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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랑한 만큼 너도 날 사랑해?


 

 

 

 당연하지, 사랑해. 그것도 아주 많이.”

얼마 전 퇴근하면서 지하철을 타러가다 수현한테 온 카카오 톡 문자였다. 혜연은 지하철 역내의 혼잡함을 피해 한쪽 구석진 공간을 찾아 문자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을 보는 순간 혜연은 주위의 소리가 사라지고 갑자기 멈춰서버린 느낌이 들었다. ‘또 이러네...’ 소리가 사라지자 뭔가 두려운 공포심과 몸은 차가워지는 느낌이 왔다. 혜연은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바빴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위해 서로의 틈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걸었다. 오만가지 잡다한 소리가 사라진 지금 사람들은 빠른 걸음 속에서도 휴대폰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는 듯 시선을 놓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휴대폰에 열중해 있던 한 10대 여학생은 나이든 노인과 부딪쳐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인상을 찡그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노인도 자신의 가방을 떨어뜨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여학생을 힐끔 쳐다봤다. 노인은 가방을 주워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여학생이 주워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여학생은 노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재빨리 가방을 주어주고는 자신의 갈 길을 갔다. 그나마 다행, 모른 척 지나가지는 않았으니깐. 둘 사이의 잠깐이지만 작은 긴장감은 사라졌다. 노인은 가방을 받고는 다시 인자한 표정의 노인의 얼굴을 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기위해 손을 들었지만 여학생은 이미 멀찌감치 앞장서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휴우, 걸음도 빠르지... 휴대폰을 보면서 어찌 저리 길을 잘 찾을까. 넘어지지도 않고...” 노인은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었다. 형식적인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아쉬움과 여학생의 빠른 걸음이 부러운 듯 쳐다봤다.

혜연은 약간의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계속 주위를 걸어 다니며 둘러보았다. 사라진 소음, 자신만 소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사람들도 소리를 잃어버린 채 자신한테 필요한 행동만 할뿐 그 외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자신들이 집중해 있는 세상 외에는 모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혜연은 사람들 눈에 안 띄게 고개를 몇 번 흔들어보고 머리를 만지며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해도 소리가 사라진 공간은 무서웠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혜연이 동사무소에서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면서 종종 겪는 일이었다. 노인 인구와 한 부모 가정이 많아지면서 정부의 사회복지에 대한 문의도 많아졌다. 밀려드는 상담과 함께 실질적인 일을 하다 보니 과한 업무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아님 위의 통증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동료들은 혜연이 너무 일을 열심히 한다며 대충하라고 했다. 사회복지사 일을 혜연씨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아님, 휴가라도 내서 어딘가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다 큰 병나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당연 혜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선배 사회복지사의 말이었다. 그들은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다니던 여행 안내지를 보여주며 혼자여행하기 좋은 장소를 소개해주곤 했다. 혜연은 솔직히 여행안내지 따위 필요 없다. 그저 마음껏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상관없다. 마음껏 아무 꿈도 안 꾸고 죽은 듯이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곳, 자기위한 간절한 생각만 들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소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곳을 원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혜연은 평소 당연하게 듣던 오만가지 잡다한 소리들이 이토록 간절하게 듣고 싶다는 게 이상했다. 아름다운 소리도 아니고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닌데 왜 자신은 역 내의 소음들을 듣지 못해 안달이 났을까. 불현 듯 알 수 없는 적막함이 어김없이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찾아왔다. 홀로 외딴 섬에 갇힌 듯한 적막함이 강하게 느껴질수록 주위는 더 무겁고 습한 조용함이 온 몸을 조이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하는 것 같았다. 마치 적막함이 소리를 조금씩 삼켜버리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기이한 현상은 혜연에게 그 횟수를 늘이며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수현과 문자를 주고받을 때조차 조용함과 함께 공간이 멈춰서버리는 느낌을 받는다. 수현과의 문자는 혜연이 제일 행복할 때다.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끝없이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들... 당연 행복하니 혜연의 몸에선 사랑이 넘치는 호르몬이 넘쳐날 텐데 어째서 주위는 소리와 함께 멈춰서버리는 걸까.

