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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13:35

WHO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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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ARE YOU?

 

   남자는 만화가라고 했다. 한 달 전쯤, 희한한 물건들을 이끌고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가끔 인터넷 검색 순위에 오르기도 해요.”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는 결코 자신이 그리는 만화의 제목이나 내용을 가르쳐 주는 일이 없었다. “창피해서요. 괜히 제 치부를 들키는 거 같기도 하고.” 주부보다 야무지게 묶어놓은 쓰레기봉투에는 채 썰어놓은 채소마냥 잘게 찢어진 종이가 잔뜩 들었다. 남자는 집에서 만화 그리는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했다. 목 끝가지 단추를 잠근 남색 셔츠, 까다롭게 골라 입었을 크림색 카디건은 만화가도 직업이라 직장에 온 기분이라도 내려 하는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상하죠? 남들 보라고 그리는 건데 들키기 싫다니.” 남자의 입에서는 창과 방패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명은 남자가 조금 불편했지만 그 모순에 저도 모를 연민을 느꼈다.

 

   출근하기 전 그는 항상 토마토를 갈아 마신다. 네 등분으로 나뉜 토마토와 꿀 한 스푼이 그가 요구하는 레시피였다. 달콤함에 슬쩍 취할 때쯤 약하게 코를 찌르는 새콤한 맛. 그는 이런 알맞고 적당한 타이밍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몇 년 전에 사귀던 애가 매일 해 줬어. 걔랑은 꽤 오래 갔는데. 그동안 매일 이걸 먹었으니까 입맛이 길들여졌나 보다. 같이 살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신발장 앞에서 거울을 보던 그가 가볍게 말했다. 쏟아진 말은 너무 가벼워 거실을 잠시 맴돌다 명에게 부딪혔다. 피식. 웃고 만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침을 묻혀 무스에 엉킨 앞머리를 비비는 일상의 행동도 여느 모델만치 기품 있게 보인다.

   “다녀오세요 뽀뽀 안 해줘?”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말했다. 알맞게 떨어져 있던 자리에서 걸음을 옮겨 그의 양 쪽 볼에 한 번씩 입을 맞춘다. “오케이. 완벽해.” 구두코를 바닥에 두 번 콕콕 두드린 후 집을 나선다. 아침마다 다녀오세요 뽀뽀를 받으면 그제야 모든 게 다 준비된 기분이었어. 적당히 설레는 그 기분이 좋았다? , 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걔 있잖아. 하얀 피부에 깡말랐던. 나중에. 아주 나중에.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아주 혹시나 우리가 헤어진다면 그는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해줄까. 다정한 듯 무감하게 가벼운 말투로 상대를 할퀴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와 헤어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매일 밤 열두시 즈음 반드시 지나가는 쓰레기차처럼 매일 아침 지나가는 그와의 일상이 없다면 속이 수천 가지 오물들로 가득 차, 명은 견디지 못 하고 바스러질 테다. 붕붕. 다시 한 번 고개를 젓는다. 오만 가지 생각이 떨어져 나간다. 생각은 너무 무거워 거실 바닥으로 툭. . 떨어진다.

