 1위. 후리지어
    65662점
  • 2위. 뻘건눈의토끼
    23333점
  • 3위. 靑雲
    18945점
  • 4위. 백암현상엽
    17074점
  • 5위. 농촌시인
    12042점
  • 6위. 결바람78
    11485점
  • 7위. 마사루
    11385점
  • 8위. 엑셀
    10614점
  • 9위. 키다리
    9494점
  • 10위. 오드리
    8414점
  • 11위. 송옥
    7661점
  • 12위. 은유시인
    7601점
  • 13위. 산들
    7490점
  • 14위. 예각
    3459점
  • 15위. 김류하
    3149점
  • 16위. 돌고래
    2741점
  • 17위. 이쁜이
    2237점
  • 18위. 풋사과
    1908점
  • 19위. 유성
    1740점
  • 20위. 상록수
    1289점
2017.04.09 16:56

탈고(脫稿)를 위하여

조회 수 40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탈고(脫稿)를 위하여

 

 

 

 

 

 

- 1 -

거리의 상점들은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고로 내 방도 아직, 어둠이 차지 않는다. 나는 습관적으로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오래된 노트북은 한참을 갸릉갸릉 경음을 내더니 이내 찬란한 푸른빛을 내뿜는다. 나는 기계적으로 파일을 더블 클릭한다.

 

지난 날 나의 악업을 이 한권의 책을 통해 사죄합니다. 이제, 저는 생의 모든 것들과 작별합니다.

 

파일의 마지막 문장에 커서를 대본다. 더 고칠 것이 있을까. 더 덧붙일 것이 있을까. 벌써 며칠 째 나는 그것을 고민했다. 벌써 수십 번의 탈고를 거쳐 완성된 소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개운치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한 평 남짓한 방안을 휘둘러본다. 소형 냉장고, 구형 브라운관 TV, 캐시밀론 이불 몇 장이 들어가 있는 낡은 옷장. 나는 이제 이 여인숙 방의 사물과 냄새에 익숙해졌다. 그랬다. 벌서 이곳에서 두 달을 보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이 오래된 여인숙은 한눈에 봐도 다분히 욕정에 젖은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주인 남자를 제외하곤 그렁저렁 숨어 있기 좋은 곳이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완전히 쓸모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저는 또,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제 제게 궁금증을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너무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가 통할 만큼 아주 먼 길을 말이지요.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는 건 너무도 머리 아픈 일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지중해로 가서, 머리나 식힐까 합니다. 왜 지중해인지는 모릅니다. 딱히 갈 데가 없기 때문에, 딱히 조용한 구석이 없기 때문에, 딱히 광활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 가고 싶을 뿐입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끝 문장 바로 뒤에 그렇게 적어놓고 보니, 정말이지 지중해로 가고 싶어진다. 물론, 당연히 나는 그곳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조만간 방세를 치를 돈 마저 바닥나면 이곳에서도 떠나야 한다. 그러나 그 목적지는 지중해가 아닌 싸늘한 거리일 것이다. 분명 비참한 결론이다. 그렇게 되느니 원래의 계획대로 죽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난, 선택을 못하고 있다. 그걸 모두 나의 타고난 심약한 기질 탓으로 돌려야 할까? 도대체 난 지금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신경질적으로 파일의 페이지를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한 문장에 눈길을 멈춘다.

 

저는 대합실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곳은 매우 심심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오래 전에 분명히 그곳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떠났는데도 느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그 대합실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순천역, 싸늘한 새벽공기, 늙은 철도원, 반짝 활기를 띠다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차는 꽤 오랜 시간을 달렸고 순천역에 내렸을 땐 어스레한 새벽이었다. 날 내려 보는 그의 얼굴빛은 유난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잠깐 여기 있어. 금방 올게.”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대합실은 금세 적막으로 뒤덮였다. 늙은 철도원이 계속해서 날 유심히 지켜보았기에, 난 대합실 밖으로 나와 역 앞을 배회했다. 그렇게 한참을 역 주변을 맴돌다 동이 트기 시작했을 때에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목적 없는 발걸음이 빠를 리 없었다. 그날 난, 아침햇살을 고스란히 맞으며 느릿느릿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돌이켜보면 그가 날 버렸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라는 그의 직업도 이름도 몰랐으며, 엄마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그때마다 나를 죽지 않을 만큼 때렸다. 사내놈이 계집애처럼 생겼다는 것이 그 극악한 매질의 전체 이유가 될 순 없겠지만 내가 유일하게 짐작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한 이유는 그 뿐이었다.

