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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20:17

ELOQ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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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OQUENCE


프롤로그


“1946번 입니다.”

경비 두명이 30대 중반의 영혼의 양 팔을 잡고 초코우유가 여러개 올려져있는 책상 앞에 데려다 놓자, 영혼의 몸에 두꺼운 쇠사슬이 둘러졌다.

“전생에 인간들한테 꽤나 당하셨군, 신참인가, 생쥐들?” 여우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발을 아래로 내리며 두 경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경비들은 흠칫 놀라며 여우를 바라보았다.

“맞잖아, 내가 딱 보면 안다니까.” 여우는 왼쪽 눈썹을 까딱이며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책상 반대편에 서있는 1946번 영혼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는 두꺼운 책자를 폈다.

“저, 저희가 생쥐 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경비 두명은 눈을 깜빡이며 여우에게 물었다.

“계속 코 찡긋거리는 것도 그렇고, 두 손을 입 앞에 계속 가져가는 것도 그렇고. 전생에 생쥐였다는 거 티 내고 다니지 않으려면 나를 좀 보고 배워라.” 여우는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여우였던 자신의 전생을 떠올렸다. “가봐, 생쥐들아.” 그가 말하자 경비들은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건가요, 저승사자님?”

앞에 뻘줌하게 서 있던 영혼이 말을 꺼내자 여우는 화들짝 놀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 깜짝이야, 네가 있었지. 왜 이렇게 조용하니, 이 사람아. 아무도 없는 줄 알았잖아.” 여우는 인상을 썼다가 곧 피며 말했다. “어떻게 되긴, 방에 갇혀서 고통 받다가 다시 고통 받고 또 고통 받는거지, 뭐.”

여우는 책자를 펴 천천히 읽어내렸다. “우와, 인간 주제에 인간한테 죄를 지어도 참 많이 지었구나, 너는.” 책자에 빼곡히 적혀 있는 영혼의 죄들을 다 읽어본 여우는 감탄했다.

“그,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되는건지..” 영혼은 몸을 달달 떨며 여우에게 물었다.

“너는 참 시끄럽기까지 하구나.” 여우가 검지와 엄지 손가락을 맞대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허공에 선을 긋자 영혼의 입은 닫혀버렸다. “너는 저기 맨 끝방으로 가. 좀 오래 있어야겠어. 이번 생이 두번째 생이었던 걸 다행으로 여겨. 만약 이게 세번째 생 이었더라면 너는 지옥에 떨어졌다고.” 여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영혼은 무언가에 빨려가듯 순식간에 긴 복도의 맨 끝 방에 갇혀버렸다.


 탕!

여우가 책상을 손으로 탕 쳤다.

“너네들, 다음 생에서도 죄 꼭 지어서 지옥에 가라, 제발. 너네들은 재활용이 돼도 쓸모가 없을 것들이야. 너네들이 지은 죄가 산을 이루고 있으니, 그 산이 침식될 때 까지 억년은 더 걸리겠다.”

여우가 앉아있는 책상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복도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다. 방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죄를 지은 영혼들이 사슬에 묶여 침울하게 앉아있거나 서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여우는 그런 복도를 째려보며 초코우유를 한모금 마셨다.



 1


 “1957번 입니다, 여우님.”

경비 두명이 곧 여우의 앞에 어떤 여자 영혼을 데려왔다.

“가봐, 생쥐들아.”

경비들이 여자 영혼을 붙잡고 있던 손을 탁 놓자마자 여자영혼의 몸에 사슬이 감겼다.


 “어디보자, 너는 무슨 죄를 지었느냐.” 여우는 책상 한쪽에 벗어놓았던 금색 테가 동그란 안경을 쓰며 여자영혼의 죄가 담겨있는 얇은 책자를 펼쳐보았다. “뭐야, 이건?” 책자를 천천히 읽어내리던 여우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건 죄가 아니잖아. 잘못 보낸 모양인데?” 여우는 책자를 내려놓고 여자영혼을 위아래로 노려보았다.

 

 “앉아, 일단.” 여우가 말을 끝내자마자 작은 의자가 책상 앞에 놓여졌다. 영혼은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1957번, 사람을 죽인 죄. 그런데 의도적인 살해가 아니다..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운영 체제가 바뀐건가…. 88 세에 사망..” 여우는 그렇게 책자를 뚫어지게 보며 한참을 갸우뚱거렸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젊은 모습의 1957번 영혼은 앞에 앉은 여우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말끔히 빗어올린 2대 8 가르마는 튀어나온 머리카락 하나 없이 깔끔했고, 날카로운 눈매와 턱선에 이국적인 콧대까지 지닌 여우는 영혼의 눈에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멋진 저승사자로 보였다.