   처음엔 혜연은 주위의 소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아무 일도 아니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금은 겁났지만 너무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자꾸만 반복되는 주위의 조용함은 갈수록 그 기세가 당당해지는 느낌이었다. 사고가 난 적도 없고 고막을 다친 적도 없는데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일상생활에서 무언가 생기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자주 반복된다는 건 왠지 무섭고 안 좋은 일이 생길 증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가 없는 세상, 살기 싫다. 그 소리가 비록 짜증나고 아름답지 못한 소리라도 자신의 주위를 벗어나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살수는 없다. 나쁜 소리, 싫은 소리, 짜증나는 소리, 화가나는 소리 등등. 모든 소리를 들어야 혜연 자신이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 증거가 된다. 수현과 얽혀있는 모든 행위도. 혜연은 서둘러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사라지기 시작한 소리부터 제대로 찾아야 했다.

 

   오십대의 동네의사는 오래 일을 해서인지 약간은 지루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컴퓨터를 바라보며 혜연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혜연은 의사가 자기를 쳐다봐주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의사의 시선에 집중했다. 의사는 쳐다보지 않았다. 차라리 혜연의 신체에 심각하게 이상이 있으면 자신을 쳐다보고 친절하게 답을 해줄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님, 좀 더 젊은 의사라면 형식적인 미소라도 지어줄까. 혜연은 불안했다. 이 의사 믿어도 될까. “선생님, 그럼 이 자주 나타나는 이상 증세는 무엇 때문인가요?” 혜연은 뭔가 확실한 대답을 원해 의사에게 공격적으로 재촉하듯 말했다. 의사는 약간의 한숨을 쉬더니 그제야 혜연을 보며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자세로 대답했다. “검사에선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정혜연씨가 너무 몸을 혹사 시키시는 것 같네요. 몸이 피곤한 상태에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하니 몸이 환자분한테 항의하는 겁니다.” 의사는 간단하게 피로회복제와 안정제를 처방해 주면서 혜연에게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며칠 휴가라도 내서 푹 쉬세요. 그냥 보기에도 얼굴이 몹시 창백해 보이네요. 약에 의지하기보다는 될 수 있으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노력하시고 잠을 잘 자야 합니다.” 혜연은 의사의 교과서 같은 말을 들으며 알았다고 대답을 했지만 여전히 혜연은 처방약을 먹어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밤마다 수현과 휴대폰으로 문자와 씨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위해 수현과의 연락을 끊는 건 더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잠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수현은 혜연에게 에너지이며 마음의 안정인 것이다. 혹시라도 수현과 연락이 되지 않으면 더 불안했다. 그만큼 수현을 사랑한다. 설사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레즈비언들의 사랑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연인의 사랑엔 꼭 남녀만 있는 것은 아니니깐. 애초에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남녀 구별을 짓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은 대놓고 주변사람들에게 수현을 당당하게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소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성차별이 심한 나라라 왠지 스스로도 사회의 관습에 눈치를 보고 있다. 수현은 밤 시간을 좋아했다. 수현과 자주 못 만나는 대신 매일 문자와 사진, 영상으로 서로가 만나지 못하는 시간을 채웠다. 물론 그렇게 좋으면 같이 살면 되지 않겠냐는 말이 나오지만 수현과 혜연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비밀스런 약간의 공간은 남겨두자고. 이 공간은 서로가 사랑할수록 더 알고 싶은 신비스런 공간이자 애달픈 공간인 것이다. 혜연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수현은 낮보다는 밤 시간대의 어둠이 좀 더 활발하고 친밀한, 아니 상대에게 더 집중 할 수 있어 사랑의 감정이 더 샘솟는다고 했다. 혜연은 수현을 사랑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자신의 생활습관에서 사랑하는 상대가 있고 혜연을 사랑해주는 상대가 옆에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니 당연히 매일 밤을 홀로 외로이 보내지 않고 이렇게 수현과의 친밀한 대화를 지속하기위해선 이 새벽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혜연은 이비인후과 의사의 처방이 말을 듣지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수면제든 신경안정제든 잠 잘 수 있는 약을 처방받기 위해서였다. 예전엔 신경안정제도 그렇고 멜라토닌도 먹는데 불편함 없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심한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고통 받았지만 약을 먹으면 조금은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의료법이 바뀌면서부터 약을 구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혜연은 잠시라도 잠을 자기위해선 수면제가 꼭 필요했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이비인후과 의사보다 조금은 더 친절하게 혜연을 맞이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적어도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밝은 미소로 혜연을 맞이했다. 혜연은 의사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같이 인사를 하며 약간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평소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주위의 소리가 가끔 사라지는 느낌을 받아서요.” 의사는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무언가 차가운 느낌의 눈빛으로 혜연을 쳐다보았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동안 분위기의 어색함이 조금씩 사라져 혹시라도 혜연이가 수다를 떨 듯이 얘기를 해도 다 받아줄 것 같았다. 물론 그럴리야 없겠지만. 의사는 정해진 시간동안 헤연의 말을 듣고 마지막에 간단하게 이런 말을 했다. “혜연씨는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집착한다는 것 같군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상대에게 계속 자신의 생각을 요구하는 것 같다고. 물론 혜연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일에 대한 몰입으로 자신을 괴롭히거나 아님 과한 다이어트운동, 취미생활이라는 명목하의 인터넷게임, 온라인쇼핑 등 머릿속을 집착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방법은 다 사용해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단지 그런 자신을 바로 보기 싫어 외면하고 모른척했다. 그러다 결국은 몸과 마음이 스트레스에 견디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을 찾으려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주위의 소리는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혜연은 평소의 일상생활이 외로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혜연은 다시 지하철 내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이 버리고 간, 또는 오만가지 잡다한 쓰레기 소리를 찾기 시작했다. 혜연을 버린 소리를 빨리 못 찾아내면 끝없는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져 끝없이 허우적거릴 거라는 걸 혜연은 잘 알고 있었다.

