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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동화


학생, 주부, 직장인 등등. 사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산다. 달라질 게 없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힘든 현실을 떨쳐내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그 수단은 거의 비현실적이다. 마법,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 초능력, 혹은... 다른 세상. 이뤄질 리 없는 이런 말들을 두고 대개는 공감하지만, 혹자는 단순한 망상이라며 정신 차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비현실적인 말들이 현실이 된다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떨까?

그 날도 여느 때와 똑같은 시작이었다. 울리는 알림을 대충 끄고는 느릿하게 준비를 한 채 집 밖을 나섰는데, 평소와는 많이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웅성거리는 말소리, 노란 벽돌길과 왜인지 집 밑에 무언가 깔려 있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상황. 익숙한 묘사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잖아? 이게 왜 여기에...?”

꿈인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야 오즈의 마법사는 책 속에나 있는 세상이지, 지구에 존재하는 곳이 아니니까. 그럼 이게 자각몽이라는 건가, 처음 꿔보는데 신기하네. 대충 그런 결론을 짓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 친구, 초면에 미안하지만 하나만 물을게. 혹시 한국에서 왔니?”

? 뭐 그렇긴 한데... 누구세요?”

, 맞구나. 반가워. 나는 북쪽 마녀라고 하면 이해가 쉽겠지?”

, 그 착한 마녀. 이거 생각보다 꿈이 사실적이네.”

꿈이라니 무슨 소리니? 여긴 엄연한 현실이야 친구. 다만 네가 살던 곳과 다른 곳일 뿐이지.”

에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난 마녀의 말을 부정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누가 동화 속 풍경을 보았다고 해서 그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내 말에 마녀는 지겹다는 듯이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꿈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명심해 친구, 이게 진짜든 가짜든,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너의 경험이라는 걸.”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에 알았다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현실이라는 건가, 아니면 어느 쪽이든 괜찮다는 건가? 의문만이 깊어져 가는데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마녀는 다시 경쾌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친구. 넌 도로시처럼 사람 하나 깔아뭉개고 시작하진 않았잖니?”

? 도로시가 뭘 해요?”

, 그 친구도 너처럼 여기 온 이방인이었는데, 무고한 사람을 집으로 깔아버렸거든. 그래도 고의가 아니었으니까 구속되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인식이 좀 안 좋게 박혀서 한동안 고생했었지.”

무고한 사람이요? 근데 분명 책에서는 동쪽 마녀가 깔렸었잖아요. 게다가 악한 사람이었서서 시달리던 먼치킨들이 기뻐했다고 나와 있었는데요?”

,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여긴 네가 아는 동화랑 똑같은 곳이 아니야. 마녀와 먼치킨은커녕 완전한 악인도 선인도 없는 평범한 세상이지. 참고로 내가 북쪽 마녀라고 소개한 건 그냥 이해를 돕기 위해서니까 요술 좀 부려달라던가 구두 내놓으란 말은 하지 말아줘. 그런 거 못하니까.”

그럼 동화는 대체 뭐죠?”

그건 나도 잘 몰라,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의문에 숨겨져 있는지라. 하지만 믿어선 안 된다는 건 확실해, 맞는 건 대부분 풍경 묘사밖에 없거든.”

... ...”

뭔가 엄청난 걸 알아버린 것 같다. 12세 이용가 정도는 걸어두지 않으면 동심을 깨버릴 것만 같은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누구는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누구는 운 좋게 신데렐라가 되어서 행복하게 산다면 억울하니까. 이러는 편이 공평하긴 했다.

아무튼, 이제 내 역할은 끝이니까 대화는 이쯤하고, 저 노란 벽돌길을 따라가서 오즈를 만나도록 해. 그는 네가 원하는 답을 알고 있을 거야.”

제가 원하는 답이요? 아니, 갑자기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별로 가고 싶진 않은데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방인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해주는 게 룰이라서 말이지. 그리고 이게 이방인이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고 아무튼 가보도록 해 친구, 행운을 빌어줄게.”

...”