내 손을 이끌고 순천으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여관 주인남자에게 호되게 쥐어 터졌다. 문틈으로 남자의 구둣발에 사정없이 얼굴을 밟히는 그를 보았을 때 내 마음 속엔 그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어딜 쳐들어가. 거지새끼야. 여기서 당장 나가라니까! 인간쓰레기 같은 새끼.”

남자의 매질을 피해 겨우 방으로 들어온 그가 한 일은 날 패는 것이었다. 코끝이 얼얼해지고 피가 났지만 나는 절대 울지 않았다. 만일 내가 울면 그는 식칼 고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그는 입에 식칼손잡이를 물고 나를 깔아 눕혔다. 그리곤 칼을 시계추처럼 흔들어댔다. 뾰족한 칼날을 보면 누구라도 절로 눈이 감길 것이다. 허나 나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만일 눈을 감으면 칼을 내려놓는다고 협박을 했고, 실제로도 여러 번 칼을 떨어트렸었다. 그래서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두 눈을 부릅뜨고 빨갛게 핏발이 선 그의 눈동자와 칼날을 바라봐야 했다.

그날, 순천 시내를 정처 없이 걸으며 난 난생 처음으로 자유라는 걸 느꼈다. 그를 다신 못 만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왜 기차를 타고 멀리 순천에 나를 버렸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주름이 가득한 그의 얼굴이 생각난다. 과연 그는 내 친아버지이긴 한 걸까? 무슨 사연으로 나를 그토록 미워했을까. 그러나 어차피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해답은 그에게 있지만, 다신 그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가 날 죽이지 않고 버린 것은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이름도 몰라, 나이도 모른다는 어린 내게 보육원은 김문성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신체와 언어 발달 사항을 고려해 여섯 살이라는 나이를 셈해 주었다.

정확하지 않더라도 생후 약 육년이 지나 나는 정상의 범주에 준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보육원 생활은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문맹 탈피였다.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 서랍장마다 빽빽이 꽂혀 있는 소설책들. 그것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 그곳에 있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같이 조용히 책에 빠져 지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이 흘러 입학하게 된 초등학교는 지독한 공간이었다. 특히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은 참기 힘든 것이었다. 또래 친구와 어울려 본적이 없는 내게 대인관계는 어려웠고,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나는 빨리 보육원으로 돌아가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간혹 수업 중 몰래 소설책을 읽다가 선생에게 매를 맞고, 말수가 극도로 적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보육원 원장선생과 학교 담임선생은 심각한 수준의 문제아로 몰아세웠다. 그런 내 문제로 보육원 원장선생이 초등학교 담임교사를 만나고 온 날, 내게 갱지 뭉치를 쥐여 주며 보육원에 오기 전의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라고 말했다.

하긴, 사회성을 갖는 게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지. 아프면 치료를 하면 되는 거니까 걱정 말고 있는 그대로만 적으면 돼.”

물론 나는 그가 한 만행을 적어 넣지 않았다. 그걸 적는다면 그들은 나를 더욱 예의주시할게 뻔해서였다. 이미 나는 글짓기에 자신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병약하고 가난한 아버지가 생활고에 이기지 못해 나를 버린 것 같다. 라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원장선생 앞에서 거침없이 글을 마무리한 나는 맨 밑에 추신을 달았다.

추신 : 원장선생님,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소설가로 성공해서 저를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린 부모님을 찾고 싶습니다.

 

내 글을 모두 읽은 원장선생의 얼굴빛은 처음과 다르게 편안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매우 상냥한 투로 여기선 누구랑 친하냐고 물었고, 나는 매우 간단히 없다고 대답했다.

