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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후에야

늘 기다려지는 하루의 부분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 나무 너머로 존재를 드러내는 친구들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그들은 정확히 오후 두시 사십오분에 찾아옵니다

마치 더 빨리 저에게 다가오고 싶다는 듯

그들은 기나긴 손을 길게 뻗은 채 서서히 제 방으로 스며들어옵니다

저와 그들을 가로막는 차가운 창문 따위는 없다는 듯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 둘 친구들은 저와 함께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표정이 없던던 저 책상도 저기 저 책들도

친구들의 손길이 닿자 슬며시 웃어보입니다

그렇게 제 기분은 그들과 함께 환해집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곧 있어 그들은 하나 둘 제게 인사를 한 채

다시 차가운 벽으로 향해 기나긴 꼬리를 끌며 사라집니다

한 번은 그 꼬리에 매달려 같이 데려가 가달라고도 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습니다

우리가 떠나야만 볼 수 있는 풍경인 걸

아리송하기만 한 말을 남긴 채 햇살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지 한 두 시간이 지났을 때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위를 올려보자 드넓은 바다에 간간이 보이던 물거품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이제는 그 바다 위로 붉은 수채화 물감을 흩뿌린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색깔이 번지며 저기는 보라색 또 저기는 옅은 분홍색으로 스며듭니다

그 광경은 바라보던 저는 슬며시 입을 살짝 벌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다른 그림 찾기

어제와 같은 연필을 손에 쥔 채

어제와 같은 종이에 애써 한 글자라도 끄적여봅니다

어제와 같은 책상에 앉아서 말입니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 창 밖으로 보입니다

어제와 같은 불빛 어제와 같은 컵

늘 같은 공간에서 같은 물건들로 둘러쌓여있습니다

참으로 어제와 다른 그림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체념한 채로 물이나 마시려 컵을 들어올린 그 찰나에

깊고도 투명한 표면 위에는 처음 보는 이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 없이 뚫어지게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저도 그리하였습니다

그제야 그 사람이 조금 눈에 익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지만 특별히 이름이 기억 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름은 그저 부르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 사람을 깊은 곳에 갇힌 눈이 깊은 사람으로 부르려 합니다

벗어나지 못한 채로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던 그 눈이

어린 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어른의 눈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백지

세상에는 설렘을 불러일으키는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남과는 다른 각자만의 설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아무도 걷지 못했던 눈 밭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눈 속을 홀로 걷다보면 

왠지 잠시나마 세상에서 벗어난 기분입니다

머릿속으로 인류의 마지막 남은 생존자인 척도 해보았습니다

이 땅을 새로 발견한 사람인 척 해본 적도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역할들을 해 본 곳

아무도 저를 건드릴 수 없고 방해할 수 없고 평가할 수 없는 곳

제가 움직이는 대로 흔적이 남겨지는 곳

그게 저에게는 하얗다 못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눈길 위였습니다





나무처럼

늘 저 자리에 있었던 듯합니다

언제 보아도 별 다를 것 없는 초록 손가락들을 세우고 있는 그 나무

바람이 불면 손가락들은 기분이 좋은지

살랑살랑 바람에 맞추어 까딱까딱 박자를 맞춥니다

그러다 햇살이 비추면 손가락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의 끝부분부터 노오랗게 물듭니다

사시사철 푸름만을 자랑하던 손가락들은 이젠 화사하게 웃어보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햇살이 사라지고 나면 원래의 푸름으로 돌아옵니다

늘 그랬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소나무에게는 다른 나무들처럼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에 

햇살을 그리도 반기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변덕

불어오는 바람에 두 볼은 붉은빛으로 칠해지고 두 손은 외투 안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갑자기 가방 안에 혹시 몰라 넣어두었던 목도리가 생각났습니다

두 손을 겨우 끄집어내 부드러운 천을 목에 둘렀습니다

머지않아 온 몸이 따스한 봄날로 덧칠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스무 발자국을 걸었을까

이제는 온 몸이 무더운 여름날로 칠해지려하지 않습니까

별 수 없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길 기다렸던 두 손으로 거추장스러운  천 뭉텅이를 풀렀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두 손과 두 볼은 다시 꽃내음이 가득한 봄날로 칠해졌습니다

분명 몇 걸음 뒤엔 잠시 잊으려던 바람이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인사를 건넬 것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손은 이미 목도리를 가방의 가장 안 쪽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김유진

pinkbearkim@gmail.com

010-2538-6423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20.12.09 21:34
    김유진씨... 아름답고 참한 글 고맙습니다. 변덕과 백지가 가장 맘에 들었고... 시적표현이 섬세하고 디테일이 조화롭네요... 나름대로 시당선될 가능성이 이번에 누구보다 높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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