얼떨결에 대답한 채로 노란 벽돌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뭔가 이 세상에 오고 나서부터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답이라니, 동화를 믿지 말라고 했지만 오즈의 마법사 속 오즈는 지구의 발명품들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던 거나 다름없던 사람인지라 인상이 좋을 수가 없었다. 또각또각,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맞추어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서양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크고 울창한 떡갈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숲, 주변에서 들려오는 새와 풀벌레 소리, 평화로운 풍경 속 유난히도 크게 울리는 내 발소리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찾아간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건가. 그리고 여긴 정말 현실인 건가? 어째 가면 갈수록 질문만 늘어나는 것 같은데,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오즈가 가지고 있다는 건가?

~, 모르겠다!”

뭐가요?”

으악! , 아니 왜 갑자기 튀어나오고 그러세요.”

, 죄송해요. 그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물어보고 싶어져서 말이죠.”

, 그래도 그렇게 물으면 이 사람이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안 그래 형?”

그래, 막내 너는 호기심이 너무 많아. 귀찮게 뭐 그런 걸 일일이 다 신경 쓰고 사냐?”

 똑똑하고 부지런한 막내, 어중간한 둘째, 게으른 첫째. 이건 설마 아기 돼지삼형제인가? 단순히 오즈의 마법사에 관련된 등장인물들만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근데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잖아?

에이, 그래도 좋든 싫든 말은 걸어야 하잖아요, 우리가 할 일도 있고.”

, 그 안내인가 뭔가 하는 거?”

나 참, 자기들끼리 알아서 가라고 하면 편할 텐데 말이지.”

저기... 아기 돼지삼형제 분들, 맞으시죠?”

,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하지.”

사실 돼지는 아닌데 말이지.”

어떤 녀석이 멋대로 그런 이야기를 쓴 건지... 어이가 없다니깐. 볏짚이나 나뭇가지로 집 지은 건 둘째 치고 그게 왜 늑대 호흡에 날아가?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그래도, 동화는 현실 따져가면서 보는 게 아니라 어린 애들한테 교훈을 주려고 보는 거잖아요?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라, 라던가.”

그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죄다 동화에 대한 환상을 깨는 말들만 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동화는 그렇게 사실적으로 쓴 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그런 신비로운 요소를 채택한 거다. 쓴 목적도 교훈을 주기 위해서고, 그러니까 아까처럼 복잡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도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첫째의 말이 귓속으로 훅, 들어왔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말이 좋지 그게 다 뭐냐. 실제로 그렇게만 살면 인생이 재밌어?”

그래도 그러지 않으면 못 하는 것들도 많고, 결국 손해 보게 되는 일도 많잖아요?”

물론 네 말대로 성실과 근면이 중요한 건 맞지, 하지만 형 말은 그것만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야.”

무슨 뜻이에요?”

그러니까, 형들 말을 풀어 말하자면 그 아기 돼지삼형제에 나오는 우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는 벽돌을 쌓아서 일일이 집을 지었는데, 사실 그러는 것보다 시내나 마을로 내려가서 살 곳을 찾는 게 더 빠르고 편하잖아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돈이니까 우리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일해야 하는 거죠. 즉 성실과 근면은 삶의 무조건적인 목적이 아니라 효율적인 달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필요할 땐 꺼내 쓰고, 안 필요할 때는 넣어 두고. 늘 쉬지 않고 일하면 지치잖아요?”

그렇죠.”

게다가 어렸을 때 그렇게 교훈을 줘도 막상 커가면서 매 순간 성실한 사람은 없잖아? 그럴 바엔 좀 더 유익한 걸 가르쳐주는 게 좋을 걸, 예를 들면 방금 막내가 말한 내용이라던가.”

그래도 그건 너무 동심 파괴적인 내용 아니에요?”

어차피 이 세상엔 말하는 돼지도 폐활량이 강한 늑대도 없어, 전부 다 망상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상상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 꿈이 현실이 될 수도 없잖아?”

솔직히, 지금도 현실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요.”

너무 솔직하네, 아무튼 우리가 해줄 얘기는 여기까지야. 방금 형이 한 얘기랑 막내가 한 얘기들은 잘 새겨두고, 너는 이제 빨간 돌담길을 따라가면 돼.”

노란 돌담길이 아니라 빨간 돌담길이요?”