다음날부터 원장선생은 그 문제로 나를 꾸짖지 않았으며 내게 특별한 애정이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더 없이 좋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보육원을 떠나기 전까지 독서열이 뛰어나고 말수가 매우 적은 아이로 지낼 수 있었다.

 

 

- 2 -

 

창밖 가로등 불빛이 빛난다. 가로등의 알전구는 밤새 오도카니 골목을 밝히다가 아침이 오면 사라져 버린다. 또 언젠가 수명을 다하면 새로운 전구에게 자리를 뺏겨버린다. 그를 대신할 전구는 이 세상에 수 없이 많다.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깨져 죽어버리는 알전구는 과연 할 말이 없을까.

나는 할 말이 참 많았다. “나에게 쓰는 변명이라고 지은 소설의 제목처럼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변명들을 모조리 토해 버리고 죽어버릴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비극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싸늘한 시체와 함께 발견된 한 편의 자전소설에 그들은 분명 열광하리란 강한 확신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소설은 경찰서에서 신문사로 또 신문사에서 출판사로 넘어가 책으로 발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사항은 내가 죽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소설은 그 모든 개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새 삶을 찾을 거야. 순영은 그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작고 허름한 이 방에서 순영과 함께 한 날들을 떠올려 본다. 새벽이 되면 순영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면 나는 소설 파일을 저장하고 순영과 마주했다. 우린 캔 맥주를 비우고 담배를 태우다 한바탕 엉기고 나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겐 그녀는 둘도 없는 수면제였다. 그럴 때면 가는 여진이 일었다. 첫 버스가 지나가는 울림이었다. 새벽, 속도를 내며 도로를 달리는 첫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오래된 건물은 늘 휘청거렸다. 그 울림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줬다.

돈이 조금 모이면 새 삶을 찾을 거야. 그때까지는 더러워도 참아야지.”

순영이 소위 잘나가는 호스티스가 되려하지 않은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못생긴 그녀의 얼굴로는 가당치 않은 꿈이었고, 그녀 역시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못생겼어?”

언젠가 순영은 커다란 가슴을 내밀며 그렇게 물어왔고 나는 솔직히 말했다.

확실히 미인은 아니야.”

그래, 맞아. 난 못생겼어.”

하루에 보는 거시기는 몇 개야?”

내가 물었다.

하루에 한 열 개 정도는 보지. 개중에는 잊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것들도 많아.”

난 말이야, 솔직히 언니 얼굴이 부럽다? , 고운 얼굴이잖아. 정말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그럼, 이런 개고생 안 해도 되잖아. 근데, 그건 언제 잘라 낼 거야? 정말 남잘 좋아하긴 하는 거야? 언니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동성애가 아닌 양성애자 아니야? 나하고도 잘만 하잖아?”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인 것을 순영이 알게 됐을 때 얼결에 말했던 동성애라는 거짓말을 그녀는 순순히 믿어주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기만 떼어내면 누가 봐도 나는 여자, 그것도 미인 축에 속했으니까. 순영은 여자인 자신 앞에서도 언제나 뻣뻣해지는 내 성기의 반응을 의심이 아닌 일종의 호기심으로 받아들였다.

동거를 먼저 원했던 건 순영 쪽이었다. 그 전엔 순영과 나는 여인숙 계단에서 몇 번 마주치던 사이였다. 그날 밤, 방세도 아낄 겸 같은 여자끼리하며 말을 건네는 순영의 얼굴 아래로 풍만한 가슴이 출렁였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 실로 오랜만에 고개를 드는 욕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 언니 이거 서있네? 동성애자라며? 내 가슴보고 발딱 서버리네? 요 녀석이.”

어느 날 밤, 술 취한 순영이 내 배위로 올라타며 물었다.

언니, 이거 아주 딱딱한데? 근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해도 되지?”

