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방 안에 새벽의 푸른빛이 젖어들고 있으나
진정 꽉꽉 차오르는 것은 그게 아니다
이미 지나간 옛날의 푸르름과
짙은 빛이 옅어지고 나서야 꿈에서 깨던 날들의 반복
고요한 새벽에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요동을 쳤던가
딱 일 년 전 쯤의 그날
그대를 잃어버리고 위로 올라가버린 그대를 마지못해 배웅하던 날
아침이 온다는 것은 한 없는 그리움의 형을 선고 받은 것이었다
지금이 딱 일 년 전 쯤의 그날
옅어지는 푸른빛이 완전히 아침으로 변하고 나서야 나는
차오르는 그리움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여름의 문을 닫다
뜻 모를 서글픔들이 밀려왔다
가을도 나름 이름값을 한다고 서늘해지는 날
어느 순간 여름이 갔다는 걸 알았다
뜨거운 햇빛인 줄 알고
붉어진 볼을 그대로 두었던 게
베갯잇 들추면 보일 듯한 어제인데
나는 벌써 나무의 고독을 보았던 것이다
멀어진 여름을 혼자 뒤쫓고 있는 가을날
어느 순간 여름이 갔다는 걸 알아버렸다
빈 잔
우리 엄마 삐뚤어진 발걸음으로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달도 추워 들어간 한 겨울 밤
그 때 동안 쌓이고 쌓인 가슴속은 얼마나 시렸을까
나쁘다, 나쁘다 하는 푸념에
나는 평소와 다른 미안함이 깊이 서렸고
나쁘다, 나쁘다하는 그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잔은 비었고
할 말도 끊겨 고개만 푹푹 쓰러지는데
그 속에 또 채워지는 것이 슬퍼
나는 누가 볼세라 고개를 돌렸다
그들을 읽다
우리의 삶이 언제부터 이렇게 팍팍해졌을까
지나가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것들
살아왔던 것들에 대한 짐과
살아가야 할 것들에 대한 짐들이
단 몇 초, 얼굴을 스치는 사이에
삶이 보이고 또 보여주고
그들의 삶을 읽는 동안에
나는 잠시나마 잃었던 따스한 눈길을
그네들의 주름 하나하나에 보내고 나면
나는 또
우리의 삶이 언제부터 이렇게 팍팍해졌을까
한다
사선
그 긴긴 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는 손에 연필을 쥐고
그대를 써내려가는 것 뿐
맨 처음 그댈 담았던 눈동자를 추억하며
나지막이 그대를 써 가는데
어쩌랴
툭, 툭
엇나가고 마는 마음들이 부딪쳐
결국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그대 하나 쓰지 못하고
이 종이 속에 그대 하나 녹여내지 못하고
다시 기나긴 밤이 차오를 때
내 그대를 부를 수 없음을
결국 그날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먼 날의 추억과 밤처럼 길고 긴 한숨과 아릿한 죄책감 하나 안고
잠에 드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