세상에 목적지를 향하는데 어떻게 길이 한 갈래밖에 없겠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빨간 돌담길을 따라가, 정확한 안내니까.”

알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잘 가, 행운을 빌게.”

둘째의 말대로 나는 빨간 돌담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동화가 주는 교훈은 짧고 간단하며 유익하다. 하지만 그 한 마디로 평생을 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래도 아까 셋째가 말했던 내용을 넣으려면 동화가 훨씬 복잡해질 텐데, 그러면 애들이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주변 풍경이 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는 서양 쪽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큰 나무들이 잔뜩 서 있었는데, 지금은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변화가 신기해서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나아가자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연못, 그리고 그곳에 앉아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저기...”

? , 새로운 이방인이 왔구나?”

, 실례지만 누구세요?”

난 콩쥐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콩쥐라면, 전래동화 콩쥐팥쥐에 나오는 그 사람인가? 조금 더 단정하고 조용한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쿨한 느낌에 인상도 소녀가 아니라 시원시원하고 멋진 언니 느낌이었다. 역시 동화는 믿어선 안 되는 건가.

표정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라서 많이 놀랐나 보네?”

... , 아무래도 책에 나오던 묘사랑은 좀 달라 보여서요.”

나 참, 하여튼 그놈의 동화 때문에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니까.”

그렇다는 건 콩쥐팥쥐에 나오던 내용도 사실이 아닌가 보죠?”

대충 맥락은 맞는데, 디테일이 좀 달라. 앞에서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마법이나 요정도 없는 세상에 선녀나 말하는 소 같은 게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난 그렇게까지 조신한 성격이 아니라고.”

그럼 진짜로 그런 계모랑 동생한테 괴롭힘 받으며 자라신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그래도 마냥 당하기만 하진 않았어. 저항도 하고 대들기도 하고 그랬지.”

그랬군요...”

솔직히 처음엔 무서우니까 거부할 생각도 못 한 채로 일만 했었어. 내가 괜히 저 사람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더 큰 벌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지, 두려웠거든. 근데 살다 보니까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대로 영원히 살게 되면 난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닐 것 같았어, 계속해서 이렇게 지내다 보면 만약 내가 새엄마랑 팥쥐에게서 벗어난다고 해도 계속 겁쟁이로 남아있을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어느 정도 마음이 서더라, 그다음부터는 엄청 싸웠어. 특히 베 짜고 겉피 석 섬 찧고 오라고 했을 때, 그땐 정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팥쥐의 비단옷이랑 계모가 숨겨둔 돈으로 꽃신을 사서 잔치에 갔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 다음부터 내 인생이 좀 편해졌거든.”

뭔가, 전래동화 주인공은 다들 착하고 순수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런 내막이 있었네요...”

그럼, 슬픈 말이지만 강해지지 않으면 나한테 곤란이 닥쳐왔을 때 이겨낼 수가 없거든. 근데 동화는 맨날 선하면 상을 받고 악하면 벌을 받는다, 이 얘기만 주구장창 하고 있으니 애들이 뭐 유용한 걸 배우겠어? 세상에 완전히 선한 사람은 존재할 수가 없어, 그거야말로 판타지지. 좀만 안 착해 보여도 저러면 안 된다 하면서 뭐라 하고, 근데 알고 보면 그거 다 편견이거든.”

그래도 그런 얘기는 애들한테 말하기엔 부적합하잖아요, 애초에 동화라는 게 애들을 위한 거고, 그래서 이렇게 비현실적인 거잖아요?”

... 너 혹시 콩쥐팥쥐라는 동화의 결말 부분을 알고 있어?”

그게... 콩쥐는 꽃신을 찾아온 젊은 관리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팥쥐랑 새엄마는 벌을 받지 않았나요?”

,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그게 제대로 된 끝이 아니야. 진짜 엔딩은 나쁜 마음을 품은 팥쥐가 죄를 뉘우친 척 콩쥐에게 접근한 다음, 콩쥐를 연못에 빠뜨려버려. 그리고 팥쥐는 관리의 부인인 척 행세하며 살게 되지. 그것에 원한을 품은 콩쥐는 연꽃으로 환생한 뒤 관리의 집에 두어지게 되는데, 팥쥐가 꽃 앞을 지나갈 때마다 연꽃에서 손이 나와 그 머리채를 잡아 뜯었대.”

