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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3 16:29

태왕 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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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 을불

 

 

 

을불乙弗.

새 을에 아닐 불을 쓴다. 그게 청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어느 별이 무수히 떨어지는 밤,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잠저에서 태어났다. 서천왕의 적손이요, 계루부 돌고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계루부의 왕족이었으니 고귀한 신분이었다. 태몽은 다섯 마리 용이 승천하는 꿈이요, 그가 태어난 날에는 무수한 별들이 떨어졌다. 장차 큰일을 할 용맹한 전사가 될 것입니다. 예시가 내려지자 서천왕은 놀라워했고 태자 상부는 검은 마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을불의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안국군 달가는 을불의 탄생에 크게 기뻐하며 오로지 정통한 피가 흐르는 왕족이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을불은 결국 을불(乙弗)이란 이름을 받았다. 귀한 이름을 지어주려 했으나 돌고는 짐짓 주저했다. 자신의 형인 고구려의 태자 상부(相夫)는 본래부터 야욕과 시기심이 많은 자였다. 혹여나 자신의 아들이 해를 입을까 두려웠던 돌고는 일부러 아들의 이름도 뜻도 나쁘게 지었다. 을불, 새 혹은 연약한 넝쿨이라는 뜻. 그러나 강인한 잡초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돌고는 방싯 방싯 웃고 있는 아들을 안고 쓰다듬으며 말했다. 을불아. 너는 강인한 잡초다. 부디 뜯기고 부딪혀도 살아남아 장차 큰 인물이 되거라.


을불, 새 을(乙)에 아닐 불(弗). 을불, 여린 넝쿨 을(乙)에 아닐 불(弗).

잡초, 소년의 이름이었다.



봉상왕 2년,

돌고의 저에서 커다란 불이 솟았다. 시뻘건 불길은 거대한 왕자의 사저를 옮기고 옮겨 순식간에 전체로 번졌다. 돌고는 두려움에 바들거리며 떨고 있는 제 아들을 꼭 안았다. 어려서 어미 잃고 혼자 보듬고 키운 하나뿐인 아들이다.

 

“을불아. 아버지 말 잘 듣거라.”

“아, 아, 아버지….”

“오냐. 아버지다. 아버지가 스스로 죽을 테니, 너는 도망쳐라.”

“죽는다니? 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야!”

 

싫어! 안 갈래! 나는 싫어! 열한 살 을불이 아버지 품을 잡고 엉엉 울었다. 돌고는 건강한 갈색빛 피부를 가진 잘생긴 소년을 품에 보듬고 안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는 아들의 얼굴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얼마나 애틋하던지, 가슴이 바짝 바짝 시렸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단다.”

“하지만 싫어! 아버지도 어머니한테 가려고 그러지? 응? 아버지. 가지 마. 가지 마아.”

“을불아!”

“아버지….”

“아버지 말 들어라. 듣지 않는다면 평생 망령이 되어 널 괴롭힐 거야.”


그것도 싫은데... 말끝을 흐리며 눈물이 아롱지는 아들을 본 돌고가 미소지어 웃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보내야 했다.


“가면 말이 있다. 타는 법은 알고 있지? 가서, 멀리 멀리 가거라. 아주 멀리 가야 한다.”

“아버지, 어머니 곁으로 가는 거야?”

“그래. 그렇단다. 천 밤만 자면, 너도 아버지랑 만날 수 있어. 아버지도 어머니 소식 전하여 주마.”

“정말, 정말이지? 아버지랑 영원히 안 보고 그런 거 아니지?”

“그럼. 그러니 약속하자. 절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가겠다고.”


응, 알았어! 을불이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거라. 돌고가 서둘러 아들의 등을 밀었다.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거야? 그래. 안 된단다. 아주 빨리 말을 몰아야 해. 알았어. 아버지. 을불이 서둘러 뛰어갔다. 달음박질을 하면서도, 근근이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에 미소 지으면서 손을 흔들던 그가, 이내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서글프게 웃었다. 돌고는 이내, 활활 타는 불길에 제 몸을 던졌다.


그 놈이 달아났다고?


태왕 상부는 숙부 달가에 이어 동생 돌고가 자결했다는 소식에 기쁨에 잠겨 탄성을 내뱉은 뒤 어서 을불 그 놈을 찾아서 쳐 죽이라 명장 고노자에게 명령했으나 돌고가 무슨 짓을 했던지 그 어린것이 무사히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크게 노해 화를 내며 고노자를 향해 단상을 내던졌다. 고정하소서! 국상이 태왕을 뜯어말렸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그 어린놈이 뭐라고 그대와 같은 명장마저 잡지 못한단 말인가!”