지하철 역내의 바쁜 승하차 소리에 주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혜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애써 이 상황을 부정하는 듯 바로 정신을 가담은고 다시 수현의 문자내용을 살펴봤다. 문자는 간단했다. 혜연이 생각했던 대로 더도 덜도 없이 혜연이 질문한 만큼의 대답이었다. 분명 질문의 내용은 간단했지만 좀 더 세심하게 본다면 혜연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궁금할 법도 하건만 수현은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간단한 대답? 혜연은 이런 대답을 원치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수현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혜연을 위해서 유치하고 일상적인 대답이라도 좀 더 복잡하고 사랑의 감정을 담은 대답을 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고민한 흔적 없는 빠르고 간단한 대답,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다시 읽어보았다. 내용은 보면 볼수록 수현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수현의 단순한 행동과 말은 가끔 혜연의 가슴을 아프게도 섭섭하게도 했지만 혜연은 한 번도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수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왠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고 스스로 동정을 받고 기대하는 것 같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초등학교시절 전학을 왔었다. 혜연은 수현을 처음 봤을 때 주위가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정말 자신에게 그런 유치한 사랑이 왔다. 강렬한 첫 사랑은 항상 이렇게 정해진 유치한 매뉴얼대로 가는 걸까. 초등학생이 그것도 열 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같은 여자아이한테 반한다는 것은 거의 드문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혜연한테는 그 드문 일이 아니, 기적 같은 일이 찾아온 것이다. 담임선생님이 전학 온 수현한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라며 옆으로 살짝 비켜주며 말했다. 수현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한 채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게 될 이수현입니다. 부모님과 외국에서 살다 아빠의 직장관계로 다시 한국에서 살게 됐습니다. 제가 아직 한국말이 어색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이 앞으로 잘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에 돌아와서 오히려 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평범한 인사지만 에너지가 넘치는 말투였다. 수현의 서툰 한국어로 한 자기소개는 오히려 혜연에게는 더 당당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혜연은 자신의 자리를 찾는 수현에게 혜연은 자신의 옆자리 의자를 빼주었다. 수현은 환하게 웃으며 혜연에게 말했다. “고마워혜연은 좀 더 세련되게 대답하고 싶어 영어로 대답했다. “you are welcome."