어우..."

그래서 팥쥐는 열이 받아 그 꽃을 불태웠는데, 그게 오색구슬이 되고 웬 노파한테 주워줬어. 그 후 구슬은 콩쥐 귀신으로 변해서 자신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관리에게 밝히고 팥쥐랑 그 계모에게 복수하고 되살아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야.”

“... 그거 어린 애들이 봐도 되는 내용이에요?”

사실 막 팥쥐에게 사지를 찢는 형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시체로 젓갈을 담가 계모에게 보냈다. 이런 내용도 있는데, 내가 자세히 얘기하긴 좀 뭐해서.”

너무 잔인한데요?”

그치? 근데 원작에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는 거 보면, 적어도 이 글을 처음 쓸 때 동화는 어린아이들만 읽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는 거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즉 동화가 아이들의 시점에 맞춰져야만 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라는 거야.”

평소에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이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가 고정관념에 갇혀있을 줄은 몰랐다. 마녀의 말이 맞았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은 어쩌면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껴안고 있던 어려움의 답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조언,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그럼 이제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야. 파란색 돌담길을 따라가도록 해, 행운을 빌어 친구.”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이 세상이 현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내가 여기 있고, 들은 말들에 대해 곱씹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엔 장미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잘 관리된 상태를 보아하니 관리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 넓이면 거의 성이나 궁전에 있을 법한 정원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신데렐라나 라푼젤 같은 동화가 나오는 건가? 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화사한 색감 속 하얀 식탁과 의자에 앉아있는 공주님, 나른한 표정과 어쩐지 장난스러운 미소가 특징적인 사람이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고 하면 알지?”

,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은 저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가요?”

벌써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이네, 좋아. 그 전에 하나만 물을게. 넌 동화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요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죠. 여기 계신 분들은 대부분 싫어하시는 것 같지만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멋대로 왜곡해버리니까 싫은 사람은 싫어하겠지. 하지만 난 좋아해. 환상적이잖아? 마음대로 공상할 수 있을 만한 흥미로운 소재야. 마법, 요정, 말하는 동물과 엘프, 악마, 그 외에도 이것저것. 멋지지 않아?”

그렇지만 책에 나온다고 해서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망상일 뿐이잖아요? 이뤄질 가능성도 없는 얘기인데 멋지지는 않죠. 실속도 없고.”

실속이 없다니, 이런 생각이 얼마나 좋은 건데.”

하지만 그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이야기들도 많잖아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라던가, 공주님이 나오는 동화도 그렇고, 전부 섣부른 호기심과 헛된 상상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었을까요.”

판도라는 신이 호기심을 억지로 심어서 그렇게 된 거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생각과 이미지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어.”

너무 비약적인 것 같은데요.”

내 생각엔 네가 상상의 개념을 너무 큼직큼직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물론 드래곤이라던가 외계인도 훌륭한 상상이지만, 네가 평소에 하는 생각들도 알고 보면 전부 다 상상이야.”

예를 들면요?”

, 오늘 학교 가기 싫다. 어디 학교 좀 터트려줄 사람들 없으려나 라던가. , 그놈의 상사 놈, 보기 싫은데 퇴사 좀 안 해주려나? 같은 거.”

에이, 그게 어떻게 상상이에요.”

다 상상이지, 왜냐하면 내가 방금 말한 상황들은 다 누군가가 바라거나 생각했던 일이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잖아? 조금 더 작은 개념까지 가보자면 아, 오늘 점심엔 돈까스가 나오면 진짜 맛있겠다. 이것도 상상이 될 수 있어. 그 맛을 생각하면서 맛있겠다고 하는 거잖아?”

궤변이에요, 애초에 그런 건 무언가를 바란다는 느낌이 훨씬 강한 거 아니에요?”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될 줄은 몰랐는데, 너희들 세상 국어사전에 보면 상상의 의미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본다는 뜻이야.”

아니, 공주님이 왜 저희 세상 사전을 봤어요?”