- 안국군과 왕자가 수를 썼던 모양이옵니다. 이미 오래 전 도망친 것으로 보이는데...


“역적의 죄를 범한 죄인들을 안국군과 왕자라 부르지 말라!”

 


상부가 격분한 나머지 부복한 고노자의 뺨을 한 대 쳤다. 폐하! 국상이 기함했으나 태왕은 듣지 않았다. 진작 그놈을 죽였어야 하는 것을! 그가 시기심과 질투로 점철된 마음으로 태왕 추모의 이름을 대고 을불을 저주하였다.



“을불, 사나운 아귀여! 추모대왕의 혈맥을 타고난 너를 저주하리라!”



더러운 놈. 삿된 핏줄인 주제에 내 자리를 탐내려 내려온 악랄한 놈! 너 태왕 주몽의 피를 받아 나와 한데 피가 엉기었지만 너는 그저 계루부의 돌고에게서 난 나의 조카일 뿐이다. 네가 아무렴 뛰어나봤자 그저 한낱 고추가의 벼슬이나 하는 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네놈은 나를 넘을 수 없다. 그래, 너는 네 아비마냥 목석같이 평범한 위인이 되었어야 했다. 하늘이 도왔으니 너를 살렸겠지? 그래, 그러니 태왕인 짐, 땅의 주인을 대표하여 네놈에게 영겁의 고통을 안기리라.


악귀여! 어떤 기쁨도 슬픔도 없이 오직 영욕의 저주만이 너를 반기기라.


악귀여! 번뇌, 절망, 혼돈, 이 모든 것이 너를 향하리라.


땅의 모든 죄를 네 놈이 다 받아, 영원히 고통 받아 처참히 다섯 갈래 찢겨 죽어라!


봉상왕 상부는 제 창을 빼들어 밤하늘로 던졌다. 이로서 을불은 어디까지나 을불(乙弗)로 남아 영원히 죽을 것이었다.


그래, 영원히 죽을 것이었다.


 


을불은 퉁명스런 얼굴을 하고 척척한 연못가를 걸었다. 나무신이 짝짝 진흙에 달라붙는 것이, 영 기분이 이상했다. 신을 새로 장만해야 할까. 하지만 돈이 없어 지금도 다 떨어진 헝겊을 주워 옷이라고 걸치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주인어른도 거 악취미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을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라이, 개 같은 놈. 을불이 걸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슴살이에 저가 종이나 다름없는 신세라지만, 일 년째 이런 곳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자신을 아니꼬워했다고 보일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다.


- 을불아, 연못에서 개구리가 몹시 요란하게 울어서 잠을 청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네가 연못에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해라. 이게 무슨 해괴한 말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그깟 품삯 주기 싫다고 그러는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연못에 돌 던지기에 결국 참다못한 을불이 연못에 대고 욕을 했다.



“거 버러지 같은 인간 같으니라고. 일 년째 머슴살이 하는데 삯 주기가 싫어서 이런 일까지 시키니 원...”


- 이봐! 을불!



부자인 사람이 거 되게 야박....... 이제 막 쌍욕을 하려는 찰나 저 멀리서 시끄럽고 경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재모였다. 저 놈이 또 왜? 분명히 또 제가 먹을 밥값이나 내달라 하겠지 하며 체념한 을불이 모난 목소리로 재모에게 대답했다.



“왜.”


“또 연못에 돌 던지남? 돌 던져도 개구리는 계속 운다우. 아야!”


“말길을 못 알아먹겠다. 옷이나 바로 하고 말하던가. 왜, 또 밥 사달라고?”


“에이. 아니지! 내래 자네가 어떤 사이인데. 그냥 밥이나 같이 하는 사이인가?”



그럼 아니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을불의 반응에 재모가 짐짓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가 침울해져 축 쳐지자 을불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가볍게 재모를 발로 찼다. 아! 왜 발로 차우! 한심하니 차지. 자네 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모르는감?!



“알았다. 알았어. 별 화상을 다 보겠네. 얼른 본론이나 뱉어보게나. 친구.”


“자네 날 진정 친구로 인정하는 건감?”


“그래. 그래.”



그러자 얼굴이 확 산 재모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네 나와 함께 장사나 하지 않겠는감?


“장사?”