순영의 물음에 나는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우린 거의 매일같이 섹스를 했다. 좋은 내색을 하지 못하는 걸 제외하곤, 그녀와의 섹스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언젠가 순영은 새로 옮긴 업소에서 잘리고 나서 며칠간 방에 돌아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순영이 어딜 그렇게 다니는지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엔 순영이 있었다. 성매매특별법에 관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화면은 말끔하게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순영인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끝마다, 최후와 새로운 삶을 외쳐대는 그녀의 입버릇 때문이었다. 순영은 카메라 앞에서 인간에게 최후가 올 때까지 매춘은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우리에게도 새로운 삶을 찾게 해 달라, 최후가 찾아 올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사이로 매춘도 직업이다, 우리는 일반처녀보다 훨씬 더 청결하다, 한 달에 한 번씩 보건소에서 거시기검사를 한다, 하는 유치찬란한 플래카드가 보였다.

다음 날 순영은 돌아왔다.

텔레비전 잘 봤어.”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모자이크 처리 안 됐어?”

됐지. 하지만 다 알겠던데 뭘.”

화장을 할 걸 그랬나봐. 그 사람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 그 리포터인가 뭔가 하는 새끼 말이야. 완전 나를 무시하는 표정이었어. 하마터면 따귀를 한 대 날릴 뻔 했다니까. 언니 내가 그렇게 못생겼어?”

나는 순영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화장이 지워진 순영의 얼굴은, 백과 흑의 완벽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코를 중심으로 얼굴 절반이 검은 반점으로 뒤덮여 있는 얼굴. 순영은 화장할 때 한 번 울고 한 번 웃는다고 했다. 검은 점이 있는 왼편을 갈색으로 덧칠할 때면 비록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건강미가 넘치는 갈색으로 바뀌는 걸 보며 한 번 웃게 되는 것이고, 잡티 하나 없는 백색의 오른쪽 얼굴을 갈색으로 칠할 때엔 점점 검게 변하는 얼굴색을 보며 속상해서 운다고 했다.

어차피 화장을 하면 모든 것이 변할 수 있으니까. 이것도 직업인데, 사투라도 벌여야지. 돈 벌려면 말이야. 근데 언니는 직업이 도대체 뭐야?”

순영의 물음에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있어.”

그래? 그럼 언니 소설가야? , 나도 한편 써볼까? 아니다. 나는 쓰기 싫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쓴다? 근데 그거 쓰려면 재수 없게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잖아. 이 좆같은 인생 누구한테 줄 수도 없고 말이야. 주인공 같은 건 싫은데 말이야.”

애당초 소설나에게 쓰는 변명에는 살인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죽음이 있다면 내 자살만이 계획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내의 외도는 이년간 지속되었다. 마흔이 가깝도록 작가 지망생인 나는 너무나 무능력했고, 아내에게 전적으로 생활을 맡겨야 했다. 직장을 다니는 아내와 돈 많은 상사, 보육원 출신의 무능력한 작가지망생 남편. 이 중 그 불륜의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답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모두 나 때문이었다.

인터넷 문학모임에서 만난 아내는 내 첫 번째 팬이자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나를 처가 쪽에서 좋아할 리 없었다. 특별한 직업도 없는 작가지망생을 좋아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내의 끈질긴 설득에도 그들은 끝내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혼인신고를 먼저하고, 결혼식은 내 소설이 소위 잭팟을 터트린 후에 하기로 합의했다. 아내는 도둑결혼을 마치 대단한 모험에 성공한 듯 자랑스러워했다. 구청에 혼인 신고서를 내며 아내는 말했다.

이제부터 진짜 소설처럼, 영화처럼 살 거야. 멋지지 않아?”

아내는 나의 외모를 탐했고, 문학적 재능을 부러워했다. 당시엔 나 역시 언젠가는 정말로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쓴 소설이 대박 영화로 만들어질 날이 언제가 올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인생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내는 외도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화도 나지 않았다. 아내를 사랑했기에,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상황에 종지부를 찍고 싶어졌다. 나만 없어지면아내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젊기에 재혼도 가능할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이엔 아이가 없다. 아내가 잠든 새벽, 나는 큰 결심이라도 하듯 노트북을 켜고 큼지막하게 제목을 타이핑했다.

나에게 쓰는 변명

나는 그 순간, 이 소설을 끝으로 자살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 3 -

 

그 중국 여행은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활동해 온 인터넷 문학모임의 첫 오프라인 만남을 기념한 여행이었다. 먼저 여행을 권한 건 아내였다. 사람들을 좀 만나라고. 그래서 어디 좋은 글이 써지겠어? 좀 자유로워지란 말이야.