수현은 항상 자기감정에 솔직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현재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그때그때 상황에 솔직하게 표현했다. 간혹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제스처도 있었지만(혜연이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수현은 그럴수록 이렇게 말했다. “사람사이에 자기감정 상태를 자꾸 감추려들면 진실한 소통을 할 수 없어. 특히 너와 나처럼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더더욱. 너도 네 감정 숨기지마. 싫으면 싫다, 고통스러우면 힘들다고 말해. 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니깐.” 사실 혜연이, 수현이의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고방식이 부러웠다. 그래도 가끔은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감정을 헤아려줬음 했으나 수현은 절대 말하지 않은 감정에 대해서는 항상 무시를 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수현은 무엇을 숨기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원에서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날 수현은 혜연에게 이렇게 말했다. “혜연아, 매번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다니면 피곤하지 않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 아까도 학원 선생님이 너한테 또 뭐 부탁하는 거 같던데.” 그랬다. 가끔 학원선생님은 타인한테 뭐 부탁하는 것을 즐겨했다. “혜연아, 이제 시험 기간도 끝났으니 조금 시간이 나면 선생님 좀 잠깐 도와줄래? 전에 내가 찍은 사진을 네가 지적한 대로 다시 찍어 봤거든. 역시 네 예리한 눈썰미가 있어서인지 처음보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 보여.” 혜연은 렌즈 너머로 무엇을 찍거나 촬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다 혜연의 취미가 학원 선생님의 눈에 띄어 학원 선생님은 자주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사진을 고등학생인 혜연에게 보여주고 평을 부탁했다. 혜연이가 봤을 때 형편없었지만 예의상 자신보다 어른인 선생님에게 이런 걸 사진이라고 찍었느냐!’ 는 막말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 다음에 찍을 때는 좀 더 빛의 밝기에 주의하셔야 할 것 같아요. 카메라 렌즈에서의 빛은 그 각도나 밝기에 따라서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의 사진을 보면... 이걸 좀 무시하고 찍는 것 같아서...”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말하도록 노력했다. “그렇지?, 역시 내가 아직은 서툴러서...” 그러면서 학원선생님은 혜연에게 계속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려 했다. 혜연은 더 이상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아 바로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학원선생님은 은근히 타인에게 의존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은 모르지만 옆에 있을수록 상대를 귀찮게 했다. 혜연은 이런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 끊임없이 부탁하면서 무언가를 요구하니까.

 

   수현 자신은 항상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주위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은 언제나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자신감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주위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고 다가가 마치 모든 걸 함께 해줄 것처럼 행동하고 바로 힘내라는 간단한 말과 약간의 위로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난다. 자원봉사 나가서도 할머니와 함께 사는 초등학생에게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같이 짊어질 것처럼 그 아이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다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표현을 하고난 후 그 자리를 깔끔하게 떠났다. 아이는 예쁘고 젊은 누나의 위로에 참았던 울음과 함께 마음속의 아픔을 쏟아내려다가 갑자기 떠나가는 수현의 뒷모습을 보며 벙 적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혜연은 수현의 이기적인 행동에 아이한테 미안한 감정이 들어 수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수현아, 가뜩이나 할머니하고만 사는 게 힘든 아이한테 너무 쉽게 네 감정만 표현하고 가는 건 좀 너무 하지 않아?” 수현은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헤연이가 이상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아이가 안됐으니까 위로해주고 힘내라고 표현했을 뿐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오히려 혜연이 네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수현은 항상 그랬다. 상대가 어떤 고통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전혀 궁금해 하지도,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할 도리는 다한 거라고 생각을 한다. 어찌 보면 타인의 입장에서 냉정하달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굳이 힘들게 알 아서 슬픔과 고통을 두 배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혜연은 수현의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을 나누면 그만큼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서로의 감정을 소통했다면 상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행동도 어느 정도 따라줘야 한다. 생각은 이랬지만 실제로 혜연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언제나 스스로의 감정의 울타리에 가둬 나중엔 감정 표현하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수현은 자신의 감정과 표현에 솔직함으로 자신의 감정의 울타리에 빠져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것으로 만족했다. 혜연은 혹여 수현이가 오히려 상대의 고통과 슬픔 때문에 자신이 번거롭고 괴로워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겁이 많은 성격이면서도 정이 많은 성격이니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수현을 알아갈수록 그런 생각은 혜연의 착각 일뿐이었다. 사실 수현은 혜연에게 이기적인 연인이라기보다 가련하면서도 돌봐 주어야하는 상대였다. 평소에 오만하고 허세가 강한 성격이라 해도 수현은 항상 자신감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다가 금방 긍정적인 마인드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부러웠다. 그리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혜연은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혜연도 수현처럼 하나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쉽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항상 혜연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좀 더 깊이 감정을 이해하기 바랐다. 때문에 스스로의 삶의 방식에 반항하기보다는 차라리 수현이 살아가가는 방식에 힘을 실어 주기로 했다. 살면서 풀리지 않는 미래 때문에 수현이 고통 받을 때 혜연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혜연은 수현에게 고백하고 2년 연애 끝에 서로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나 수현은 같이 사는 것을 거절했다.