   아침 먹고 아르바이트나 가야지. 어제 저녁에 끓인 된장찌개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가스밸브를 돌리다 문득, 손이 멈춘다. 밸브 옆에는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종이가 반듯하게 붙어 있다. ‘밸브를 돌릴 때 시간나면 저 좀 읽어 주세요.’ 정도의 의미가 담긴 눈에 띄는 스티커다. 가스가 새지 않게 조심하시오. 가스가 샜을 시에는 즉시 창문과 베란다 문을 열어 책받침으로 바닥을 쓸듯이 밀어 공기보다 무거운 가스를 밖으로 밀어내세요. 그렇지 않으면 까닥하다 폭발할지도 모릅니다. 나만 죽는 게 아니니 더욱 조심하셔야죠. 스티커에 미처 적히지 못한 글귀까지 보태며 명은 가스 불을 3단으로 올렸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된장찌개에 호박을 넣지 않은 게 조금 후회된다. 넣는 게 더 맛있는데 그는 호박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침부터 사소한 고민들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가스 불을 끄며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 무거워 바닥으로 낙하하는 생각들. 냄새조차 나지 않는, 무거운, 적당하지 않은 불안과 찌꺼기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옆집 남자가 싹싹하게 아는 체를 한다. 쓰레기봉투에는 3분짜리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고는 또 다시 편의점을 갈 생각인지 한 손에는 지갑을 들었다. 색깔만 다르고 디자인은 같은 그와 옆집 남자의 지갑. , 얼마 전에 버리고 새 걸 샀더랬지. 식상한 것에서까지 그를 떠올리는 버릇이 답답해 명은 괜히 입술을 비죽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주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명을 싣지 못하고 1층에서 막 출발한 엘리베이터에도, 명의 곁에도 쓰레기봉투를 들고 지나간 남자의 자리에는 진득한 잔향이 남았다. 퍼뜩 고개를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키는 안 큰데 비율이 좋네. 엄지와 검지로 남자의 머리 크기를 재고는 하나, , , …… 뒷모습에 대고 나눠본다. ? 5등신? 머리의 크기를 잴 때보다 멀어진 남자의 실루엣을 보며 명은 부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차분하고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나름대로 유명인이랍시고 주변시선 의식해서 저러고 다니는 걸까, 아니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땡! 멀지 않은 곳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신호에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다 잠깐, 오른쪽 우편함에 시선이 멈췄다. 아직 책받침으로 쓸어 내보내지 못한 생각들이 잔뜩 남아 있는 명의 집 1102호 그리고 1102호의 옆 칸 1101. 카드고지서인가? 카드사의 로고가 그려진 봉투 귀퉁이가 비죽 올라와 있다. 나 잡아봐라. 나 잡아봐라. 남자의 비율을 재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카드고지서 봉투가 끼워졌다. 선명하게 프린팅 된 남자의 이름, 난 이게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건 필요 없다고. 뭘 훔친 것도 아니잖아. 고지서를 1101호에 다시 떨어뜨려놓은 명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마우스가 빠르게 움직인다. 며칠을 눈여겨 본 부잣집 창문을 여는 도둑마냥 명은 아주 약간 신이나 있었다. 몰래 훔쳐온 남자의 이름을 인터넷 검색창 안에 쳐 넣는다. 달칵. 검색 아이콘을 누르는 마우스 소리가 묘하게 경쾌하다. 다음 페이지가 뜨기 전 찰나의 순간에 느껴진 그 미묘한 쾌감에 명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무거운 생각이 베란다 창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상쾌한 공기가 집 안으로 들어온 건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컴퓨터 화면이 바뀌고 지금보다 좀 더 앳돼 보이는 남자의 사진과 간단한 프로필이 주르륵 나타났다. 나보다 한 살 어리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이는데. ‘밀크라는 좀 촌스런 예명으로 활동 중이고 3년 전에 <눈물베개>라는 만화로 데뷔를 했으며 작년에는 웹툰 인기상도 받았다. 워낙 괜찮은 얼굴이라 팬 카페도 있는 모양이다. 매일 출근하는 것 같지도 않고 집 밖으로 나오는 건 쓰레기 버리러, 아니면 편의점에 갈 때뿐이라 그저 놀고먹을 수만 없어서 하는 별 거 아닌 만화가인 줄 알았더니 사람이 좀 다시 보인다. 1등인가, 2등인가. 상을 받았나, 못 받았나로 수우미양가를 따지는 한국 사람의 습성이 별로라고 생각해 온 명이지만 잘 모르는 옆 집 사람을 평가할 만한 재료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뿐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래, 옛말 틀린 거 없지.

   항상 노란색 트레이닝 복을 입고 다니는 백수 주인공이 겪는 에피소드가 요즘 남자가 그리고 있는 만화의 내용이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97화를 클릭했다. 노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주인공이 거실 한 가운데 놓인 빨간 소쿠리를 지켜보고 있다. 대형 바퀴벌레를 소쿠리 안에 가둬두고 23일 동안 처리하지 못하고 발발 떠는 중이란다. 혹시나 움직일까 그 위에 안 읽는 두꺼운 책까지 올려뒀다. 어찌나 튼튼한 놈인지 약을 뿌려도 잠깐 기절했다 깨어난단다. 빨래를 걷으러 갈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물 마시러 냉장고 문을 열러 갈 때도 주인공은 빨간 소쿠리를 똥 피해다니 듯 피해 다닌다. 우스꽝스러운 그림 밑에 사람들이 나도 그런 적 있다.’, ‘나 어렸을 때 동아전과로 눌러놓고 못 치운 적 있다.’라는 둥의 댓글을 달아 놓았다. 얌전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유머도 좀 있나 보네. 크크.