그날 밤, 거센 비바람에 비행기는 결항되었고 우리들은 온 길로 다시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틀어진 여행 때문에 모두들 기분이 울적했었는지 그날 밤의 술추렴은 조금 길었고, 그날따라 나 역시 억병으로 취해버렸다.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든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내가 잠에서 깰까,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남자의 둔탁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반쯤 열린 안방에서 아내와 남자는 이미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에도 내 이성은 동요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들에게 들키기 전에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였다. 남자의 겨드랑이 사이로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거짓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환희에 찬 얼굴. 행복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아내의 표정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악귀와 같은 분노가 인 건 그 순간이었다.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 그들의 심장을 찌를 때까지의 일련의 행동들은 너무도 빨리 이루어졌다.

다시 이성이 돌아왔을 때, 검붉은 핏물이 젖은 이불 사이로 아내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둘의 얼굴을 베개로 가린 채 흐느껴 울었다. 나는 절대로 이 끔찍한 살인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칼로 스스로 배를 갈라, 그 길로 아내를 따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걸 제지한 건 아직 미완성인 소설 나에게 쓰는 변명이었다. 그 소설만 완성되면 나도 어차피 죽는다. 그 생각은 나를 민첩하게 움직이게 했다.

살해된 여자의 계좌에서 돈이 출금되어 있다. 돈이 빠져 나간 은행의 CCTV마다 남편의 모습이 잡혀 있다. 여자의 남편은 도쿄 행 비행기를 탔다. 이는 아무리 바보 같은 경찰이라도 날 범인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 난 완벽한 변신을 했고, 비행기가 아닌 배로 밀항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온 목적은 분명했다. 소설을 탈고하고 매스컴에서 친절히 알려준 아내의 유골이 있는 납골당에서 자살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쉬지 않고 소설에 매달렸다. 순영은 내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내려가는 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나는 소설을 중단하고 몇 번이나 죽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순영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다.

순영의 두 번째 잠적 기간은 정확히 열흘간이었다. 나는 아침이면 순영의 얼굴을 그렸다. 정확히 중심선을 그어 놓은 듯 반으로 갈린 흑색과 백색의 얼굴. 순영의 얼굴은 마치 나는 이중인격이다.” 하고 광고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순영의 잠적 기간이 조금 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큰 걱정을 하진 않았다. 언제고 늦은 새벽이 되면 캔 맥주와 담배를 사갖고 들어오리란 터무니없는 예감이 있었고, 그 예감은 열흘 만에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영의 얼굴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언니나 수술했어.”

그렇게 말하며, 순영은 쑥스럽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때의 분노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반점이 사라진다는 것이 그토록 분노할 일이었을까?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순영의 머리 한쪽을 세게 누르고 붕대를 풀어 제쳤다. 순영의 검은 점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핑크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영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 순영의 입을 틀어막고 재떨이로 그녀의 얼굴을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순영의 얼굴에서 튀어 오르는 피가 눈 속으로, 콧속으로 들어왔다. 비릿한 냄새가 나고,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

눈을 비벼 뜨고선 순영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천천히 순영의 입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 순간, 두 눈가가 뜨거워졌다. 저절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결코 이 끔찍한 살인의 가해자가 나 자신이란 걸 믿을 수 없었다.

만일 유체이탈을 할 수 있다면 내 몸에 침을 뱉고선, 배 정중앙에 칼을 꽂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또다시 나를 막아 선 건 아직 탈고를 마치지 못한 소설이었다.

어차피 나는 죽을 것이다. 그 생각은 점점 뚜렷해졌다. 그 즉시 노트북을 켜고 다시 또 소설과 씨름했다. 손톱에 묻은 핏물이 키보드에 촘촘히 박히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키보드를 두드려댔다.

 

 

 

- 4 -

 

파일을 천천히 훑어본다. 분량은 생각보다 꽤 되었다. 제멋대로 드래그 하다가 한 문장에 시선을 모은다.