 

   혜연은 자신이 탈 지하철이 오자 바로 자신이 서기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 섰다. 그러자 순간 위에 통증이 느껴졌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답답하면서 쓰라림의 통증은 계속 느껴져 할 수없이 지하철 타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주위의 의자에 앉았다. 수현도 혜연과 마찬가지로 불규칙한 식사습관 때문에 위장장애가 있다. 입원까지 했을 때 수현은 혜연을 붙잡고 마치 당장 죽을 것처럼 울었다. 혜연은 그런 수현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는 건 싫다. 울어도 자신이 우는 게 훨씬 났다고 생각했다. 수현이가 울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좀 더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도 당연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현은 다행히 병원에서의 규칙적인 식사와 치료덕분으로 빠른 회복을 하고 퇴원을 했다. 당시 퇴원을 하루 앞두고 오전 회진을 하는 몇몇 의사와 간호사들도 비록 형식적이지만 자애롭고 친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수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론 규칙적인 식사와 기름진 음식 피하시고 채소를 좀 더 많이 먹으세요. 그리고 지나친 다이어트로 굶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합니다.” 그들의 따뜻한? 걱정에 수현은 거기에 맞춰 환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 알겠어요. 앞으론 관리 좀 해야죠. 저만은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전문의는 미소와 함께 바로 대답을 했다. “아무리 평소에 건강한 사람이라도 나쁜 습관은 자신을 갉아먹는 회충과 같아요. 그런 회충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빨리 바로잡고 고쳐야지요.” 혜연은 전문의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한 말치고는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전문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의료진들도 전문의의 말이 끝나자 바로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겉모습과는 반대로 엄격한 선생님 같았다. 그러나 수현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선생님!”

대답 잘하고 시원시원한 수현이, 혜연과 수현이 단짝 친구가 되면서부터 어느 누구보다 혜연이 옆에서 혜연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이해해 주는 친구? , 가끔 의심 갈 때도 있지만 상관없다. 혜연 스스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걸 보면 되니깐. 적어도 혜연의 친 엄마보다는 훨씬 나았다. 혜연이와 수현은 학교를 끝마치고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의 건널목에서 신호등불빛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같이 서있던 세 명의 어른들은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도 전에 건널목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수현이도 건너가려는 걸 혜연이는 말렸다. “건너지마! 아직 더 기다려야 돼.” 수현은 괜찮다며 어른들이 모두 건너가고 있으니 자신도 당연히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다 수현을 잡으려던 혜연은 승용차와 살짝 부딪쳐 손목 골절로 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간호사 언니가 혜연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병원에 올 가족이 없니?” 혜연엄마는 뒤늦게 귀찮은 얼굴로 찾아와 이런 말을 했다. “쓸데없이 왜 다치고 그러니? 돈 나가게. 아니지, 어린아이를 학교 앞에서 다치게 했으니 잘하면 치료보상금이며 합의금도 잔뜩 받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했어, 내 딸! 오랜만에 엄마가 돈 좀 챙기겠다.” 그러더니 바로 혜연엄마의 표정은 생기가 넘치는 밝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혜연은 엄마의 그런 얼굴이 역겨워 보여 엄마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내 잘못으로 다친 거야! 그 아저씨 잘 못 없어. 그리고 학교 앞도 아니야!” 엄마는 나가려 하다 뒤돌아보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시끄럿! 학교 앞이든 어디든 어린아이를 쳤으니 무조건 잘 못 한 거야!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니깐 그저 엄마가 시키는 대로 말이나 잘 들어. 알았어!” 그리곤 바삐 병실 문을 나갔다. 혜연엄마는 혜연이가 다친 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한 마디라도 , 괜찮니? 많이 아팠지.’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저런 사람이 내 엄마라니...’ 아랫입술을 이빨로 문채 손목을 내려다봤다. 손목의 통증이 더 심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자신의 손이 절단돼도 엄마는 관심 있을까?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단지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더 많이 받아내는 것에만 집중할 테니까.’ 문득 혜연은 웃음이 나왔다. 간호사 언니가 가족이 없냐고 물어봤을 때 차라리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못한 게 후회됐다. 이러다가 자신을 앞세워 교통사기로 돈을 벌려고 하는 건 아닐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엄마라면. 어쨌든 밤새워 혜연을 지켜준 사람은 수현이였다. 수현이 엄마가 와서 수현을 데려가려고 하자 수현은 오히려 자신의 엄마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헤연은 나 때문에 다친 거야! 내가 신호등 불빛이 바뀌기도 전에 건너가려는 걸 혜연이가 말리려다 차에 치인거야. 내가 신호등만 지켰으면...” 수현은 사고당시가 생각났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니깐 내가 옆에서 지켜야 돼.” 혜연에게 있어 수현은 가족보다 더 가깝고 소중했다.