“그래. 장사. 내가 요 근방에 소금 장사하는 사람을 봤는데, 돈을 제법 벌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을불은 그 날로 주인집을 나왔다. 지금처럼 머슴살이를 해서 주인에게 부려먹히느니 차라리 소금 장수를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여담으로 주인의 이름은 음모(陰牟)였다.




을불은 소금 장수가 되었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했고, 한동안은 잘 풀리나 싶었지만 녹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압록강 변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을불이 주인집 할멈의 음모에 빠져 절도범이라며 곤장을 실컷 맞았다. 방값으로 소금 한 말을 줬는데 노파가 노망이 들어 조금 받았다며 앙심을 품고는 을불에게 도둑 누명을 씌운 것이었다. 재모는 을불이 억울하게 당한 것을 보고도 도망쳤지만, 을불이 갖고 있던 소금을 몽땅 몰수당한 것을 보자 이내 다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그 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상부가 을불을 찾아 죽인다 하는 소식에 을불은 눈을 피할 수 있는 비류강가에서 은닉했다. 두 사람의 삶은 비참했다. 재모는 구걸이며 동냥을 하는가 하면 을불은 근근이 주변에 사정하여 얻은 소금을 사람에게 팔면서 살고 있었다.


 

“오늘 분량은 다 팔았우?”


“다 팔았지. 뭐라도 좀 얻었냐?”


“얻었지. 요 근방에 잔치가 있어, 좀 달라고 했더니 금방 주던걸.”


 

참말이냐?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을불이 묻자 재모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보따리를 풀자 백숙부터 맛나게 보이는 것들이 나름대로 있었다. 뭐 하우? 어서 먹으라우. 재모가 먼저 다리를 들고 뜯자 을불이 어색하게 그것을 들고 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이내 닭다리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재모가 을불의 얼굴을 보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혼잣말을 했다. 하도 굴곡진 생활에 지쳐 옷도 다 해지고 시꺼먼 얼굴에도 영 핏기가 없었지만 그 얼굴만은 마치 용안마냥 광채가 번쩍번쩍 났다. 재모가 저 잘생긴 얼굴만은 변하지 않는다며 중얼거릴 때,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고개를 돌아보았다.



- 돌고 왕자님의 아드님이 맞으시지요?



아마도, 어느 날 두 사람을 찾아온 다수의 일행만 아니었다면 그는 그 생활을 계속 영위했을 것이다. 비참하고 참혹하다 하더라도 고구려의 모든 백성들이 그러했고, 을불 또한 고구려의 수많은 백성 중 하나였다. 을불은 제 아버지 돌고가 잡초라고 이름을 지었던 만큼, 저 자신도 이전의 생과는 달리 빈천하다 해도 평이하게 살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숱한 저주에도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을불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봉상왕 8년,


국상 창조리는 태왕을 폐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국상에 오른 지 어언 네 해가 흘러가고 있었지만, 왕의 폭정은 그칠 일이 없었다. 명장 고노자가 연이어 외세의 침입을 물리쳤으나, 폭정으로 내정은 주체할 수 없이 망가지고 있었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흉년이 끊이지 않고 백성들이 하루가 다르게 굶어서 죽어가는 때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새로 건축하겠다는 태왕의 말에, 보다 못한 창조리가 간언을 한 날이 있었다.


“대왕이시여,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집을 떠나 떠돌고 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을 끌어다가 궁궐공사에 내몰아 괴롭히는 것은 임금 된 도리가 아니옵니다. 백성들이 우선 먹고 살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창고를 열고 그들을 구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당장 궁궐공사를 중지하시옵소서. 우리 백성들이 지친 틈을 타서 이웃의 모용선비가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부디 생각을 바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심을 다한 간언이었으나 태왕 상부는 오히려 기분이 상한다는 듯 날이 선 대응을 내놓았다. 그는 본래 사치와 향락을 가까이 하고 충신의 간언을 멀리하는 자였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신성한 존재요. 궁궐이 장엄하지 못하면 어찌 위엄을 보일 수 있단 말이오. 지금 국상이 임금인 나를 나무라는 것은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함이 아니오?”


“대왕이시여,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찌 백성들의 어버이라고 하겠습니까. 신이 국상이 된 이상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제가 명예를 구하겠습니까.”


 

창조리가 다시 한 번 간하였다. 상부가 창조리를 향해 비식 웃었다. 



“국상은 백성들을 위해서 죽으려 하오?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마시오.”