 

 “아무래도 잘못 온것 같아. 너, 기억 나는거 없지?” 여우는 상체를 기울여 영혼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이승에서의 기억이 없으면 확실히 잘못 온건데. 응? 말해봐, 말하는 법도 까먹었니?” 여우가 보채자, 영혼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아무 기억도 없어요. 제가.. 전생에 사람을 죽였나요..?” 1957번 영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죽이긴 했는데, 여기 써져 있는 당신 기록을 보면 -”

“그, 그럼 여기가 지옥인가요? 저 지옥 가는 거에요?” 영혼이 여우의 말을 끊고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말이 많다,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너는 34살에 네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너와 네 아이들을 해치려고 하자 화분으로 네 남편 머리를 내리쳐서 죽였어. 그런데 이건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잖아. 보통 이런 경우는 천국으로 직행이거든?” 여우가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건가요, 저승사자님!” 영혼이 슬픔과 절망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지옥은 아니야. 첫번째나 두번째 삶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그 다음 생을 살기 전에 잠깐 갇혀있는 감옥같은 곳이지. 또, 네가 이승에서의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네가 천국으로 가는 과정에서 뭔가 착오가 생긴게 틀림없어. 여기로 오는 영혼들은 이승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오거든. 그리고, 나는 저승사자가 아니야. 저승사자들이랑은 급이 다르지, 흐흠. 여우님이라고 불러.” 여우가 대답했다.

 

 여우는 잠시 고민했다. “내가 여기에서 일해왔던 천년동안은 이런 일이 없었단 말이지. 내가 총괄님한테 직접 가봐야 하나? 일단 기다려보자. 착오가 발생했다고 위에서 연락이 오겠지.” 여우는 영혼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너도 참 힘든 생을 살았구나. 푹 쉬었다가 다음 생에서는 행복해라.” 여우는 초코우유를 다시 한모금 마셨다.

“저.. 여우님은 전생에 여우였어요?” 영혼은 여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눈썰미 좋네. 정말 고독하고 슬픈 여우 한마리였지. 흐음, 그런데 인간의 손에 죽었어. 그래서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됐나봐. 죄 지은 영혼들 여기 와서 쩔쩔매는 거 보면 속이 시원하다니까.” 여우는 픽 웃으며 말했다. “이런, 내가 원래 이렇게 다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데. 영혼이랑 이렇게 오래 얘기한 적은 처음이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영혼은 큰 눈을 깜빡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좀 있으면 너도 천국에 가게 될 건데 그 동안 나랑 얘기나 하자. 저 영혼들한테 잔소리 하는 거 말고 통 대화상대가 없어서 말이야.” 여우는 끝없이 펼쳐진 복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요.” 영혼은 수줍게 웃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듯 눈을 크게 뜨고 여우에게 물었다. “저요, 어떻게 생겼어요?” 여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영혼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얼굴은 작은 편이고, 눈이 동전마냥 동그랗고, 콧대는 높고, 입술은 도톰한 것 같네. 나는 어때 보여?” 여우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선 영혼에게 물었다.

“뭐, 저는 그냥 그렇게 생긴 얼굴인가 보네요. 여우씨는 눈썹은 진하고, 눈매는 날카롭고, 콧대는 하늘을 찌를것같고, 턱선은.. 날카로워요.” 영혼이 말을 끝내자마자 여우는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래? 그냥 그렇게 생긴 얼굴인가 보네, 나도.”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오는거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영혼을 이렇게 데리고 있자니 총괄님한테 혼이 날 것같아 여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 내가 빨리 돌아올게.” 최근 천년 동안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했던 여우는 어느새 1957 번 영혼과 대화를 하는 것에 재미가 들려있었다. 여우는 정장 자켓의 끝부분을 잡고 아래로 살짝 내리며 옷을 정돈했다.


 “뭐? 잘못 들어온 영혼이 있다고?” 총괄님은 깜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우를 쳐다보고선 여우의 손에 들린 책자를 낚아챘다. “이리 줘봐.”