   역주행을 하기 위해 96회를 눌렀다가 창이 뜨기 전, 명은 얼른 일어나 커피포트의 전원을 올렸다. 조금만 더 보고 빨래 걷어야지. 수납장에서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꺼내 머그컵에 쏟아 붓는데 컴퓨터 옆에 놓아둔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하도 힘이 좋아 친구들이 항상 탱크 지나간다고 불평하는 오래된 휴대폰이 위용을 과시했다. 명은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 폰 좀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엄마. , 또 잔소리 잔뜩 듣겠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 받아봤자 오늘이고 내일이고 받을 때까지 책상 위에서 지나갈 탱크라는 걸 알기에 통화 버튼을 터치하고 만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바빠?” 퇴근하고 집에 와 있을 거 뻔히 알면서. . 속으로 혀를 차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릴렉스. 릴렉스. 다정하게. 다정하게. 화내지 말자. “아냐, 커피 좀 타느라고.”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저절로 전원이 꺼진 포트를 들어 컵에다 뜨거운 물을 부었다. 수증기가 확 오르면서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와 뒤섞인다. “넌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할 거니? 이력서는 좀 내고 있어? 저녁은 먹었고?” 맨날 물어보는 거 지겹지도 않나. 작은 스푼으로 컵 안의 물을 휘휘 젓는다. “아직. 그 사람 오면 같이 먹으려고.” 스푼의 뒷면으로 뜨거운 회오리가 미처 녹이지 못한 커피 알갱이를 꾹꾹 누른다. 컵의 벽에 초콜릿 색 흔적이 간간히 남는다. “밥 먹기도 전인데 커피를 마셔? 속 버려, 기지배야. 어린 나이도 아닌데 건강 챙겨야지.” 잔을 입술에 대고 입김을 후 분다. 위로 올라가려던 연기가 왁. 하고 흐트러진다. 사춘기도 아니고 어머니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웬 꼬투리가 그렇게 길어.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이제 네가 받아줘야지. 신문을 보던 그가 던진 말이 떠올라 명은 다시 한 번 목구멍까지 차오른 꼬투리를 삼켰다.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후루룩 입 속으로 사라지는 얇은 꼬리. “오랜만에 마시는 거야. 걱정 좀 하지 마.”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빠가 죽은 뒤 히스테릭하게 외동딸 건강을 챙겨대는 엄마의 잔소리가 요즘 들어 꽤나 무거워졌다.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서른둘의 딸은 엄마에게 골칫덩이겠지. 서른둘이나 된 덩어리가 엄마에게도 버겁겠지만 서른둘 밖에 안 된 딸 역시 엄마의 오롯한 기대를 혼자 지탱하기가 점점 버거워졌다. “커피도 이제 끊어. 몸 챙기고 얼른 결혼해서 손주 보여줘야지. 그이는 아직 아무 말 없어? 서른 둘 노처녀 데리고 살면서 여태 뭐하고 있대.”

   96화는 혼자 짜장면을 시켜 먹을 때 배달원과 단 둘이 마주치는 어색한 순간에 대한 에피소드다. 2인분 이상을 시켜야 배달해 주는 덕택에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를 시킨 주인공은 배달원이 벨을 누른 순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샤워기를 튼다. 12500원입니다. 가격을 말하며 주인공을 흘깃 쳐다보는 배달원은 이거 혼자 다 먹나? 하는 눈빛이다. 주인공은 문 닫힌 화장실을 향해 외친다. 자기! 빨리 씻고 나와! 카드 영수증을 주고 돌아서는 배달원의 눈빛은 이번엔 다 알아, 솔로 새꺄. 하는 것만 같다. 크크. 명은 입에 물고 있던 커피를 겨우 삼키고 나지막하게 끌끌거렸다. “, 너 엄마 말 듣고 있니?” 귀에서 조금 떨어뜨려놓은 휴대폰을 다시 가까이 가져다 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정리해 보는데 엄마의 참을성이 끊어지기 전까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도 손주 보여주고 싶어. 나도 결혼하고 싶어. 나도 프러포즈 받고 싶어. 근데 엄마,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발표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어야 돼. . 하수구 구멍에 걸린 머리카락 보다 더 엉망으로 뭉친 말들이 꼬투리와 함께 응어리져 무엇 하나 선뜻 골라내기 힘들다. 그래서 명은 언제나처럼 같은 대답을 들려준다. “내가 알아서 할게.”