 


그 말은 곧 창조리를 죽이겠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날로 창조리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함을 느끼고 자신의 두 부하를 시켜 살아있다 소문이 도는 을불을 찾게 했다.




을불은 비루먹은 나귀마냥 중년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 할멈에 의해 곤장을 맞은 궁둥짝이 아직도 쑤셨다. 그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다가 오랜만에 목에 기름칠을 한 열여덟의 청년은 지레 겁을 먹은 듯 몸을 굽혔다. 그러자 창조리가 크게 당황해 서둘러 을불을 일으켰다.



- 태왕이 되실 분이 섣불리 몸을 굽히시면 아니 되십니다.


“태왕이라니, 그게 무슨….”


- 현 태왕이 악랄하고 무자비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을불님께서 태왕에 올라 폭정을 잠재우셔야 합니다.”


 

그 말에 을불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운명,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것으로 희생되었는가. 아버지 돌고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아주 멀리 가거라. 아주 아주 멀리 가야 한다. 입술을 꾹 깨문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착각을 한 모양이오.”


- 폐하.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태왕이 될 몸도 하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저 소금 장수일 뿐이야.”



- 하늘이 폐하를 비범인(非凡人)으로 뜻을 받아 내렸으니, 하늘의 뜻은 필연입니다.


“비범인(非凡人)? 아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 아비 목숨을 대신 빌어 살아난 몸이니 범인(凡人)은 범인이겠지.”



을불이 쓰게 웃으며 창조리의 말을 비웃었다. 돌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비의 이름이었다. 선량하고 남을 잘 위하고, 형의 자리를 함부로 탐내지도 않았던 가장 영예로운 고추가의 이름.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숙부의 칼에 무참히 쓰러져 죽었다.


“태왕의 폭성으로 도성만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천만에. 고구려의 모든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먹어 배를 채운다.”


- ......


“그대는 국상이라니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나와 달리 많은 것을 알겠지. 알아서 해 보시오. 나는 태왕이 아니니.”


말하며 그는 주저없이 등을 돌리려 했다. 창조리는 말없이 그 모습을 관망하다, 을불의 손을 잡았다.


- 돌아오기를 바라셨을 겁니다.


“뭐?”


- 왕자님께서도 태왕 폐하가 돌아오길 원하셨을 겁니다. 큰 인물이 되실 분이니, 마땅히 목숨을 희생하셨겠지요.


가거라, 멀리 가거라. 저를 안고 속삭이던 마지막 목소리, 을불이 울컥하여 창조리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신이 뭔데 내 아버지를…!”


- 복수하셔야 합니다.


도성은, 백성은 당신을 바랄 겁니다. 창조리의 나직한 한 마디에 을불의 눈매가 옅게 떨렸다.


 



즉위한 직후, 을불은 폐위되어 유폐된 당숙을 찾아갔다. 

폐위당한 충격으로 제대로 먹지도 못해 죽어가면서도 비웃음을 잃지 않는 상부에게 그가 주먹을 쥐었다.



“왜 내 아버지를 죽였느냐? 왜 죄 없는 내 아버지를 죽이고 역적이라 불렀느냐!”


- 너는 큰일을 할 위인으로 태어났다지만, 내게 너는 그저 보위를 노릴 사악한 악귀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천륜을 어기고 친동생을 죽였다고. 단지 그 때문에!”


- 그래. 



체념한 듯한 상부의 음성에 을불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제서야 자신의 죄를 인정한단 말인가. 그러나 하나도 개운치 않다. 가거라. 아주 멀리 가거라.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을불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이내 아주 초연하고 고요해졌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을 하지 않는 을불을 본 봉상왕이 그를 다시 한 번 비난했다.


- 무엇 하느냐? 어서 죽여라. 네 아버지를 죽인 내 피를 어서 네 손에 묻혀야 할 것이 아니냐.


“너는 내 손으로 죽이기도 아까운 자다.”


- 뭐라고?


“내 아버지에 비하면 너는 하룻강아지보다도 못하다.”


- 네 이놈. 이런 고얀...


“마음 같아서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네 고기를 뜯어 먹으라고 선믈로 주고 싶다. 하지만 개는 삶아먹을 수라도 있지, 너는 악랄하고 더러운 자라 그조차도 하지 못해. 너는 태왕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인간이었다. 아무런 가치가 없어.”