너도 우리 세상을 바탕으로 써진 동화를 봤는데 여기 사람들이라고 너희들 세상의 책을 못 보겠니?”

그건 그렇지만요...”

그리고, 지금 네가 스마트폰을 쓸 수 있는 것, 옷을 입을 수 있는 것, 아파트에서 살 수 있는 것, 그거 전부 다 상상의 산물이야, 누군가 그 많은 발명품들이 있으면 어떨까. 라고 생각해보고 만들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해서 모든 창작이 이뤄지는 거니까.”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상상이 그런 세세한 생각들까지 다 포함하는 말일지도 몰랐고, 나도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많은 어른들이 대개 헛된 망상은 금물이라고 얘기하니 딱히 큰 상상은 하지 않았었다. 물론 누군가가 만들어낸 것은 그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창조의 영역에 한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평소 우리의 일상에서까지 상상을 한다고 해봤자 뭐가 좋을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잘 와 닿지 않는 것 같아서 하나 더 얘기하자면, 네가 꿈꾸는 미래도 전부 다 상상이야. 전부 다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을 언젠간 해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

, 드디어 납득한 표정이네.”

 아니, 놀라고 있을 뿐인데. 뭐 그래도 맞는 말이니 넘어가고, 확실히 그 부분은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간단한 해답이었는데 일찍이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바보 같다. 왜 다른 부분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 어찌 보면 상상의 가장 주된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상상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으니까. 누군가는 그걸 희망 고문이라고 칭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만일 내가 내일의 존재를 모른다면 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에 급급할 거야, 물론 주어진 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겠지만 이룰 수 있는 것은 단기적인 목표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내가 1년을 살고, 10년을 살고, 100년을 산다면 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그걸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이 있어. 그렇다면 언젠가 올 그 시간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잖아?”

확실히 그러네요. 이제 좀 이해가 됐어요. 그나저나 생각보다 열정적이시네요, 뭔가 나른하고 장난스러운 이미지였는데.”

에이, 만약 내가 그런 성격이었다면 상상을 하지 않을 걸? 그 순간조차도 전부 장난일 테니까,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이제 너는 초록색 돌담길을 따라가면 돼, 앞으로의 여행에 행운을 빌게, 친구.”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굴려지기 시작한 발걸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쩐지 머리가 맑은 기분이었다. 이곳에 온 뒤부터 들어온 많은 이야기들과 그로 인한 생각 때문에 주변을 보지 못했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아주 선명히 보였다. 장면을 가득히 채웠던 장미 덤불은 사라지고 지금은 다시 커다란 떡갈나무들이 당당히도 서 있었다. 그 가운데로 시원하게 뚫린 벽돌길, 그곳을 박차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질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는 에메랄드빛 성에 도착했다. 오즈의 성이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내쉰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계시나요?”

손님이 오셨군요. 뭐 말 안 해도 알거라고 생각되지만, 제 이름은 오스카 조로아스터, 줄여서 오즈입니다.”

안녕하세요.”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신 눈치네요. 묻고 싶으신 것도 많아 보이고.”

누가 그랬거든요, 당신이 제가 원하는 답을 쥐고 있을 거라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저를 따라오시죠, 차라도 한 잔 내어드리겠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인 오즈는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가 보니 나 온 것은 전망이 탁 트인 테라스였다. 내가 걸어온 길이 이런 모양이었나 싶어 잠시 보고 있는데, 오즈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내게 앉으라고 말했다. 동화 때문에 갖게 된 부정적인 인식이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동화와는 다소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즈에 대해 그리 신뢰가 없진 않았다. 오히려 기대되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줄지, 궁금했다.

어떻게,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 그랬던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제가 짠 코스가 마음에 드셨다니.”

직접 짜신 코스라고요?

,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안내역을 맡기고 이방인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 것도 접니다.”

왜죠?”

그것이 이곳으로 오게 된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이방인이었으니까요. 이 세상을 경험했을 때 바뀌었던 저처럼, 이곳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바뀔 사람들이 기대되었습니다.”

그럼, 동화는 대체 뭔가요?”

이곳의 이야기에 약간의 상상을 가미해서 내드린 이야기죠.”