 

   짙은 담배 향과 비싼 양주 냄새가 베인 슈트 재킷을 베란다의 빨래 건조대에 널어놓고 탈취제를 칙칙 가볍게 뿌린다. “미안. 회식 있다고 어제 얘기한 줄 알았어.” 등 뒤에서 감아오는 팔이 아직 따뜻하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그의 체온은 여느 때보다 높아서 굳어진 등이 봄에 얼음 녹듯 몽글 몽글해진다. “늦게 와서 그래? 기분 안 좋아 보이네.” 슈트에서 풍기는 냄새와 비슷한 냄새가 그에게서도 난다. 아니, 같은 냄새인가.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또 잔소리 엄청 들어서 그래.” 등에 그를 매단 채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발을 맞춰 베란다에서 거실로 걸어 들어왔다. 몸이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차례로 기울었다 올라온다. 제 냄새가 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명의 어깨에 코를 파묻고 그가 길게 숨을 들이 마신다. “혼자 되셔서 외로우신지 자꾸 손주 타령하셔.” 별 일 아니라는 말투로 툭 던지자 들이 마시던 숨이 딱 멈춘다. 머리카락보다 더 헝클어진 말 중에 무엇을 골라야 하나 고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잠시 간의 침묵은 딱 그것을 뜻하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처럼 비슷한 대답을 골라낸다. “김치찌개 냄새나네? 술 마셔서 그런지 국물 먹고 싶다. 밥 안 먹고 기다렸지? 씻고 나와서 같이 먹자.” 허리의 손을 얼른 끌러내고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언제나 안전벨트 같다고 여긴 타인의 손이 정작 위험할 적에는 끊어지고 만다. 사라지는 뒤꽁무니가 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게 뻔뻔스러워 명은 또 피식 웃는다. 엄마, 내가 그랬지? 결혼 혼자 하는 거 아니라고. 아니, 말로는 한 적 없나. 또 잔소리 하면 그 때 해줄게, 엄마. 금세 울리는 샤워기 소리를 들으며 한 술도 뜨지 않은 김치찌개를 다시 끓인다. 쉽게 식지 않도록 뜨거워질 때까지 오래. 그리고 오래.

 

   부스럭 거리는 비닐 소리가 복도에 울리다가 바로 뒤에서 딱 멈춘다. 바쁘다는데 억지를 부려 그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명이 먼저 아는 체를 한다. 검은 비닐이 들려 있는 남자의 왼손. 반대편 손에 들린 지갑을 보니 외출했다가 마트에 들린 거 같진 않은데 남자는 여전히 깔끔하다. 만화가들의 흔한 로고인 수염 자국 하나 없다. “마트 갔다 오시나 봐요.” 근데 저 얼굴에 검은 비닐이라니 좀 반칙이다. “, 뭐 좀.” 일전에는 싹싹하게 알음 체를 하더니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어색하다. 묵직한 순간을 얼른 벗어나고 싶은데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14층에 머물렀다. 전세 냈나. 얼굴도 모르는 14층 사람들을 원망하며 명은 붉게 깜박이는 ‘14’를 무뚝뚝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그에게 팔짱을 낀다. 흘긋 명을 내려 본다. 갑자기 뭐냐는 표정이다. 애인끼리 팔짱끼는 데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삼키고 또 웃고 만다. 겉에 흐르고 있는 그냥. 이라는 표정 말고 속에 흐르고 있는, 무거워서 가라앉아 버린 표정을 건져 올려 준다면 좋겠다. 이래서 여자들이 항상 뭐가 미안한데?’를 달고 사나 봐.