 

   “혜연아, 오늘 왜 나한테 그런 문자 보냈어? 내가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어서?” 수현은 숨차하면서 혜연이가 지하철역내에서 보낸 문자의 속뜻을 물어봤다. 이런 질문을 하는걸 보니 조금은 궁금하기는 했나보다. “..흠 거긴 좀만 살살...” 혜연은 수현의 음부와 유방을 주무르다 수현의 요구에 힘의 강도를 조금 조절했다. “별 뜻은 아니야. 가끔 너에 대한 내 사랑크기는 알겠는데 네 사랑크기는 조금 짐작하기가 어려워서.” 혜연은 말하면서 땀과 함께 유두가 딱딱해진 수현의 가슴을 꽉 쥐였다. “..” 수현은 짧게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몸을 비틀며 일어났다. “뭐얏, 그렇게 꽉 쥐면 아프잖아.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사랑의 크기라니. 사랑에도 크기가 있어?” 수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혜연을 쳐다봤다. 혜연은 솔직히 자신이 수현을 사랑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쌓아둔 간절한 마음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수현의 솔직하고 수시로 말하는 사랑표현에 불만은 없지만 혜연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의구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감정에서 벗어나긴 위해선 수현이의 확실한 사랑의 크기를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 수현아, 오해는 하지 마.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러니깐 서로의 사랑을 좀 더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고 싶어서 네 사랑을 내가 확실히 해두려는 거야.”

   “지금 너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거야? 사랑을 확실하게 해두다니.” 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수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은 뭔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혜연아, 난 서로 좋아하는 것엔 이유나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그런데 넌 언제부턴가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너의 이런 방식은 사랑이 아닌 상대에 대한 강요와 집착이야. 난 자유롭게 너를 사랑하고 싶어. 내 방식이 너에게 의심과 불만을 야기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혜연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아니, 문제는 없어.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해서 너의 사랑을 나에게 보여줘.” ‘보여달라고?’ 수현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헤연이의 사랑법을 굳이 말한다면 혜연은 항상 수현에게 베푸는 사랑과 희생적인 사랑을 했다. 가끔씩 자신에게 집착을 보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수현은 혜연의 사랑법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딱히 그 사랑의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도 불만도 없었다. 수현은 자유롭게, 혜연은 혜연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했고 그 방식은 서로 잘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혜연이가 자신의 사랑 법을 자신에게 강하게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수현은 혜연의 이런 행동이 뭔가 짜증스럽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부터 남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면 수현은 언제나 반대로 행동했다. 그게 부모든 친구든 가릴 것 없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혜연이라 해도 수현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이다. 수현은 지금 당장은 답을 하기보단 이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집에 가서 혜연의 말을 천천히 생각해보고 나중에 답을 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하자. 오늘은 이만 갈게.” 수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려다 수현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혜연의 손에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왜 그래!” 수현은 순간적으로 혜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혜연은 더 강하게 수현의 팔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수현아, 간단한 대답이잖아. 이렇게 가버리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오직 네 생각으로 네가 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 외에는. 나에게 불안감을 주지 마.”

