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 : 그 여자의 집
지하철 막차 종착역에
무표정한 얼굴로 내리는 한 여자
두 다리 후들거리며
달동네 꼭대기 집으로 올라가는 그 여자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반지하 단칸방 여는 순간
얼어붙은 냉기가 온 몸 감싸고
날짜 지난 신문지 위에 맥주병들만
그 여자의 인기척을 반긴다
나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외롭고 어두운 밤을 견디는 그 여자
그 여자는 매일 밤 인생을 써내려간다
헛헛한 인생을 감싸 안아줄 꿈을 그리는
그 여자를 알고 있다
2. 제목 : 의자 하나
도심 한복판
버림받은 의자 하나
창피도 굴욕도 없다
비둘기 한 마리의 푸념을
가만히 조용히 경청한다
두 다리 멀쩡할 때
버림받고서야
혼자를 안다
뼈를 깎는 고통 감내하며
현생을 살았으나
바래진 피부가 눈에 띌 때쯤
버려졌을 것이다
분주했던 전생을 되새김하며
혼자 앉아 있다 덩그러니
3. 제목 : 나의 아버지
홀어미의 큰 아들로 자라서
태어난 지 스무 해가 되자마자 배를 탔다
허벅지에 바늘을 찌르며 견딘다는 청승의 밤들을
바늘보다는 노를 저으며 긴 밤을 견디고 건넜다
늙은 어미 애끓는 비명에 몸살하고
길가에 난 풀떼기 뜯어 먹고 버티어
파도가 집어 삼키는 새카만 바다를
고향보다 자주 넘나들었다는 아버지
어린 자식 울음소리에 책임지고
기꺼이 배를 타고 버티는 나날들
만 가지 재주 부리던 그 작은 몸집에
세월이 남긴 무심한 상처들이 빼곡하다
감히 스치기도 죄스런 아버지의 피멍들이여
생이 다 이런 것인가
4. 제목 : 계절이 겹치는 시간
오월의 태양이 눈치 보며 숨죽이는 낮
난데없는 천둥번개 존재감 드러내고
먹구름들 이때다 싶어 모여 비를 뿌리고
아닌 낮 중에 날벼락이 다녀가고
평온한 뭉게구름 가족 친척 나타나서야
세상은 다시 고요 속에 묻힌다
밤새 내리는 폭우 속에서 제 시간을 준비하는 것들
계절이 겹치는 시간, 그 사이에
설렘을 안고 튀어나오는 것들이 있고
마음을 앓으며 숨어야하는 것들이 있다
5. 제목 : 시집
우리 집 시인 내 아버지가
직접 읊어주는 자작시를 듣고 자라
머리가 커서도 시집만 끼고 살았더니
어느새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 시집 속 남자들과
매일 밤 화끈한 정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현실 속 어느 남자와 결혼했다
시집을 덮으니
외도를 했던 그 망할년은 온데간데없고
앞치마를 동여맨 참한 여인이 나타난다
숭늉 국물 간을 보다말고
책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낙서 가득 낡은 책장에
아버지가 남기고 간 시집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빼곡하게
서로의 종이 가죽 맞대며 붙어있다
시집이 말을 한다
아, 싱거워 -
슬그머니
입을 연 시집을 꺼내
몰래 읽는다
숭늉이 팔팔 끓고 있다
백지혜
010-3570-7306
잘 감상했습니다.
열심히 습작을 거듭하다보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