   “옆 집 사는 분이야.” 인사 좀 하라는 명의 보챔을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그는 여전히 ‘9’를 막 지나는 숫자만 바라본다. 팔짱 낀 팔을 앞뒤로 슬쩍 흔들자 .” 하는 푸석한 반응 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는다. 명은 자신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어쩌면 저보다 좀 더 붉게 달아올랐을 남자를 돌아보기 민망하다고 생각한 순간 원망스런 14층 사람들이 명과 그, 옆집 남자의 앞에 도달했다. 은색 기계의 문이 열리자마자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을 법한 아이 둘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뛰지 말라고 했지!” 소리치며 나오다 뒤로 물러난 명과 그를 보고 낯선 여자가 목을 약간 숙여 보인다. 답례를 하고 아이들이 빨려 나가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 ‘11’ 버튼을 누른다. 비닐 소리를 내며 뒤 따라 들어온 남자가 반대편 약간 앞 쪽에 조용히 자리 잡는다. 서로 모르는 이웃들 사이에서 하는 행동으로 어색하니까 대화하기도 싫고 얼굴 보기도 민망해.’ 라는 의사표현이다. 만화는 털털하게 잘 그리면서 저런 데서 소심하네. 명은 그의 팔에서 손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4, 5, 6. 커지는 숫자를 보고 있을 줄 알았던 그의 시선이 의외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 거리는 검정색 비닐, 그 안이 궁금하기라도 한 건지 내내 눈을 떼지 않는다. 토마토? 밀폐된 공간에 은근하게 풍기는 신선한 냄새에 명은 갑갑해지는 기분을 몰아내려 그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여기 좀 봐. 그는 여전히 명이 하는 행동이 좀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걸 모른다. 사각 틀 안에 가득 찬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밀폐된 공간 속. 쓸어서 내보낼 수도 없는 명의 속삼임들.

 

   차갑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도시 남자. 미를 붙인 인터넷 만화의 문구와 하나도 멋있지 않은 노란 추리닝의 주인공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저건 따뜻한 게 아니라 느끼한 거잖아. 만화 아래에는 명보다 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들이 남긴 글로 가득 차 있다. 숨이 넘어갈 듯 웃던 명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34일 출장 내내 아무런 연락 없는 그를 기다리며 명은 가끔, 아주 자주 두툼한 고독감에 파묻혔다. 명을 뜨거운 고독에 파묻는 것은 따뜻했던 그의 온도가 식어간다는 불안감 때문인가, 그가 다른 사람에게 따뜻했을 시절에서 베어 나오는 차가운 질투일까.

 

   밤새 연락을 기다리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르바이트 시간을 완전히 놓쳤다. 명은 막 일어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몸살이 났다는 앳된 연기로 휴가를 하루 받아 냈다. 모처럼 시간은 남는데 토마토 주스도, 다녀오세요 뽀뽀도 해 줄 일이 없다. 잘 자라는 문자라도 오지 않을까 쓸데없이 초조해하다 어젯밤 미처 내놓지 못한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선다. 밤까지 기다렸다가 내놔도 된다지만 음식물 쓰레기가 섞인 봉투에서 나는 미숙한 악취를 집 안에서 더 이상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도로의 미관을 위해 저녁 여덟 시 이후에만 쓰레기봉투를 내놓자는 규칙을 어기는 셈이지만 이것은 다만 명의 얘기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파트 주민들 간에 만들어진 암묵적인 이해관계는 서로의 편의를 봐주는 규칙 뒤에 숨어있는 또 다른 규칙이었다. 그 암묵적인 면을 지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현관을 나서는데 복도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눈에 띈다. 뒤태가 어쩜 소년스럽다. “복도에서 담배 피우면 안 되는데.” 남자가 화들짝 놀라 명을 돌아보는 순간 담배꽁초가 아래로 뚝 떨어진다. 동시에 명의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에 꽂힌 시선은 도둑놈이 소매치기한테 웬일이냐는 식이다. “만화가 잘 안 그려지세요? 얼굴이 딱 스트레스에 압사 당하기 직전이네.” 도어 록이 제대로 잠겼다는 신호음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 어색해할 줄로만 알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밀크…… 알아요?” 그것은 왜인지 쓸쓸하고 아슬아슬해 명은 쓰레기봉투를 잠시 내려놓았다. 당신 예명이잖아요. 만화그릴 때. 말하려다 문득, 몰려 훔쳐온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내곤 입술을 합. 다물었다. “미국에서 정치하는 남자예요. 이름 되게 귀엽죠?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겼는데.” 다시 담배를 피울 요량인지 스트라이프 셔츠의 왼쪽 주머니에서 담배 곽을 꺼낸다. 톡톡 두드리자 한 가치가 쏙 튀어 오른다.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었는데 인권운동가였어요. 근데 그 전 선거에서 두 번 떨어졌거든요. 이게 마지막이다 하고 도전하려는데 그 사람 애인이 떠나요. 더는 못 견디겠다고.” 머리를 내민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올리려다 멈칫 움직임을 멈춘다. 꺼냈던 라이터를 주머니에 돌려놓고 담배를 그저 입술 사이에 놓아두기만 한다. “그런데 딱 세 번째에 당선이 되요. 인권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데…… 가끔 생각해요. 나이 쉰이 넘어서 그 사람, 어쩌면 그런 로맨틱한 고민 안 할 수도 있지만, 한 번은 안 해봤을까? 내가 유명해지면 그 사람도 어디선가 날 보겠지. 한 번쯤 날 떠난 걸 후회도 하겠지.” 바람이 창 밖에서부터 휘이 들어온다. 훔쳐 본 옆모습에는 쓸쓸한 피로가 묻어 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돼서 잊지 못하게 해주고 싶었어요. 어딜 가도 신문에서, TV에서 자꾸만 나타나서 밥을 먹다가, 샤워하다가, 길을 가다가도 떠올라서 잊을 수 없게.” 지나치게 솔직해진 남자의 변화에 명은 또 한 번 구슬픈 연민을 느꼈다. 잊지 못하는 건 당신이잖아.