   수현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나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내가 전화할게.” 수현은 다시 한 번 혜연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혜연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수현에게 말했다. “나에게 작은 배려를 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니?! 조금만 내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주면 금방 답이 나올 것 같은데...” 수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혜연을 뒤로한 채 빠르게 도망치듯이 집을 나갔다. 혜연의 집이 마치 사방이 막혀진 우리처럼 느껴져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 창문 너머로 시끄러운 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오피스텔 건물 밖에 세워둔 수현의 자동차소리는 새벽의 편안함과 조용함을 즐기며 깊은 잠을 자는 사람들을 깨울 것처럼 시끄러웠다. 거친 쇳소리는 제멋대로 공간을 찢어 놓으며 멀어지고 있었다.

 

   혜연은 수현을 새벽에 떠나보내고 난후 밤을 새워서인지 두통으로 힘들었다. “혜연씨 괜찮아? 아까 출근 때부터 얼굴이 안 좋던데...” 옆자리에 앉은 50대 동료 한명이 걱정된다는 듯 혜연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괜찮아요. 잠을 좀 못 잤더니 머리가 아파서 그래요혜연은 되도록이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 벌써부터 잠을 못 자면 안 되는데.. 나이가 들면 잠이 조금씩 없어지더라고...” 동료는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며 경험을 늘어놓으려고 했으나 혜연은 쓸데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 빠르게 말했다. “어쨌든 일은 해야죠. 일이 많이 밀리네요.” 혜연은 곧바로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 사실 아침에 출근하기 싫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수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무엇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지만 일상생활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수현을 사랑하듯 자신의 생활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관성 있게 살아야한다. 그래야 수현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만약 수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수현을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로 데려오면 되는 것이다.

삼일이 지나도 기다린 전화는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몇 번이나 확인했을까,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혜연은 점점 커져가는 수현에 대한 생각으로 초조함에 자신의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전화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니까. 혜연은 차라리 자신의 숨이 멎기 전에 수현을 데려올 생각을 했다. 자신이 죽으면 수현이 돌아올 곳이 없어진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한심한 짓보다는 수현을 다시 자신의 사랑의 울타리로 불러들여야 한다.

 

   “! 이게 무슨 짓이야! 당장 이거 안 풀어!” 수현은 침대위에 묶여있었다. 혜연은 수현에게 문자로 자신에게 사고가 생겨 당장 집에 갈 수 없다며 카드파우치 좀 병원에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수현은 아직은 혜연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혜연이 병원이라는 문자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 계속 통화를 해봤지만 혜연은 받지 않았다. 수현은 다급히 혜연이 집에 갔다. 혜연이가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한 마음에 빨리 움직였다. 급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현은 뒤통수에 심한 통증과 함께 바로 기절을 했다. 수현은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나니 수현은 팔다리가 묶여 있었고 혜연은 음식을 만들고 있는지 가스 불을 계속 조절하고 있었다. 혜연은 수현이가 깨어난 걸 알자 죽을 쟁반에 들고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했다. “깼니? 퇴근하고 배고플 텐데 이것 좀 먹어봐. 누워서도 편하게 먹을 수 있게 묽게 끓였으니까.” 수현은 지금 자신의 처한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혜연의 이런 기이한 행동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을 묶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행동하다니. 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띠며 수현에게 말했다. “놀라지마. 네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자꾸 일탈하려니까 내가 좀 잡아 준거야. 수현아, 넌 평소처럼 자유롭게 날 바라봐. 난 널 챙겨주며 사랑할 테니까.” 수현은 무서웠다. 자신을 묶어놓고 혜연은 오히려 안정감을 찾은 사람처럼 행복해보이기까지 했다. 수현은 혜연에게 될 수 있으면 부드럽게 말했다. “혜연아, 제발 이러지마. 너 이러는 거 정상 아니야. 내가 평소 너에게 너무 받기만 해서 나도 모르게 습관이 됐나봐. 네 마음 내가 잘 아니까 우리 같이 대화도 해보고 아니면 제3자에게 상담 좀 받아보면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너도 알다시피 난 자유롭게 널 사랑하고 싶어.” 혜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말했다. “수현아 나는 너에게 간단한 질문을 했을 뿐이야. 그런데 너는 답을 하지 못하고 피했잖아. 아니, 도망을 갔어. 그런 행동은 너 스스로도 나에 대한 사랑을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이 번에 내가 우리의 사랑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려줄게. 서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건 생기지 않을 거야.”