내 준 사람은 당신이고요?”

정확합니다. 약간의 기대를 품고 세상으로 내보낸 씨앗이 이렇게 크게 성장해서 돌아올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여기 분들은 동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고, 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제멋대로 이야기를 각색해서 내버렸으니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신 게 당연하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 책들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그렇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화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싶어 하셨어요.”

맞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이젠 단순한 교훈 한 두 마디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이젠 동화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요?”

당신이 들으셨던 아기 돼지삼형제나 콩쥐,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그분들이 얘기해 주셨던 요소들을 집어넣은 이야기죠. 겉으로 보면 신비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인 것 같지만, 속을 들춰보면 철학적인 면들이 숨겨져 있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뭔가... 잘 안 떠오르네요.”

그런가요? 하지만 이런 소설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어린 왕자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대표적이죠. 둘 다 동화라고 보기엔 애매합니다만 사람들은 그 이야기들을 동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읽고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다소 뻔한 내용으로 시작하며 비슷한 플롯들을 늘어놓지만, 그 속에 보석 같은 요소들을 숨겨놓은 게 동화입니다. 모든 독자들은 그 보석을 채집하는 훌륭한 광부인 거죠. 그렇게 수확한 것들로 뇌를 살찌울 수도 있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슬프게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주시더군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다시 광부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새로운 보석들로 이야기를 채워나가야죠.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이야기들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마지막 질문만은 어쩐지 뚜렷이 꽂혀 들어왔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애초에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그 말들은 결국 그분들의 말이지 저한테서 비롯된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직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어쩌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오즈는 어쩐지 기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좋습니다, 당신은 오늘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바로 결론을 도출해버렸다면 오히려 제가 놀랐을 겁니다. 자신의 이야기는 그렇게 쉽게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저 생각들을 들은 보람이 없어지지 않나요?”

그럴 리가요. 당신이 무언가 말하고 싶어지게 된 이유는 그 말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동화의 순기능 또한 그렇죠. 이것저것 생각들을 제시해주지만, 그것이 답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결국 답을 말해야 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에서 말했던 분들도 다 생각이 달랐을 겁니다. 동화의 판타지성이 좋다고 하신 분도 있었지만, 그 망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기에 다른 말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분도 계셨죠. 그러한 현상들은 당연한 겁니다. 사람이 모두 다 다른데 어떻게 같은 답만을 고르겠어요. 그건 이상한 거죠. 하지만 우리는 그런 다양한 생각을 듣고 새로운 걸 발상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동화가 새롭게 바뀌더라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모두가 자신만의 문장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군요?”

, 솔직히 이 또한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화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 결과에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 이제 제가 할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는 작별할 때가 온 것 같네요.”

잠깐만요, 아직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이방인들이 이 세상으로 오는 건가요?”

글쎄요, 마법이라고는 하나 없는 세상들에서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낭만으로 남겨둡시다. 그런 것들이 책에서만 존재한다면 좀 섭섭하잖아요?” 오즈의 답을 듣고 나는 푸슷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때로는 낭만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 그럼 이제 정말 작별입니다.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함께하길 빌게요.”

저도 그렇게 할게요. 많은 이야기 들을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내 눈이 저절로 감겨 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을 뜨니 익숙한 내 방이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또한, 평범한 도시의 일상이었다. 지금 이 기록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도 그 많은 경험 들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다. 내가 그 순간들을 느끼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동화는 단순한 말 몇 마디만을 주고, 우리는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나만의 동화를 써 보는 건 어떨까. 기왕이면 상상이 가득 담겨 있는 걸로. 그리고 그 속에 자신만의 생각을 숨겨보자. 누군가가 보았을 때 다른 말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성명: 김주연

메일주소: kimkkopggi@naver.com

전화번호: 010-5237-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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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뻘건눈의토끼 2021.09.18 17:49
    오늘밤에 저녁먹고서 다시 읽어봐야 겠는데 여태컷 이룬 저의 노력이 결과를 다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주연님의 글처럼 동화로써 남는다면
    저또한 오래동안 mkorean 에서 복을 나누고 받겠지요... ^_^ 뻘건토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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