 

   따닥. 따닥. 급하게 움직이는 마우스 소리가 한참을 울렸다. 커피포트의 물이 벌써 끓었다가 다시 식는 줄도 모르고 컴퓨터에 빠져 있다. 토마토 하나에 꿀 한 스푼. 29천원 주고 산 하얀색 믹서. 넥타이를 매는 단정한 손. 현관을 나서기 전, 바닥을 두드리던 가죽 구두. 네가 떠나고 힘을 잃어버린 것들. 속으로 꾸역꾸역 삼켜가며 아닌 척 숨겼던 추억들이 자꾸만 겉으로 튀어나온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릴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던 건, 나도 너에게 사랑이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베개>. 지나치게 만화답지 않은 남자의 처녀작에는 연인과 헤어진 다음날, 다음날, 또 다음날에 겪는 곤란한 심정이 담겨 있다. 어쩜, 담배 피우는 뒷모습과 쏙 빼다 박은 걸 제목이라고 정해놨을까. 치부를 들키기 싫다던 남자의 쑥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크게 한숨을 떨고 일어나 포트의 전원을 다시 올리고는 금세 돌아왔다. 무얼 알고 싶어서 퇴근하고부터 내내 이러고 앉았는지 저도 모를 일이다. 오로지 한 쪽으로만 흐르는 안테나를 몇 갈래로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바닥을 굴러다니는 무거운 불안과 찌꺼기들이 구석 숨어서 자꾸만 명을 지켜본다.

   시끄러운 탱크가 또 책상 위를 지나간다. 늦으니까 먼저 자. 그의 문자를 이렇게 차갑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명은 열일곱 여고생인 냥 이모티콘이나 물결 하나 없이 여백 가득한 문자가 따뜻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반도 채 마시지 못한 커피가 식어 간다. 따뜻했던 아까의 온도를 잃고 차갑게.

 

   “어제 왜 늦었어. 회식하고 들어온 거야?” 현관문을 반쯤 열고 나가려던 그의 뒷모습에 뭐가 그리 다급했는지 따지듯 물었다. 아니. 사실, 묻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다.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현관 앞 거울에서 머리를 만지고, 구두코를 바닥에 두 번 콕콕 두드렸는데 어째서 오늘은 그냥 가? 가장 중요한 게 빠졌잖아. 뻐금거리는 입술에서는 차마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달칵. 식상한 소리와 함께 맞은편 문에서 지갑을 든 남자가 나타난다. 굿 타이밍인가. 아니면 그냥 짓궂은 타이밍인가. 머뭇거리다 모른 척 돌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걸 가만히 보던 그가 아무 대답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선다. “안녕하세요.” 아무 것도 아닌 그의 아침 인사에 남자의 뒷모습이 잠깐 흔들린 것을 명은 그저 오해라고 생각했다. .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가 올라탄다. “안타세요?” 남자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다. 어쩌면 체온도 차갑게 식어버렸을까. 닫히는 문 사이로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이 양 쪽에서부터 점점이 사라진다. 움직임 없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명이 한 걸음, 한 걸음 그리로 다가간다. “커피 타 줄게요.” 무심코 잡은 손은 방금 불 꺼진 연탄만치 따뜻하다. 손을 데일만큼 뜨겁지도, 무뚝뚝하게 식어있지도 않은.