“1957번 영혼인데, 잘못 온것 같네요.” 여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아. 저 책자가 잘못 기록됐을 수 도 있고, 진짜 저 영혼이 잘못 보내진 것일 수도 있지. 이거 확인하는데 며칠은 걸릴텐데. 사흘정도? 사흘정도만 자네가 그 영혼을 데리고 있게. 부탁한다.” 총괄님은 한 숨을 크게 쉬며 여우에게 책자를 건넸다.

“총괄님, 제한테 사흘이나 데리고 있으라는 말입니까? 보상도 없이?” 역시나 그냥 넘어갈 여우가 아니었다. 총괄님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여우를 한번 째려봤다.

“아아, 그래. 보상을 해줘야지. 소원 하나 들어줄게. 말썽 없이 얌전히 그 영혼 데리고 있어주면.” 여우는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방을 나갔다.



2


덜컥-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에 1957번 영혼은 뒤를 돌아보았다.

“얌전히 있었군. 잘했어.” 여우는 따가가각 구두소리를 내며 책상 앞에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아 초코우유를 한모금 마셨다.

“입맛이 완전 어린애네요.” 영혼은 여우가 내려놓은 초코우유를 쳐다보며 말했다.

“단 걸 워낙 좋아해서. 이런 일 하면 당이 떨어지거든.” 여우는 피식 웃었다. “사슬은 풀어줄게.”

“저는 어떻게 된대요, 여우님?” 저절로 사라지는 사슬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영혼은 여우에게 물었다. “천국으로 보내준대요?”

“아직 몰라. 사흘만 기다리래. 내가 방 하나 줄게, 걱정은 하지마.” 여우가 대답했다.


 “어떤 색 좋아해?” 여우가 영혼한테 물었다.

“글쎄요, 제가 무슨 색을 좋아했을까요?” 영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놓인 초코우유를 보고 말했다. “갈색이 좋은 것 같아요. 따뜻한 브라운색.”

영혼의 말이 끝나자마자 복도 맨 앞에 방 문이 하나가 생겼다.

“내가 심심할 때 너랑 놀게 내 책상 바로 옆에다가 만들었어. 괜찮지?” 여우는 신난다는 표정으로 영혼을 보았다.

“좋네요.” 영혼은 여우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여우의 귀에 종소리가 울렸다. 하루가 지났다는 걸 알려주는 종소리보다 더 크고 규칙적이었다. 여우는 알지 못했지만 그건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


 “진짜 신기해요. 제가 죽기 전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요?” 영혼은 어느새 방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돌리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간 영혼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따뜻한 브라운색이네요. 다른 방들도 다 그래요?” 영혼이 뒤를 돌아 문 밖의 여우에게 물었지만 여우는 그 자리에 없었다. 영혼은 방 밖으로 나와 책상 앞으로 갔지만 여우는 온데간데 없었다. 영혼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책상 앞에 다시 얌전히 앉아 여우를 기다렸다.


 여우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잠시 밖에 나가 있었다.

넥타이를 가슴치까지 푼 다음 후,후,후,후, 하며 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상해. 이것들이 천년 전에 나 여기로 데려올 때 이상한거 심어놓은 게 분명해.” 여우는 진정이 될 때까지 온 저승을 뛰어다녔다.


 덜컥 -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영혼은 얼른 뒤돌아보았다.

“....” 아무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오는 여우를 보고 영혼은 눈치를 보며 다시 몸을 돌렸다.

‘댕-’ 종이 한 번 울렸다. 여우는 아까 제 귀에만 들렸던 종소리인 줄 알고 흠칫 했지만 곧 하루가 지나갈 때 울리는 종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영혼이 종소리를 듣고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종소리. 24시간이 지나갔거든.” 여우는 넥타이를 바로 매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졸려?”

“아니요.” 영혼이 대답했다. 그리고선 다시 어색한 침묵이 시작됐다.


 “있잖아요, 그럼 여우님도 영혼이에요?” 영혼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응.” 여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아니, 모르겠어.” 여우는 새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으며 대답했다. “이승에서 죽긴 죽어서 여기 온건데, 나도 내가 뭔지 잘 모르겠어.”

아아, 그렇구나. 영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여우는 책상 한 쪽에 쌓인 책자들을 괜히 하나씩 펴보았다. 어쩌다가 책자 너머로 영혼과 눈이 마주치면 바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저..는 들어갈게요.” 1957번 영혼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 안으로 들어간 영혼은 아까 마저 구경하지 못했던 방을 구경했다. 갈색 이불이 올려져 있는 하얀 침대를 한참을 보다가 그 위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전생에 힘들게 살았구나.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니. 문득 여우가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살으라고 말해 준 게 생각이 났다.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처음 듣는 위로 같은 말이었다. 이승에서의 기억은 전혀 나지 않았지만, 내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해줄 수도 없이 힘들었던 생을 산 게 분명했다. 영혼은 밤새 두 다리를 꼭 끌어안고 여우의 그 한 마디를 수도 없이 되새김질 했다.