그러니 죽일 가치도 없겠지. 어차피 곧 죽을 명줄이니 내가 끊지 않아도 죽을 몸, 이만 가겠다. 경멸하는 눈길의 을불을 본 상부가 부들부들 떨었다. 저주하리라! 악에 받힌 목소리를 을불은 그대로 무시했다. 죽은 아버지 돌고의 한이 마치 그를 부르는 듯했다. 이틀 후 을불은 폐주가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국상.”


- 태왕 폐하. 하문하십시오.


“내 아직 연치 어려 열여덟입니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도 받지 못해 제왕학은 물론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워야 할 겁니다.”


내 숨결 하나에 일일히 맺힌 이 핏방울이, 이 손아귀를 거쳐갔다는 내 용의 발톱이, 두 번 다시 돌아올 일 있겠습니까?


을불이 두 손을 펴냈다. 창조리는 용이 을불에게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태왕의 자리에 오르되 영원히 범부의 촌부였던 그 모습 그대로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시대가 좀 더 길어질 것이다. 이제야 폭군 상부의 치세가 끝나고 자신의 시대가 다가왔는데,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을불의 용의 발톱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군주의 자질이 없다는 핑계를 빌미로 을불을 마땅히 허수아비처럼 부릴 수 있을 것이었다.


- 그러할 것입니다.


“…….”


그러나 창조리는 우선은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을불을 안심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창조리는 간계에 능한 자였다. 진정한 자신의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잠깐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에 을불은 말이 없었다. 거짓이구나. 창조리가 진정 그러한 생각을 했다면 이전의 그것처럼 자신의 말을 부정하였을 것이다. 을불은 폐주 봉상왕을 이어 제 삶의 또 다른 전쟁이 코앞에 닥쳐왔음을 느꼈다. 자신을 태왕으로 옹립시킨 창조리가 또 다른 새로운 정적으로 부상한 것이었다. 어디 한끝 쉬어갈 곳이 없구나. 을불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 운명, 전투와 전쟁의 연속이었다.


“국상.”

“그대의 뜻을 잘 알겠으니 이만 돌아가 보시오.”


창조리가 돌아간 이후 그는 고민했다. 바야흐로 마지막 고민이 될 것이었다. 난세의 시대, 그러나 그래도 이 땅을 일으킬 인물이 나밖에 없다면. 해야 할 인물이 나 뿐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용이 될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용이 될 것이다. 아니, 해야만 한다. 기꺼이 이 땅을 위해 여의주를 물고서. 마침내 내린 결정이었다. 을불이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무기의 허물을 벗고 용이 되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거부할 수 없다면 완전해지리라. 완전한 용이 된 그의 뜻이 정해졌다. 이제는 실행만이 남았겠지. 을불은 물고 있던 여의주를 퉤 하고 뱉었다. 태왕이 여의주를 뱉자 그것은 그대로 칼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돌고의 죽은 숨결과 피땀으로 만들어진 칼, 이제는 자신의 피땀으로 채워야만 할 것이리라. 비로소 태왕이 되기로 마음먹은 어린 군주가 미소 지었다. 서글픈 미소였다.


 

을불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자신의 보검을 보았다. 용의 발톱이다. 앞으로 이것으로 무수한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태왕이 된 을불은 이미 이전의 을불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보검을 응시하다가, 이내 두 손에 꾹 쥐었다. 아버지. 저 이제 태왕이 되었어요. 이제 을불 아닌 태왕으로 살아야겠죠.

보검은 발톱으로, 피는 보옥으로, 그리고 자신의 치세는, 핏방울과 숙청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을불이 눈을 감았다. 후일, 그가 제 보검으로 직접 국상의 목을 베게 되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았을 날이다.


미천왕美川王. 낙랑군과 선비족을 정복하고 모용선비의 군주 모용외와 평생의 공방을 벌인 고구려의 정복군주. 

제국의 대들보, 영원한 태왕. 미천왕 고을불, 그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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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왕 을불 샐비어 2015.03.13 194
95 만약에 비위 2015.03.12 30
94 여나래 2015.03.01 26
93 린넨의 정원 도재 2015.02.27 418
92 사막위의 행복 케인크로니클 2015.02.27 55
91 Broken toy file 케인크로니클 2015.02.27 127
90 죽음의 숲 요미요미004 2015.02.25 49
89 편의점 1 인랑 2015.02.25 511
88 구름 위에도 별이 있을까? 아라 2015.02.24 294
87 주인[主人] Estrella 2015.02.16 69
86 하루에 3초 만나는 날. 기억의끝 2015.02.11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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