 

그때 제가 왜 말 하기를 싫어했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몽상가입니다. 몽상이란 언제나 저를 흥분시킵니다. 몽상의 끝도 없는 자유로움 아래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몽상이란, 삶 속에서 제외된 가외의 것이었습니다. 마치 중독성 강한 마약처럼 온전한 삶을 방해하는 몽상. 제게 병이 있다면 대인기피증이 아닌 몽상이었습니다.

 

눈 코 입중에 한 개를 없애야 한다면 어떤 게 없는 게 제일 낫냐?

보육원 꼬마아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생각난다. 모두들 곰곰이 생각하다 하나씩 대답한다. 난 눈. ! 멍청아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잖아, 입이 없는 게 낫지. , 이 병신아. 입이 없으면 말도 못하고 밥도 못 먹잖아. 코가 없는 게 제일 낫지, 지긋지긋한 똥간 냄새도 안 날 거 아니야. 난 속으로 코라고 대답한 아이가 가장 쓸 만한 답을 내어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바로, 입이었다. 입이 없는 사람한텐 대화를 강요하진 않을 것 아닌가.

지난 며칠간 나는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 행위는 나를 향해 있다고 믿었던 모든 물리적, 감정적 입심거리들을 잘라내 버리기 위한 처방이었다. 앙다문 입속에 가득한 알코올은 그것을 박멸하는 데엔 특효였다. 인간들은 스스로 파놓은 이중적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인다. 나 역시 내가 파놓은 죽음이란 늪 주변에서 늘 배회하고 있었다. 그 늪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달콤한 유혹의 손짓을 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빠져야 할 늪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빠져 죽고 말았고, 나는 아직까지도 무시로 그 늪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시간, 술기운에 퐁당 빠져버린 시간만큼은 그 늪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었다. 분명 나는 조금 더 진실하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리곤 입을 막았다. 내가 발견한 건 음주의 나와, 음주하지 않은 나와의 간극에는 교만하고 파렴치한 거짓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맞다. 나는 죽음을 생각했지만 아직, 죽음이 구원의 열쇠라는 적확한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다. 누구나 무죄를 꿈꾼다. 하지만 그 어떤 이도 지금의 나를 무죄로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분명 혼자가 아니다. 거울 속의 그녀와 함께이다. 그녀는 아직 젊고 아름답다. 그녀에겐분명, 죄가 없다.

날이 갈수록 침대 밑에 있는 순영에게서 달걀 썩는 냄새가 진하게 난다. , 그렇다. 그러고 보니 순영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맞다, 이제부터 나는 그걸 써야 한다. 다시 노트북 앞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랬다. 나의 소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

 

김경남, morison00@empas.com / 010-4789-8798

  • profile
    korean 2017.04.30 21:36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단편소설 공모게시판 이용안내 16 file korean 2014.07.16 3327
» 탈고(脫稿)를 위하여 1 갈색남자 2017.04.09 40
664 타임라인 (Timeline) 은현 2015.05.25 81
663 타인의 방식 1 오드리 2016.03.24 74
662 타인의 명예 dkstpghkz 2015.04.10 1030
661 퀴즈의 정답은? 1 Mysteriouser 2014.12.26 221
660 쾌변 1 멍토로 2017.12.10 28
659 케이크 이야기 4 강승대 2017.04.10 69
658 컴페션 1 file 철학자 2016.04.01 34
657 캠퍼스의 아침 1 file 월배임다 2018.06.09 52
656 카페누나 1 소설은마음 2016.02.27 252
655 카타르시스 1 소소한끄적임 2017.08.02 47
654 카데바 5 소블리 2017.01.27 113
653 카데바 1 소블리 2017.01.27 55
652 침묵 봄의폭풍 2015.01.07 45
651 추락하는 계절 1 율구 2017.12.09 15
650 최신형 블루투스 이어폰 시로 2015.04.03 34
649 초능력 1 tnqls 2017.12.20 42
648 청춘 마리오네트(marionette) 2 낭만주의자 2017.01.30 73
647 첫번째 인간 량양 2015.08.10 167
646 첨부파일이 안드는데요 1 카푸치노 2018.01.12 42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