3


 ‘다음 생에는 행복하게..’ 몇번을 중얼거렸을까, 영혼은 고개를 들어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는 방 문 앞으로 갔다. 문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책상에 여우가 앉아있었다. 영혼은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덜컥’

커다란 문이 열리고 경비 두 명이 어떤 남자를 끌고 책상 앞에 데려다 놓는 게 보였다. 여우가 경비에게 가보라고 손짓하자, 경비들은 곧 커다란 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의 몸에는 쇠사슬이 감겼다. “죄를 지은 영혼이구나...” 1957번 영혼은 창문으로 남자영혼과 여우를 바라보았다.

어제와 같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여우는 남자영혼에게 무언가를 말한 뒤 공중에 손짓하자 남자영혼은 순식간에 복도 끝의 어느 방으로 사라졌다.


 “나와도 돼, 1957번.” 1957번 영혼이 창문으로 방금 남자영혼이 사라진 복도 끝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책상 앞에 앉아 지켜보고 있던 여우가 말했다. 그러자 영혼은 흠칫 놀라며 곧 방문을 열고 나왔다.


 “우와, 일하는 모습 보니까 색다르네요.” 영혼은 어제와 다르게 머리를 풀고서는 여우 앞에 나타났다. 여우는 초코우유를 한 모금 삼키며 씩 웃어보였다.

“내가 좀 멋지지.” 여우는 자켓 깃을 잡고 아래로 살짝 내리며 말했다.

“여우님, 여우님은 저 만질 수 있어요? 왜, 나는 영혼이니까 막 투명하고 그런건가 해서.” 영혼이 상체를 숙여 여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가까워진 1957번 영혼과 눈을 마주하게 된 여우는 순식간에 귀가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여우의 귀에는 커다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혼끼리는 만질 수 있는데 나, 나는 영혼들 못만져. 나는 그냥 죄 지은 영혼들 상대하는 영혼도, 인간도 아닌 존재니까.” 여우는 눈을 깜빡이며 영혼의 눈을 피했다.

“그렇구나.” 영혼은 숙였던 상체를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여우님은 천국 가봤어요?”

“안 가봤지. 내가 전생에 짐승의 몸으로 뭘 잘했다고 천국에 가냐.” 여우는 헛기침을 하며 초코우유를 다시 한번 마셨다.

“나는 그럼 전생에 인간의 몸으로 뭘 잘했다고 천국에 가는 거죠?” 영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우에게 다시 물었다.

“그건 나도 몰라.” 여우는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래도 너는 열심히 살았잖아. 그 보답으로 천국을 주는거지. 이제 그만 힘들으라고.”


 주륵- 영혼의 뺨에 투명한 눈물이 내렸다. 영혼은 얼른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여우는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못 본 척을 했다. 여우의 가슴 한켠이 그녀가 흘린 눈물 한 방울로 가득 채워졌다. 영혼도 여우와 마찬가지로 멍했다. 자신이 왜 여우의 그 한마디에 눈물을 흘렸는지 의문이었다. “고마워요. 그냥 내 생각이지만 저한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여우님이 처음인 것 같아요. 저 진짜 힘들게 살았나봐요.” 영혼은 애써 웃으며 책상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어 여우를 바라보았다.


 여우는 보았다. 영혼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직도 발버둥을 치고 있는 가엾은 이승의 그녀를.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이승의 그녀는 여우에게 감사를 표하듯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여우가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이승의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여우의 앞에는 슬픔이란 걸 느껴본 적 없는 듯한 모습의 아름다운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떠들며 두번째 날이 지나갔다. 영혼은 방 안에 들어가 폭신한 침대 위에 누웠다. 여우가 자신에게 툭- 하고 건넨 말이 처음에는 가슴을 후벼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지만, 그 전율은 곧 눈물로 변했고, 이내 그 눈물은 기분 좋은 설렘으로 변했다.

“말도 안돼.” 양 손으로 두 볼을 감싸고 영혼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의 귀에 크고 규칙적인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누워있다 방 밖으로 나왔다. 여우는 부스스한 영혼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머리 좀 정리하지, 영혼아.” 여우의 말에 영혼은 얼른 머리를 정리했다.