 

   “사실은, 사실은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야 함을 확신했을 때 그 어쩔 수 없음을 어찌할 수 있을까. 명은 치부를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던 남자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치부라는 것은 가장 보여주기 싫은 사람에게 들켰을 때에야 비로소 치부가 아니게 된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만치 부끄러워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묵직한 가슴을 안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괜찮아요.” 명은 부서지기 쉬운 남자를 꼬옥 안았다. 베란다 문을 열어 서늘한 바람을 집 안으로 들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남자가 쓰윽 몸을 뒤로 뺀다. “나랑 같이 있으면 내 슬픔이 옮아 갈 거예요.” 밝게 웃는 남자는 우는 눈이다. 명이 손가락으로 그 눈을 만지자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은 금방 울고 만다. 그게 또 가만히 둘 수 없이 안타까워 남자의 등에 다시 두 팔을 두른다. 평소에는 잘 몰라도 아슬아슬할 적에 꼭 안아주는 게 안전벨트야. 그런 걸 항상 원했는데 그는 청개구리처럼 명을 위험한 물가로 몰아내기만 했다. 아슬아슬한 물가에 선 명은 숨죽인 채 우는 남자를 토닥였다. 눈물로 열이 올랐는지 적당한 따스함이 이쪽에게도 전해진다.

   “나에게도 따뜻한 적 있었어요. 그걸 추억삼아 몇 날 며칠을 견뎠어요. 냉장고에 붙여 놓은 사진 떼어 놓지도 못하고, 생일에 받았던 지갑 버리지도 못하고. 목구멍이 아플 정도로 울고 싶어도 버텼어요. 그러다 문득 퇴근을 하다가 불 꺼진 집을 보고는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그리고 깨달았어요. 우리는 헤어진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버렸을 뿐이라고. 추억은 약해요. 그래서 손에 쥐어볼 수도 없어요. 그렇게 약한데도 추억은 잊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심술을 부려요. 자꾸만 나를 알아채고 괴롭혀요. 그러면서도 추억에 매달리는 건 나뿐이죠. 그는 항상 하던 대로 적당히, 가볍게 떠올리다 흘려버릴 테니까.” 아직도 남자는 추억에 매달려 있다. 자꾸만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돌이켜 보며 생각하고, 더듬어보고, 떠올린다. 그에게는 먼, 남자에게는 여전히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지금은 부서지기 쉬운 추억대신 명에게 매달려 있을 부서지기 쉬운 남자.

   남자에게 그는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너는 무엇인가. 뒤엉키는 생각을 발로 차며 명이 남자의 등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굵직하게 흐르는 여러 겹의 눈물에 혀를 가져다 대자 남자가 움찔 어깨를 떤다. “이걸로도 옮아요?” 꽉 조여진 목젖을 밖으로 뱉어낼 듯 겨우 쥐어짜는 걸 알아챘는지 남자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도리질 친다. 명이 조금은 짤법한 응어리를 머금으며 옅은 신음을 질렀다. 풀린 오해는 아직 아무 것도 없지만 명은 분명히 남자 대신 울음을 참고 있다.

여명이 밝아오면 아마도 그들은 술에 취해 의지 없는 잠자리를 한 사람들처럼 허둥지둥 넥타이를 매고 하이힐을 꺾어 신으며 헤어질지도 모른다.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다 해도 늘 들려오던 싹싹한 인사를 다시 못 들을지도 모른다. 오늘 일이 추억이 될 지, 술로 지워진 기억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침이면 잡을 수도 없이 바스러질 추억 속의 그. 적당하게 무거워 몰아내기 쉽지 않은 단 하나의 그.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응모부문 : 소설

응 모 자 : 이 정 희

연 락 처 : ultrajh2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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