 

   혜연은 수현을 묶어놓은 채 다음 날 출근을 했다. 혜연는 나가면서 수현에게 다정히 인사를 하며 말했다. “내가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좀 불편하더라도 잘 참고 있어. 목마르면 왼쪽 비닐봉투에 빨대를 꽂아놨으니까 마시도록 해. 식사는 내가 와서 챙겨줄게.” 혜연은 수현이가 비명이라도 지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입에다 테이프를 붙여놓고 빨대구멍만 뚫어 놨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수현의 기저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나갔다. 수현은 혜연이가 미쳤다고 확신했다. 혜연이가 저렇게 된 것은 자신의 탓도 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곳을 탈출해 혜연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현은 침대 주변을 살펴봤다. 혹시라도 먹다 남은 커피 컵이나 물 컵 이라도 있을까 둘러보았지만 혜연의 집은 항상 모든 것을 제자리에 둔 정리된 곳이었다.

 

   혜연은 오랜만에 불안감이 사라진 아침을 맞이했다. 출근을 하면서도 괜히 평소와 같은 길거리도 전철도 직장도 모든 것이 새롭고 즐겁게 느껴졌다. 참견 쟁이 직장동료는 혜연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혜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오랫동안 불안했던 일이 없어졌거든요.” “어머, 잘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축하해!” 혜연은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수현은 수시로 팔과 다리를 비틀며 자신을 묶은 끈을 느슨하게 해보려 노력했다. 입을 막은 테이프도 얼굴에서 떼어내기 위해 입 안에 모아둔 물을 계속 입 밖으로 내보냈다. 다행히 손목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지자 있는 힘을 다해 손목을 비틀어 잡아당겼다. 손등의 살은 벗겨지고 아팠지만 참을 수 있었다. 혜연이 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나가야된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수현은 침대에서 벗어나자 바로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혜연의 집은 더 이상 자신들의 사랑의 장소가 아닌 밀폐된 우리와 같은 곳이다. 무섭고 소름끼치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생각도 하기 싫은 곳이다. 수현은 맨발로 경찰서를 향해 달려갔다. 시간은 일곱 시가 조금 넘고 있었다.

혜연은 같은 시각,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기 전 마트에서 수현이 좋아하는 간식거리와 먹을 것을 간단하게 샀다. 시장을 보고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했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수현도 아마 조금은 불편하겠지만 혜연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랄 것이다. 혜연은 수현이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미치자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어서 수현이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줘야지. 얼마나 배고플까

 

   수현은 경찰서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갔다. 경찰은 수현을 보고 놀란 듯이 달려와 수현을 부축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무슨 일에요!” 경찰은 서둘러 119를 불렀다. 수현은 경찰에게 최대한 자신이 느낀 공포감과 함께 혜연이 집에 갇혀 있었던 사실을 말했다. 경찰들은 바로 혜연의 집으로 출동했다. 혜연은 행복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연이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수현은 온데간데없고 침대에는 피 묻은 시트와 끈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혜연은 순간 온몸이 차가워지며 주위가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혜연은 침대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잠시만이라도... 날 기다려주지... 뭐가 급하다고 이렇게 빨리 떠났을까...” 그때 밖에서 사이렌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지만 혜연은 들리지 않았다. 최근에 소리가 사라지지 않아 혜연은 자신의 불안증이 나아가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소리는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경찰들은 혜연의 집에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이 혜연을 잡고 끌고 가며 무어라고 계속 말을 했지만 혜연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피스텔 건물 밖에는 혜연이 붙잡혀 가는 것을 재밌게 구경하는 이들뿐이었다. 수시로 휴대폰으로 혜연을 찍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남의 소리가 사라졌는데 저들은 오히려 즐거워하네...’





  * 유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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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korean 2020.03.01 19:12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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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 제 33차 소설 부문 공모_꺠진 가면은 뜨지 않는다. 1 제리강 2020.01.2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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