“언제나 깔끔하네요, 여우님은.” 영혼은 귀를 살짝 붉히며 여우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천년째 이런 모습인데, 뭐. 칭찬으로 들을게.” 여우도 귀를 살짝 붉혔다.


 영혼은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둘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서로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당신 눈은 진짜 헤아릴 수가 없어요. 눈이 참 복잡하게도 생겼다.” 영혼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네 눈은 단순해. 슬픔 반, 행복 반.” 여우는 영혼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영혼은 의자에서 살짝 일어나 상체를 숙여 어제처럼 여우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채로 말했다.  “그래요? 복잡한 것 보다야 낫죠.” 여우는 다시 귀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우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두 볼을 양손으로 잡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4


 ‘덜컥-’

커다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영혼과 여우는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졌다.

“1957번 데리러 왔습니다.” 두명의 경비는 여우와 영혼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우는 영혼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착오가 생긴 게 벌써 확인이 됐나보네.” 여우는 그녀를 떠나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경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여우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

“네. 총괄님께서 1957번 영혼을 천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잠깐 착오가 있어 여기로 들어오게 된 거라고 확인 하셨어요. 데려가겠습니다.”

영혼은 의자에서 일어나 여우를 보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경비들의 손에 이끌려 곧 커다란 문 밖으로 사라졌다.

 

 적막이 머무는 주변을 여우는 둘러보았다. 여우가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리자 1957번 영혼이 머물던 작은 방은 없어졌다. 야속하게 영혼을 데리고 가버린 생쥐 경비들이 미웠다. 여우는 책상에 발을 올리고 초코우유를 한 모금 빨아 마셨다. 눈을 감고 있자니 1957번 영혼이 문 밖으로 이끌려 나가기 전 자신을 쳐다보았던 눈빛이 자꾸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제 입술에 전해졌던 따뜻한 온기에 몸에 전기라도 흐른 듯이 찌릿했다.


 여우는 초코우유를 책상에 내려놓은 다음 결심이라도 한 듯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여우는 한참동안 커다란 문을 노려보다가 성킁성큼 걸어가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뛰어갔다.


 “소원. 소원 들어주셔야죠.” 여우는 총괄님 앞에 헉헉거리며 섰다.

“그래, 소원이 뭔데?” 총괄님은 보던 업무를 책상에 놓고 여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인간으로서의 생을 주세요.” 여우는 대답했다.




에필로그


 “저, 저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20대의 젊은 남자영혼이 자신을 잡고 끌고 가는 두 경비에게 물었다.

“천국으로 갑니다.” 한 경비가 대답했다. “여우님은 정말 좋은 생을 사셨거든요.”





  • ?
    킹갓블래하자 2018.02.03 00:22
    오랜만에 되게 감명깊게 읽은 글이었어용.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당!
  • profile
    korean 2018.02.28 19:15
    열심히 쓴 좋은 작품입니다.
    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믿어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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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21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 - 탈피하며 추락하다 1 file 김건우 2018.01.30 30
442 21회 창작 콘테스트 단편소설 공모-동상이몽 1 서울메이트 2018.01.28 25
441 1 header134 2018.01.28 18
440 21차 창착 콘테스트 소설 공모 - 내딸의 마직막 소원 1 슬아 2018.01.25 43
439 사랑하지 않다 1 닉네임1 2018.01.23 44
438 살기 좋은 시절 1 엑스타 2018.01.19 44
437 56 진돌 2018.01.16 23
436 ShyBoy 아스커 2018.01.15 24
435 소원의 항아리 1 윤회웅 2018.01.15 26
» ELOQUENCE 2 STARLIGHT 2018.01.13 22
433 첨부파일이 안드는데요 1 카푸치노 2018.01.12 42
432 소설이길어서저장이완되네요,,,어디로하죠 2 카푸치노 2018.01.12 59
431 사랑하는 엄마의 벌레먹은 사과 1 킹갓블래하자 2018.01.12 43
430 시간과 함께한 남자 2 누가울새를죽였는가 2018.01.11 42
429 열정과 냉정은 똑같다. 2 배움엔끝이없다 2018.01.08 69
428 하얀 이불 2 file 이글루 2018.01.07 143
427 물의 색 3 sugyeong 2018.01.02 160
426 나체의 표정 1 file gksghdqnl 2017.12.27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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